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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리포트34

[쿠바리포트] 까마구에이 지방대 이야기 까마구에이 지방대 이야기 아디오스, 몰포 폭풍 같았던 1학기가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된 지도 벌써 3주가 지났다. 2학년 1학기와 2학기 사이는 중요한 분기점이다. 1학기와 함께 우리들은 ‘몰포’(라는 교과서 이름을 우리끼리 이렇게 줄여 부른다)의 악몽에서 해방되기 때문이다. 마침내, 드디어! 몰포는 쿠바에서 공부하는 의대생이라면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국민 교과서다. 몰포의 앞부분은 해부학, 생화학, 조직학, 발생학의 기본기를 다지고, 뒷부분은 여기에 생리학까지 더해서 총 여덟 개의 신체 시스템을 총괄적으로 설명한다. 이 모든 내용이 삼 학기만에 끝난다. 지나치게 알뜰한 교과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거북목, 시력 저하, 수면 부족, 불안증, 우울증, 기타 등등의 병증을 경험하게 된다. 최근에 한국 의대생.. 2021. 3. 23.
[쿠바리포트] 하나로 환원될 수 없는 관계 하나로 환원될 수 없는 관계 관계라는 것은 결코 숫자로 환원되지 않는다. 돈으로도, 힘으로도, 계급으로도, 성욕으로도, 어떤 단일한 척도로도 일방적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물론 이런 거대한 힘들은 관계를 단번에 침투하여 박살내거나 변형시킬 수 있을 만큼 강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말하면서 방향을 틀 수 있는 공간은 그 속에 늘 남아 있다. 쿠바 관료주의 시스템처럼 거대한 바둑판으로 짜인 사회에도, 또 시급을 분 단위로 계산하면서 숨 막히게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도 늘 미시적으로 변화를 꿰할 수 있는 약간의 여지가 있다. 이 미묘한 ‘자유의 공간’은 어떤 인간관계를 맺느냐에 따라서 배치가 달라진다. 이 미시적인 관계를 배제하고는 어떤 거시적인 조직도 세워질 수 없다. 어떤 나무에서도.. 2021. 2. 23.
[쿠바리포트] 없음이 다름이 되는 법 없음이 다름이 되는 법 데자뷰 좀비가 된 딸 덕분에 어머니는 관광객이 아닌 생활인 모드로 아바나를 경험했다. 열대의 열기로 채색된 아바나 비에하에서 신나게 사진을 찍는 대신, 조용한 주거지에서 집과 시장만 왔다갔다하셨다. 시가와 럼을 기념품으로 사는 대신에 시장에서 씨가 마른 소고기와 해산물의 행방을 쫓으셨다. 이 와중에 우리 사이에서 반복적으로 오고 간 대화는 다음과 같다. “여기는 이런 것도 없니?”“응. 여기는 원래 이래.” 소름이 돋았다. 데자뷰 같은 문답이다. 어머니의 질문은 내가 처음에 쿠바에 왔을 때 가장 많이 던졌던 질문이었다. 있는 것보다 없는 게 더 많은, 텅 비어 있는 마켓 진열대가 이해되지 않았다. 골목 가득히 양파와 고구마만 꺼내놓은 재래시장의 풍경은 내 눈을 의심하게 했다. 물건.. 2021. 1. 26.
[쿠바리포트] 자전거와 탁구 자전거와 탁구 의사와 환자는 종이 한 장 차이 의사 되기 전에 환자 된다. 우리끼리 종종 하는 말이다. 카페인이 비뇨계에 어떤 악영향을 끼치는지 공부하면서 커피를 사발로 들이마시고, 싱싱한 신경계를 위한 숙면의 효과를 달달 외우면서도 매일 취침시간을 더 짧게 깎아나가고, 운동의 효과를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순환계의 작동 원리를 분석하면서도 정작 우리 몸은 하루 종일 책상 밖을 벗어나지 않는다. 완벽한 삶과 앎의 불일치다. 일시적인 희생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속이면 잠시 마음이 편해진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는가. ‘의학’이라는 산에 오르려면 잠이든 밥이든 미용이든 뭐든 하나는 포기해야 할 것 아닌가. 우선 이것만 이해하고 나면, 학업을 다 마치고 나면, 그렇게 의사가 되고 나면, 그때 건강을 챙기는 .. 2020. 12.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