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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좋다

[불교가 좋다] “각자 다른데 높낮이를 구별할 수가 있느냐”

by 북드라망 2025. 3. 14.

“각자 다른데 높낮이를 구별할 수가 있느냐”

 


질문자1: 저는 글쓰기를 하고 나면, 저를 되게 많이 부정하게 돼요. 특히 글쓰기에 대해서.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면 나를 좀 긍정을 해볼까’하는 것과 ‘왜 꼭 글쓰기와 만나면 이렇게 내가 못나고 나를 비난하게 되는지’ 좀 풀고 싶어요.

 


정화스님: 지금 거기서 읽는 책들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웃음) 그 사람도 괴로워하면서 썼는데, 어쩌다가 수천 년 수백 년 수십 년을 남아 있어요. 지금 거기서 본 책들은 대부분 다 그런 책들이에요. 그런데 갑자기 하나 썼는데, (앞으로 오십 년 뒤에 다른 사람이 어떻게 평가할지는 알 수 없는 책인데)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책하고 지금 내가 쓰는 것하고 그걸 본인이 알게 모르게 항상 여기에다 본인을 맞추고 있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고흐가 살았을 때 작품 한 점도 못 팔았어요. 그나마 한 점 팔았다는 말이 있을 정돈데. 당시의 미술 평단에서는 쓰레기 같은 그림을 그린 거지요. 지금은 그런 쓰레기 같은 그림이 전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그림으로 바뀌어 있어요. 만일 고흐가 그때 당시 평가가 좋고 잘 살았으면 자살을 안 했을지도 모르지요. 본인이 본인을 못 받아들인 것이지요. 근데 그 사람이 백 년 뒤에만 나왔으면……. 말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지요.

그러니까 실제 평가는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든 간에, (관리야 하겠지만) 남과 관계없이 본인이 쓰면 되는데, 나는 이미 엄청난 평가를 받는 사람들의 그림하고 나를 비교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이제 글쓰기를 시작한 지 한 10년 됐다 그러면, 무의식적으로 ‘아 고흐 같은 그림을 그리고 싶다’하고 연상이 되거든요.

그래서 지금 글을 잘 못 썼다고 하는 게, 무엇에 비해서 잘 못 썼다고 판단하는 거예요. 전부다. 무엇에 비해서. 그래서 항상 우리가 “논어에 비해 내 글이 이렇다.” 이렇게 보고 있는 것하고 똑같아요. 그건 너무 당연한 것 같은 느낌이지요. 그런데 그 글이 백 년 뒤에 논어가 안 될 이유가 없는 거지요. 그런 것이 새로운 글을 쓸 수 있는 동력이 되긴 하지만, 내가 내 글을 판단하는 것 자체가 그렇게 명징하게 옳은 판단일 수도 없는 경우가 좀 많아요. 너무 괴로워하지 말고 조금만 괴로워하면서 좀 원만하게 해야 계속 자기를 바꿔 가는 동력이 되는 것이죠.

저도 지금 글을 정리해 쓰고 있는데, 감이당에서 두 달에 한 번씩 하는 강좌 있잖아요. 그걸 정리를 해줘서 이제 책을 정리하고 있는데, 거의 완벽하게 다시 한번 썼어요. 글을 고치는 게 아니고, 새로 썼어요. (하하) 그때 말해놨던 말들이 글로 할 땐 말이 안 되더라고요. 그걸 읽다 보니까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 그래서 전부 새로 썼어요. 여기저기 질의 응답한 것도 몇 개 뽑아 줬어요. 대여섯 개. 그것도 다 새로 썼어요. 그때 쓴 거 골격만 대충 이용하고 글 자체는 전부 새로 써야겠더라고. 그러니까 잘 썼다고 할 수도 없는 거지요. 다음에 한 1, 2년쯤 후 보면 어떤 일이, ‘또 그런 글을 썼는지…’하고 또 이렇게 돼요.

