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하고 인사하실래요 ▽/씨앗문장258 프리드리히 실러, 『미학 편지』 사회의 두가지 극단 프리드리히 실러, 『미학 편지』사회의 두가지 극단 티비 뉴스를 볼 때나, 인터넷 기사의 댓글을 볼 때나, 혹은 주말 광화문을 걷게 될 때, 내가 지금 어느 세상에 살고 있는지 순간적으로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한쪽에선 이 나라가 사회주의가 되었다며 관련자를 모두 잡아죽여야 한다고 하고, 길 건너에선 야만스러운 자본주의를 성토한다. 도대체 여기는 어딘가? 나는 그게 그렇게 혼란스럽기도 하거니와, 양쪽 어느 주장도 딱히 내 생활, 일상을 '진짜로'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언젠가부터 그런 말들이 내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있다. 크게 걱정하지는 않는다. 역사는 나랑 상관없이 알아서 갈 것이다. 나는 차라리 내 생활을 걱정한다. 아침마다 잠이 쏟아지고, 밤마다 잠들지 못하는 내 생활 말이다. 미학.. 2019. 12. 16.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진보를 멈추는 혁명?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진보를 멈추는 혁명? 시간을 '과거·현재·미래', 아니 더 정확하게는 '과거→현재→미래'로 분절하고, 뒤에서부터 앞으로 진행해 간다는 이미지, 그 이미지와 '기차'의 은유는 얼마나 잘 맞아떨어지는가. 아마도 그래서 '기차'는 근대의 상징물이 되었으리라. 요약하자면, 근대의 시간은 결코 후진하지 않는다. 어쩌면 '후진하지 않는다'는 말 속에조차 근대적 시간관이 섞여있다. 여하간, 세계는 그렇게 멈추지 않고 전진한다. 달리고, 달리다보면, 점점 빨라진다. '생산성의 향상'이란 그 빠름을 점잖게 표현할 말인 셈이다. 어디선가 읽기를 지구의 모든 사람이 이른바 '중산층'의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지구가 3.5개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니까 '혁명'은 모두가 '중산층'의 삶을 누리는.. 2019. 12. 2. 고미숙,『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 적절한 균형을 찾아서 고미숙,『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 적절한 균형을 찾아서 누구나 알고 있듯이, 생의 원동력은 에로스다. 그것은 타자를 향해 질주하는 힘이자 무언가를 낳고자 하는 열망이다. 이를테면 접속과 생성을 향한 생의 의지다. 하여,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때, 우리 몸은 질풍노도를 경험한다. 갑자기 무리 속에서 한 사람이 우뚝 솟아오르면서 격렬하게 그를 향해 달려가는 추동력이 생긴다. 어떤 장벽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그것은 일종의 카오스다. 방향도 목적도 없는 격정에 가깝다. 짜릿하지만 위태롭다. 그래서 그 방향과 힘에 리듬을 부여하는 또 다른 힘이 함께 작동한다. 앎의 욕망, 로고스가 그것이다. 알고 싶어지는 것이다. 나로 하여금 격정에 휩싸이게 한 존재에 대하여 무한한 호기심이 작동한다... 2019. 11. 27. 에피쿠로스 『쾌락』 - 적어도 자신에게 적대적이지 않도록…… 에피쿠로스 『쾌락』 - 적어도 자신에게 적대적이지 않도록…… '자신의 세계'를 어떻게 다스리느냐 하는 문제가 시작이고 끝이다. 와중에 눈길을 끄는 부분은 '자기가 할 수 없는 것은 적어도 자신에게 적대적이지 않도록 만든다'는 부분이다. 어쩌면 그게 가장 어려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좋은 것을 더 좋게' 만드는 것은 어렵지가 않다. 반대로 '나쁜 것을 더 나쁘게' 만드는 일도 어찌나 능숙하게 해내는지 모른다. 어찌할 수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굳이 애써 '화'를 내어 '적'으로 만들고 만다. 그렇게 하지 말고, 거기서 끝내라는 가르침. 더 나아가 그조차도 할 수 없다면, 도망치는 편이 낫다는 가르침이다. 그 모든 것이 가능하려면 어떠해야 할까? '자존심' 같은 걸 내다버려야 한다. '자기'가 굳건하게 서 .. 2019. 11. 12. 이전 1 ··· 8 9 10 11 12 13 14 ··· 6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