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코쿠 순례길을 걷다(2)
4. 반야심경을 독송하다
순례 넷째 날은 마쓰야마에 위치한 53번 절 원명사에서 시작했다. 절의 산문을 들어서면 우선 미즈야(水屋)라는 곳에서 손과 입을 헹군다. 졸졸 흐르는 물이 넘치는 통(돌이나 나무로 만든)위에 자루가 긴 바가지가 걸쳐져 있다. 처음에는 식수인 줄 알고 마셨다가 나중에야 산문에 들어선 순례자가 입을 헹구고 손을 닦는 정화 의례를 하는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다음에는 종을 치는 찰소로 가서 종을 치면서 자신의 방문을 고한다. 이것도 순례자들이 하는 것을 보고 알게 되었다. 본당 앞에 비치된 장소에 양초와 향을 올리고 참배를 한 후, 본당을 참배하고 불경을 낭송한다. 이어서 홍법대사를 모셔둔 대사당을 참배하고 나서, 납경소로 가서 납경을 받으면 절에서의 하는 순례 의례가 끝난다. 눈으로 보기만 하다가 직접 해 보니 점점 자세가 경건해졌다.
본당에서 참배를 할 때는 <반야심경>을 읊어보기로 했다. 작년에 불교 강좌를 들으며 <반야심경>을 암송했던 기억을 복기했지만 원문 없이 읽기는 어려웠다. 휴대폰에 다운받아 보면서 원문을 읽기 시작했다. 조용한 경내에 경을 읊자니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계속 읊으니 점점 마음이 차분해졌다. 독송을 끝내고 합장을 했다. 이후 순례했던 모든 절에서 이 의례를 치르면서 통과했다. 절과 절을 잇는 마을 길옆으로 펼쳐지는 논뷰에 한적한 분위기까지 어우러져 햇빛이 내리쬐는 길을 걸으면서도 마음은 점점 순해지는 것 같았다. 마쓰야마 지역에서 순례했던 8곳 중 마지막 절인 46번 절 정유리사에서 외국인 순례자에게 부탁해서 셋이 함께 사진을 찍었다. 렌즈를 향해 저절로 번진 미소에 그 마음이 드러나 보였다. 이 길을 걸었던 순례자가 들었다는 일화에 의하면, 어느 순례자가 매일 아침 자신의 얼굴을 찍었는데 순례 첫날의 과 마지막 날의 얼굴을 비교해 보니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나 뭐라나. 우리도 혹시?
5. 오셋타이의 경험
시코쿠 순례길에서 경험하게 되는 풍습 중의 하나인 ‘오셋타이’는 그 지역 마을 사람들이 순례자들에게 베푸는 선물을 가리킨다. 시코쿠의 주민들은 순례자를 홍법대사나 불보살의 화신으로 여기는 신앙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순례자들에게 보시를 하면서 공덕을 쌓는다. 격려의 말에서 다양한 간식거리, 돈까지 주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88곳의 절을 걸어서 순례하는 이들은 종종 받게 되는 모양인데, 우리는 기차나 버스 등을 타고 이동한 경우가 많아 한 번도 받지 못했다. 그런데 뜻밖의 무화과를 받은 날이 있었다.
순례를 시작하면서 마을 길을 걷다 보면 한창 무르익어가는 무화과 밭을 종종 지나게 되었다. 멀리서부터 무화과 열매가 익는 냄새가 풍겼다. 농익어서 금방 떨어질 것 같은 그 열매 하나 따먹고 싶었다. 순례하는 걸음으로 차마 서리는 할 수 없어서 슈퍼에 가면 꼭 사먹자며 지나쳤다. 저녁거리를 사려고 들어갔던 슈퍼마다 과일 코너를 샅샅이 뒤졌지만 무화과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순례 넷째 날 52번 절 태산사로 들어서는 입구에 무화과 열매 판다는 안내판이 떡하니 나타났다! 무인 판매였는데 아이스박스 안을 여니 딱 한 봉지가 남아있었다. 무화과만 보면 입맛을 다셨던 친구는 환호성을 질렀다. 당장 사서 참배를 마치고 먹자고 가방에 챙겼다. 절내를 돌며 일정을 마치고 납경을 받으러 납경소로 들어가 돈을 꺼내려는데 지갑이 없단다. 무화과 값을 지불하고 지갑을 떨어뜨린 것이다. 가파르게 올라온 길을 허겁지겁 뛰어 내려갔더니 무인판매대 근처 땅바닥에 노란 지갑이 눈에 띄었다. 다시 절로 돌아와 그늘에 앉아 무화과 한 개를 입에 넣으니 도톨하면서 말랑한 식감에 달큰한 향이 퍼졌다. 놀랐던 마음을 진정시키며 하늘을 보자니 이런게 오셋타이 아닐까 싶었다. 길에서 본 무화과에 입맛을 다신 우리를 챙겨준 홍법대사님의 오셋타이. 순례길에 늘 함께 한다는 홍법대사님의 기척이 느껴졌달까.