그래서 적당히 고민해야 해요. 전혀 고민이 없으면 고쳐질 리도 없고, 반면 많이 고민한다는 것은 쓸데없는 고민이에요. 그래서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 자체가 굉장한 것처럼 보여도 그런 글조차도 그 시대에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 글이었을 확률이 엄청 많아요. 이것을 글이라고 썼었다고 했더라도 그것도 굉장히 불확실해요. 저같이 불과 몇 개월 사이, 몇 년 사이 일이 이런 건데 안 그러겠습니까? 그것은 전부 다 본인이 안에 알게 모르게 지식의 변화가 급격히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보면 하루 안에 막 달라지니까 변화가, 안에서 지적 네트워크가 막 바뀌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써 놓고 보면 어제 썼는데 다음날 보면 별로 안 좋아 보이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것은 내부에서 지식 통로의 섬광이 굉장히 빨리 변하고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그냥 제 자신을 스스로 그냥 그렇게 생각을 해요. “그때는 그것이 맞고, 지금은 이것이 맞다.”라고 어떤 영화 제목처럼. 그때 제가 있죠, 그때는 지금 글쓰기를 제가 보면 잘 되고 있는 거예요.(하하하) 너무 거기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보지 말고, 안에서 지식의 네트워크가 생각보다 빨리 성장을 하고 있어요. 나중에 글을 보면 다시 쓰게 되잖아요.

 


질문자1: 글쓰기 결과만 갖고 나를 비교해 보니까 내가 못나서, 그러다 보니까 나를 비판하고, 부정하게 되고, 그러면서 더 큰 문제는 그동안 글쓰기를, 글을 다 쓰기 위해서 그 보낸 시간과 그런 과정들이 있잖아요, 그것도 다 깡그리 무시가 되는 거예요.

 

정화스님: 그런데 자기 글을 그렇게 보는 안목이 하루하루 바뀐 거예요. 공부한 기간이 없었다면 절대 그렇게 못 봐. 굉장히 자기가 자기 글에 대한 가치가 바뀐다니까. 일주일 만에 막 바뀌는 거예요. 그 전 과정에서 지식 네트워크를 만드는 내부의 기억통로가 그렇게 안 되어 있으면 절대 지금 그거를 보고 그렇게 평을 못 해요. 지금 공부가 잘 되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지난 시간들이 그렇게 공부했기 때문에 지금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예요. 헌데 지금 이론은 예를 들면 석가모니가 깨닫고 나서 ‘야, 깨달은 이후로만 내 인생이고, 깨닫기 이전엔 전부 내가 전부 쓰레기 같은 인생인데’ 말하는 것과 같아. 절대, 부처님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요. 깨닫고 나서 보니까 “모든 사람의 그 삶 자체가 부처의 삶으로서 손상이 없다.”라고 말하는 긍정 자체가 나올 수밖에, 깨닫고 보니까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전에는 잘난 사람이 있고 못난 사람이 있는 줄 알았더니 깨닫고 보니까 그렇게 있는 거예요.

그걸 딱 떠나고 보니까, 나를 이루는 전체 삶의 네트워크나 너를 이루는 전체 삶의 네트워크나 그 무게가 전혀 다르지 않아요. 나만 무겁지 않다는 거예요. 부처님의 ‘연기법’이라는 말 자체가 그래요. ‘나’ 하나를 이루기 위해서는 온 당시의 수평, 수직적인 우주의 모든 역사가 개입되어 있듯이 모든 생명체가 다 그러는 거예요. 헌데 거기에 어떻게 높낮이를 구별을 할 수가 있느냐는 거예요. “각자 다른데 높낮이를 구별할 수가 있느냐” 하는 것이 부처님의 깨달음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여태껏 살아온 과정 자체가 다 존중받는 삶이 되는 것이지요.

글쓰기도 거의 그거와 같은 거예요. 그래서 그 과정은 지금 성숙되는 과정에서 ‘아, 삶 자체가 높낮이가 없구나. 아, 내가 쓸데없는 전제를 가지고 불필요한 자기 해석을 하면서 스스로를 괴로워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괴롭혔을 수도 있겠구나’ 하고 바뀌는 것이지요. 그럼 이 자체가 ‘인생이 좋은 인생과 나쁜 인생이 따로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글쓰기도 그렇게 막 성장통을 엄청나게 하고 있는 거예요. 가열 차게 더 읽고, 더 자기 어제 글들이 글도 아닌 것처럼 보이되, 다만 자기를 비난하면 안 돼요. 그것들이 모여서 지금은 그거를 비평하는 눈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그것이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하면 되겠어요? 공부가 잘되고 있어요. 본인만 지금 인정을 안 하려고 하고 있어요.

