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난 연재 ▽/나는 이렇게 SF를 읽었다27

보르코시건 시리즈에 바치는 애끓는 참회기 꺼진 SF도 다시 보기 보르코시건 시리즈에 바치는 애끓는 참회기 참회의 여정이 시작된 건 어느 오후의 한담에서였다. 친구가 여상히 던진 질문에 ‘몰라’라고 눙쳐버리지 못한 게 화근이라면 화근이었달까. “아아, 보르코시건 시리즈?”질문을 들은 나는 나는 잠깐 침묵을 지켰다가, 시차를 두고 천천히 뜸을 들이며 되물었다. 단 세 개의 단어를 말했을 뿐인데 벌써 후회되기 시작했다. 안다는 투로 두 번째 음소를 높여 길게 끄는, ‘아아’ 같은 추임새는 넣지 말걸. 그냥 통째로 모르는 척 할걸. 어조에 시큰둥함을 묻히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것도 잘 안 됐네. 그나저나 이 단어가 맞나? 보르‘코시’건? 보르‘시코’건 아니고? 헷갈려라. 사실 구태의연한 되물음 자체가, 할 말을 짜낼 시간을 벌기 위한 연막이었다. 이러쿵.. 2018. 7. 25.
맥스 브룩스,『세계대전 Z』 - 쌀알도 벽돌도 없이, 지옥에 가지 않을 것 맥스 브룩스,『세계대전 Z』- 쌀알도 벽돌도 없이, 지옥에 가지 않을 것 어릴 때 책벌레였다. 수많은 책들을 읽어치웠다. 종류를 가리지 않았다. 사전정보도 필요없었다.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다. 모르면 모른 채로 읽어서 좋았고, 추천받고 읽으면 기대가 되어서 좋았다. 그림이 있으면 만화 같아서 좋았고, 그림이 없으면 어른책 같아서 좋았다. 픽션은 재미있었고, 넌픽션은 흥미로웠다. 읽는 모든 이야기들이 다 나름의 의미를 남겼다. 책을 읽을 때면 나는 나무가 되었다. 행간으로 깊고 넓게 뿌리를 뻗어, 이미지와 관념들을 모세관으로 샅샅이 펌프질 해 올렸다. 빨아들인 양분은 머리 위 무성한 이파리로 피어났다. 바람이 불면 흔들리며 제각기의 방식으로 사각이는 소리를 내었다. 모든 독서가 신록같이 푸르렀다... 2018. 7. 4.
리처드 매드슨, 『나는 전설이다』 – 좀비들의 도시에서 살아남기 리처드 매드슨, 『나는 전설이다』 – 좀비들의 도시에서 살아남기 환절기마다 경미한 수면장애를 앓는다. 한 철 시행착오 속에 가까스로 안착한 체온과 기온 간 균형이 깨지고 새로운 시행착오의 시간이 돌아오는 것이다. 뜬눈으로 밤을 꼴딱 새우는 지경은 아니기 때문에 ‘경미하다’는 것일 뿐, 그 괴로움이 가벼워서 경미하다는 것이 아니다. 너무 덥거나 너무 춥거나, 살갗이 너무 차가워지거나 진땀이 흐른다. 잠들기가 어렵고, 그나마도 자주 깬다. 잠 드는 데 한 시간씩 걸리는 것보다 자주 깨는 게 더 괴로운데, 매번 깰 때마다 다시, 한 번도 잠든 적 없다는 듯이, 잠들지 못하며 잠을 청하는 시간을 반복해서 겪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세 번,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매번의 잠 이루기는 지난한 여정이다. .. 2018. 6. 20.
테드 창, 『당신 인생의 이야기』 - 추억의 호더 테드 창, 『당신 인생의 이야기』 - 추억의 호더 이것은 지구인들이 외계문명과 조우하는 이야기다.이것은 한 학자가 새로운 앎, 낯선 관점에 눈뜨는 이야기다.이것은 다 키운 아이를 잃은 한 어머니의 이야기이다.이것은 미래에 대한 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있기 때문에, 선언적인 선택을 해나가는 이야기이다. 과정 속에서 의미를 찾는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시간 축 위의 모든 것이 추억인 사람의 이야기이다. * * * 나는 물건에 대한 애착이 강한 사람이다. 한번 정든 물건은 쉽게 버리지 못한다. 내 주제를 깨달았기에 망정이지, 하염없이 천진난만하게 살아왔다면 지금쯤 이 구역의 악명 높은 호더(hoarder)가 되어 있었을 지도 모른다. 천만다행으로 나는 내게 축적의 욕망만이 주어졌을 뿐, ‘잘 축적하는 능력’은.. 2018. 5.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