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난 연재 ▽/연암을만나다27

[연암을만나다] 출세하지 않아도 출세하지 않아도 ‘연암’하면 우정, 그중에서도 많이 이야기되는 것이 ‘백탑청연’이다. ‘백탑청연’이라 불리는 연암을 비롯한 이덕무, 이서구, 서상수, 유금, 유득공은 모두 백탑 근처(지금의 서울 종로)에 살면서 매일같이 글 짓고, 읽고, 술 마시고, 풍류를 나눴다. 여기에 박제가, 홍대용, 백동수까지 늘 왕래했으니 상당 규모의 우정 네트워크다. 거문고를 뜯다가도 시를 짓고, 갓 하나를 놓고서도 줄줄이 문장을 짓는 이 문인들 사이에 무사가 하나 있었으니, 백동수(이하 영숙)다. 영숙은 ‘조선 최고 무사’라는 수식어가 붙을 만큼 재능과 실력이 뛰어났음에도 서얼이라는 신분 때문에(당시 급제자는 많고 벼슬자리는 적었다. 서자 출신은 등용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적절한 자리를 얻지 못했다. 서른하나의 창창한 청년.. 2020. 10. 22.
[연암을 만나다]벗에게서 온 편지 벗에게서 온 편지 홍대용은 이역만리에 있는 천애의 지기(知己)들하고만 절절한 편지를 주고받은 게 아니었나 보다.(자세한 내용은 ‘지기와의 이별’편에!) 조선 안에서도 홍대용의 편지를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얼어붙은 비탈과 눈 쌓인 골짜기, 연암골에서 지내고 계시는 연암이다. 아무리 멀어도 조선이라 청나라보다는 훨씬 가까운 거리에 있었지만, 서로 오고가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다. 연암은 홍국영의 화를 피해 개성 연암골로 들어가고, 홍대용은 전라도 태인 군수로 지내서, 3년이 되도록 서로 만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연암은 홍대용에게 얼굴도 어찌 변했을지 무척 궁금하지만 자신의 얼굴을 미루어 짐작한다며, 편지로 특이한 안부를 묻는다. ‘형은 스스로 점검하기에 정력과 기개가 어떠하신지요?’ 당시 .. 2020. 9. 24.
[연암을만나다] 지기(知己)와의 이별 지기(知己)와의 이별 “이 한 번 이별로 그만이구려! 저승에서 서로 만나도 부끄러움이 없이 살기를 맹세합시다.”- 박지원,「홍덕보 묘지명」, 『연암집(상)』8, 돌배게, 342쪽 연암의 벗이었던 홍대용의 죽음을 기리는 묘지명에 나온 한 대목이다. 홍대용이 북경여행을 떠났던 시절, 중국친구들과 헤어지며 서로를 바라보며 했던 말. 우리가 언제 다시 만날지 알 수는 없지만, 그때까지 부끄럽게 살지 말자. 서로의 삶에 이정도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관계라! 찰나의 만남이, 살아갈 날들을 다짐하는 강렬한 순간이 되다니!! 서장관인 숙부 홍억洪檍을 따라간 북경. 홍대용은 그곳에서 천애의 지기(知己)들을 만난다. 과거를 보러 절강에서 올라온 엄성과 반정균, 뒤이어 도착한 육비, 그리고 홍대용. 이들을 유리창에서 만나.. 2020. 9. 17.
[연암을만나다] 그것은 나의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이름이 아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이름이 많았다. 태어날 때 부모님이 정해준 이름, 성인이 되어서 정하는 자字, 친구들이 붙여주거나 자기가 만들어 붙이는 호號, 또 관직 앞에 성만 붙여서 부를 때도 있으니 종류만 네 가지다. 연암의 가까운 친구였던 선비 이덕무는 호를 많이 지었던 탓에 그중에서도 이름이 꽤나 많았다. 젊은 시절에 쓴 호만 해도, 삼호거사, 경재, 정암, 을엄, 형암, 영처, 선귤헌, 감감자, 범재거사, 9개나 된다. (그밖에도 청음관, 탑좌인, 재래도인, 매탕, 단좌헌, 주충어재, 학초목당, 향초원, 청장관 ‘등’이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이덕무가 호를 또 하나 지었다. 당堂 하나를 짓고 ‘선귤당蟬(매미)橘(귤)堂(집)’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거처에 붙이는 당호는 이름.. 2020.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