질문자1: 공부가 너무나 인정이 안 되는 거예요.

정화스님: 그렇지. 인정 안 하면 자기만 괴로운 거지. 뭐. 공부가 잘되고 있다고 하는데 자꾸 안 된다 그래. 왜. 그때 당시 사람들은 이상한 사람 취급받은 글들이 많아. 걱정 마시고, 그 성장통, 그때 그 전을 지금처럼 해석하면 안 돼요. ‘내가 왜 이렇게 했어. 이렇게 하면 안 된다니까’ 하면서. 어린 시기에 어른이 되고 싶은 거랑 똑같아요. 공부의 양들이 다 지나가면 그 양이 하나 개입하면서 갑자기 생각의 통로를 바꿔요. 그냥 통로를 바꿔버리면 어제까지 자기가 생각했던 세상을 보면 이상해요. 이 바뀌기 전에는 그전에 쓴 것이 답이에요. 그런데 바뀌어버렸어요. 그러면 답이 아닌 거처럼 보이니까 ‘아 이것이~’ 이렇게 하는 거예요. 이게 바뀌려면 이 과정이 반드시 필요해요. 잘 될 겁니다. 또 비난하면 안 됩니다. 자기를.



질문자2: 저는 여기 감이당에 와서 공부를 하기 이전에, 제가 어떤 목표가 있으면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과도하게 에너지를 쓰고 번아웃 되고 이런 방식의 삶을 굉장히 오래 살았어요. 그런데 몇 년째 공부를 하면서도 제가 그렇게 공부를 하고 있는 게 보이는 거예요. 이 습관을 제가 과정을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습관으로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요?

 

 


정화스님: 결과하고 과정은 안에서 ‘이것이다’라고 하는 판단 기준이 성립될 때 결과가 생겨요. 근데 우리 뇌는 항상 ‘이것이다’라고 말하는 쪽으로 가도록 되어 있어요. 막 일을 해서 그것을 ‘이것이다’라고 규정하는 순간, 일을 한 것처럼 착각을 하게 돼 있는 거예요. 과정은 계속해서 최종판단을 이루기 위한 것들이에요. 방금 말한 대로 그것이 이루어진 다음 순간부터 또 뭐하냐 그러면 또 다른 새로운 과정들을 시작해 버려요. 신체가. 또 새로운 결과를 만들어내는데 결과 쪽으로 집중되면 아까처럼 번아웃 되는 과정으로 가기가 수월해져요.

그것은 불교에서는 이런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그냥 앉아서 아무 생각 없이 자기 몸과 마음에 일어나고 있는 대로 그냥 맡겨 버려요. 이때 결과는 그냥 일어나고 사라진 생각들이 제대로 흘러가도록 놔두자 하는 것이 결과예요. 일어나는 생각의 색깔이 결과가 아니고, 그냥 제멋대로 흘러가도록 내버려두고 내가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전체적으로 자각은 하고 있는데 ‘어떻게 흘러가든지 관계없이 그냥 있겠소’라고 하는 거예요. 이 훈련을 계속하는 것이 방금 전에 말한 것처럼 그냥 일어나고 사라짐 그 자체가 의미가 되게 하는 훈련이에요. 결과를 만드는 훈련이 아니고. 그래서 불교에서 보면 그냥 지켜보는 훈련이 곧 과정의 훈련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처음 선방에 갔을 때는 화두라는 걸 주는데 저는 잘 안되더라고요. 결과에 집중이 안 돼요. 그래서 저는 안 되니까 선택한 방법이 “그냥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앉아있자”였어요. 이렇게 허리를 펴고 앉아서 화두도 한 번 생각해보고, 호흡도 한번 지켜보고, 어쨌든 하는데, 그것은 계속 집중이 계속 안 되니까 앉아서 몸을 움직이지 않는 집중을 하는 거예요. 전체적으로 허리를 펴고 손을 어떤 식으로 이렇게 하든지 저렇게 하든지 정하고 난 뒤부터는 가능한 한 견딜 수 있을 때까지 안 움직이는 거예요. 안 움직이는 걸 실천하는 거는 결과에요. 그러면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데 그것이 훈련이 오래되면, 처음엔 아파서 오래 할 수가 없어요. 자꾸 (자세를) 바꿔야 하고요. 처음에는 다리가 아프지요. 다리가 숙련되면 또 등에 있는 근육들이 너무 아파요, 등이. 그것도 한참 되면 졸음도 오고 몸이 편해지면 졸음도 와요.