순례 마지막 절인 정유리사에서 걸어서 순례하고 있는 외국인 여성과 만났다. 숙소로 돌아가는 교통편을 알아보러 간 친구들을 기다리며 경내에 있는 벤치에 나란히 앉아있었다. 절 입구쪽에서 마을 주민 한 분이 가까이 오더니 여자분에게 포도알이 든 작은 봉지를 내밀었다. 오셋타이였다. 옆에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한 봉지뿐이라며 곤란해하는 표정이 느껴졌다. 괜찮다고 손짓발짓을 한 끝에 함께 나눠 먹는 모습을 보고 돌아서 가셨다. 그렇게 진짜로 오셋타이도 받아보며 시코쿠 순례의 마지막 일정이 마무리되었다.
6.첫 순례로 남은 또다른 기억들
순례가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매일 공동체 공간으로 출근해서 공부하고 밥 먹고 친구들과 여러 활동을 한다. 잘 다녀왔냐는 친구들의 질문에는 또 갈 거라고 대답했다. 88곳을 모두 돌려면 4년이 걸리는 여정이더라는 말과 함께. 익숙한 일상(日常)을 떠나 낯선 공간에서 보냈던 이상(異常)의 시간. 아침에 일어나 전날 밤에 사다 놓은 음식들로 아침을 해결하고 숙소를 나서서 차를 타거나 걸어서 절에 도착하면 의례에 따라 참배를 하는 시간들, 평화롭게 펼쳐지던 초록색 논뷰의 끝에 위치한 절이 있는가 하면, 도심의 도로가 옆에도 있던 절들. 학교를 가고 출근을 하는 사람들 사이로 삿갓에 지팡이를 들고 흰옷을 입고 걸어가는 순례자도 보이는 풍경. 시코쿠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풍경이겠지만, 이국의 순례자에게는 생경한 모습이었다.
가보고 싶었던 그 길은 내가 그동안 걸었던 둘레길의 풍경과 비슷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했다. 특별히 다른 점이라면 절과 절을 이어서 걸어가는 여정이라는 점이었다. 번다한 일상에서 부대꼈던 마음이 단순한 반복으로 천천히 잠잠해져 갔다. 걸으면서 지나가는 풍경처럼 마음도 머물지 않고 흘러가는 감각에 조금씩 익숙해졌다. 산문을 통과하여 의례를 치르는 몸짓이 익어가는 만큼 다음 절을 향해 내딛는 발걸음에도 무심해졌다. 걷기에 의례가 연결되니 마음의 데시벨이 점점 더 낮아졌다.
순례 넷째날 저녁, 숙소로 돌아와 휴식을 하고 있는데 뭔가 이상한 감정이 올라왔다.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찌릿해져 오는 슬픔의 감각이었다. 초를 켜고 향을 살랐던 의례의 시간, 순례길 곳곳에서 보았던 무덤 행렬의 기억도 함께 새겨졌던가. 석수사를 순례할 때 향을 사르며 나와 주변 사람들의 평안을 빌었다. 그 끝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있었다. 그 잔상 때문인지 찌릿한 그 순간 울컥 눈물이 터졌다. 지난했던 삶에서 벗어난 아버지는 이제 평안해졌을까. 장례식장에서도 나오지 않던 눈물을 흘리며 애도의 시간을 가졌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8년이 지나서야,나의 삶과 아버지의 죽음이 그렇게 나에게 포개졌던 시간이었다. 첫 순례가 남긴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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