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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퍼거는 귀여워] 감자 팬클럽 감자 팬클럽  그 날은 평범한 오후였다. 감자가 한 50일쯤이었을까. 분유 냄새가 폴폴 나는 뽀시래기 시절, 남편은 출근하고 나는 감자랑 하루 종일 붙어있으면서 젖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거실 소파 위에 앉아 다리 위에 아이를 끼워놓고는,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었다. 배부른 아이는 나른하게 누워있고, 모처럼의 평화로운 분위기. 그때 감자는 내 눈을 정확하게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등줄기부터 짜르르 행복감이 느껴졌다. “아…. 이게 행복이구나” 감자를 낳고 밤낮으로 잠도 못 자고, 회복이 늦어서 제대로 앉지도 서지도 못했던 나날들이었다. 내 배에서 나왔지만, 처음에는 실감이 안 났고, 나중에는 정신이 없었고, 씻지도 먹지도 못해 사랑스러움을 느낄 새도 없었다. 하지만 그 날 처음 눈이 .. 2024. 11. 5.
[씨앗문장] 엄마와 딸―가장 친밀하고 가장 먼 엄마와 딸―가장 친밀하고 가장 먼   하지만 진짜 문제는 가사노동이 아니라 감정노동이었다. 어머니는 나의 가사노동에 시시콜콜, 일거수일투족, 사사건건 간섭하기 시작했다. 장을 봐 오면 ‘이게 뭐냐?’부터 시작해서 ‘이건 왜 사 왔냐?’ ‘뭘 이렇게 많이 사 왔냐?’ ‘이건 왜 데치냐?’ ‘이걸 왜 고춧가루가 아니라 고추장을 넣느냐?’ ‘뭘 이렇게 늘어놓냐?’ ‘왜 설거지를 빨리 안 하냐?’ ‘뭘 이렇게 많이 버리냐?’…. 하루 종일 집에 혼자 계셨을 테니 심심했을 것이고, 딸이 들어왔으니 반가웠을 것이다. 이런 잔소리가 나름대로 소통의 욕구인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난 어머니의 기분에 장단 맞춰 가며 느릿느릿 설렁설렁 일할 만큼 시간의 여유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점점 대꾸하는 말이 짧아지고 날.. 2024. 11. 4.
[인류학을 나눌레오] 인류학을 알릴레오 인류학을 알릴레오 이기헌(인문공간 세종) 집을 보면 살고 있는 사람이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어떻게 살고 싶어 하는지 알게 된다. 올해 인문세는 집을 지었다. 온라인 집, 홈페이지에 우리의 색깔을 담기 위해 같이 고민하며 뚝딱뚝딱 만들어갔다. 마음과 다르게 계획대로 안 되고 좌충우돌하는 과정을 겪어야 했지만 일단 입주할 정도로 만들고 나니 뿌듯했다. 우리는 본격적으로 ‘인류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라는 정체성을 집에 담기 위해 부족의 상징인 범고래를 대문에 달고, 메뉴를 바꾸어 가며 실내 인테리어를 해나갔다. 우리가 무엇을 배우고, 어디를 가고, 어떤 관계를 맺고 싶은지 살림살이 배치하듯이 메뉴, 게시판, 아이콘 등 항목들을 자리 배치하느라 고심했다. 지난 여름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우리가 인디언으.. 2024. 11. 1.
[나의 석기 시대] 보이는 것 너머를 향한 여행 보이는 것 너머를 향한 여행눈(目)의 여왕 안데르센의 동화 중에 추운 나라 마녀가 총명한 소년을 납치하는 이야기가 있다. 「눈의 여왕」이다. 덴마크어로야 눈(雪)이 눈(目)일 리 없지만, 우리말로는 이 살벌한 겨울 마녀 이야기가 본다는 것의 문제를 제기하는 동화로 읽힌다. 이야기는 이렇다. 어느 날 악마가 이상한 거울을 하나 만들었다. 아무리 멋지고 아름다운 것이라도 그 거울에 비치기만 하면 구차하고 비루하게 보이는 거울이었다. “황홀하게 아름다운 경치는 푹 삶은 시금치처럼 보였고, 사람들은 몸체 없이 머리로 서 있는 것처럼 소름끼치고 흉측하게 보였다. 거울에 비친 사람들의 얼굴은 완전히 뒤틀려서 도무지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 없었으며, 주근깨라도 하나 있으면 얼굴이 온통 주근깨 투성이인 것처럼 보였다... 2024. 1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