이런 과정들을 어느 정도 극복을 해서 가만히 앉아있으면, 저는 앉아있을 때는 잠이 좀 덜 오는 편이에요. 온갖 생각이 일어나기도 하고 말기도 하고 그러면 몸 안에서 지금까지 사는 것하고 다른 몸이 작동하고 있어요. 생각의 조각들도 이상하고 뭔가 생각이 규칙적으로 이렇게 나와야 하는데 몸을 가만히 아무것도 안 하고 나 몰라라 하고 있으니까 그 조각들이 제멋대로 작용을 해서 이상한 현상들이 발생을 해요.

최종 결과를 마음에 두지 않고 방금처럼 몸이 그런 생각이 일어나면 가만히 앉아서 움직이지 않거나 뭔 생각을 하든지 그건 탓하지 마시고. 그게 힘드시면 허리를 반듯이 세워서 천천히 주변 공원을 한 시간쯤 천천히 걸으세요. 이때는 마찬가지로 아무 생각이 없어야 해요. 그냥 걷는 거예요. 근데 걷는 것을 자각하고 있고, 앉아있는 것만을 자각하는 거예요. 이 두 가지 훈련을 좀 하시면 어떤 생각의 결론에 도달한 것에 의미가 있는 게 아니고 그렇게 있는 거 자체가 의미 있는 훈련이 되는 거예요. 지금부터는 그 두 가지 훈련을 해보세요. 앉아서 결과에 집착하고 있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면 “아이고, 지금 쉴 시간이구나” 하고 앉아서 가만히 있어요. 지금 회사가 결과를 내라고 하는 상황이 아니잖아요. 가만히 앉아서 30분 정도나 가능하면 견딜 수 있을 만큼 가만히 있는 거예요.

질문자2: 그러면 그때 생각이 막 떠오르는데…

정화스님: 그런 것에 대해서는 일체 의미를 두지 마. “아~ 이것은 인제 내가 특정한 생각을 하지 않으니까 생각의 조각들이 저절로 막 흩어져서 뭔 일이 일어나는구나.”라고만 그냥 이해하고 앉아있는 거예요.

질문자2: 그럼 생각이 떠오르면 떠오르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그냥…

정화스님: 그래요. 그건 어떻게 해볼 수가 없어요. 두 번째는 환기할 필요가 있잖아요. 그러면 전체적으로 돌아서 하되, 운동처럼 빨리 하지 마시고 천천히 하시면서 허리를 반듯이 해서 걸으면 돼요. 그럼 한 시간 정도 하다가 또 그런 일이 있으면 가만히 앉아서. 이런 훈련이 되어야만 좀 잡힐 수가 있죠. 그니까 ‘어떤 결론이 돼도 옳은 것이 삶에 의미가 있다’라고 하는 내적 판단의 기제가 지금 굉장히 강력하게 자리 잡고 있는 거예요.

하루아침에 안돼요. 생각이 변하려면 단백질이 연화되어야 한다고 했어요. 생각의 루트가 있어요. 부들부들해져야 해요. 연두부할 때 두부처럼. 그래서 우리가 생각이 강하다는 것은 경화(硬化)되어 있다고 했어요. ‘굳을 경(硬)’자. 그 생각의 루트에는 많은 단백질이 단단해져 있어요. 그다음에 단단해질 뿐만 아니라 그 통신로가 커져 있어요. 통신로가 커져 있으면 시냅스의 연결망도 커져 있어요. 그래서 잘 바뀌어요. 그것이 훨씬 먼저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같은 조각이 개입할 때는 안 하고 싶어도 안 할 수가 없어요. 너는 네 일 알아서 하고 나는 내 일 알아서 한다고 하는 것으로 가만히 있어야 해요. 그 생각이 안 나오게는 도저히 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 오늘부터 그런 생각이 나면 그냥 가만히 앉아있어요.

 

 

정리 _ 감이당 화요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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