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남린 선생님의 임진왜란 이야기5 [허남린 선생님의 임진왜란 이야기] 히데요시의 권력욕과 조선 침략 히데요시의 권력욕과 조선 침략 허남린 선생님(캐나다 UBC 아시아학과 교수) 조선을 침략하던 시절, 일본은 전쟁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일본에 처음 사무라이 군사 정권이 들어선 것은 1185년이었다. 그 후 군사 정권은 얼굴을 바꾸어 가며 일본을 지배했다. 그렇게 끝날 줄 모르던 군사 정권이 막을 내린 것은 1945년이었다. 문관이 다스린 조선 그리고 중국과는 달리 일본은 750년 이상 무관이 나라를 다스린 셈이다. 혹자는 1868년 도쿠가와 바쿠후가 멸망하면서 군사 정권이 끝난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근대가 시작되면서 사무라이의 계급적 법적 신분은 사라졌지만, 실제로 일본을 운영한 주체는 사무라이의 후예 군사 집단이었다. 제국 일본의 주도권은 군부가 쥐고 흔들다가 1945년 패전으.. 2025. 8. 25. [허남린 선생님의 임진왜란 이야기] 전란의 기아와 권력 전란의 기아와 권력 허남린 선생님(캐나다 UBC 아시아학과 교수) 왜적이 쳐들어오자 하루 아침에 나라가 풍비박산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양쪽의 숫자만 보아도 뻔했다. 왜적의 군세는 10만을 훌쩍 넘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워야 하는 조선의 군세는 많아야 2~3만 명 정도였다. 그것도 모아 놓으면 먹을 것을 주지 않으니 흩어져 버리기 일쑤였다. 절대적 열세인데, 여기에 가지고 싸우는 무기는 활과 총의 대결이었다. 조선의 주무기는 활이었고, 왜적은 철포 혹은 조총이라 불린 총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그 총의 성능은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원시적이지만 당시에는 최신예 병기로 무적이었다. 싸움은 밀고 밀리면서 전개되어야 정상인데, 들고 싸워야 할 무기가 이렇다 보니 조선의 군사는 속절없이 밀리고 말았다. .. 2025. 7. 28. [허남린 선생님의 임진왜란 이야기] 권력과 폭력에 묻힌 침묵을 찾아 권력과 폭력에 묻힌 침묵을 찾아허남린 선생님(캐나다 UBC 아시아학과 교수) 임진왜란의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다. 조선의 인구는 3퍼센트에서 5퍼센트나 줄어든 것으로 추량된다. 이는 오십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에 근거한 추계이다.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숫자는 대략적 추계가 가능한데, 조선의 전체 인구는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럼에도 인구를 추정한 학자들은 있다. 이들의 널뛰기 추정치에 사망자 추계치를 대입하면 전체 인구의 3퍼센트에서 5퍼센트가 된다. 지금의 남한 인구 5천만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낮게 잡아 3퍼센트면 백오십만이고, 5퍼센트면 이백오십만 명이 목숨을 잃은 셈이다. 엄청난 숫자이다. 왜침의 참화는 조선의 구석구석에 미쳤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벼락처럼 내려친 망실의 고.. 2025. 6. 23. [허남린 선생님의 임진왜란 이야기] 콩알과 거대한 바위 콩알과 거대한 바위 허남린 선생님(캐나다 UBC 아시아학과 교수) 히데요시가 조선을 친 이유는 간단하다. 한 번 치면 쉽게 이길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는 상대를 가볍게 굴복시키고 얻을 수 있는 거대한 이익에 눈이 멀어 있었다. 자기 이익을 성취하기 수단으로 아무 상관 없는 이웃 나라 조선을 노렸고, 조선을 쉽게 손아귀에 넣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만약 조선이 거대한 힘을 갖고 있어 잘못 건드렸다가는 큰 코 다친다고 생각했다면 절대로 조선을 치지 않았을 것이다. 이룰 수 없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래도 하는 자는 멍청이이다. 하면 반드시 깨지고 자기 파멸로 갈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 굳이 하는 자는 구제불능의 병자이다. 히데요시는 어떻게 조선을 그렇게 쉽게 굴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 2025. 5. 26. 이전 1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