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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된 용도가 없다는 것 고정된 용도가 없다는 것 어른들의 세계에서는 대부분의 물건이 용도가 정해져 있다. 가령 책이라면 읽거나 냄비 받침으로 쓰거나 정도다. 그러나 아이들의 세계에선 용도에 제한이 없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무한한 쓰임을 얻는다. 우리집에 꽤 오랫동안 있었지만 '그림 그리기'라는 용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사용하지 않았던, 색연필이 건축물의 소재가 되었다. 더 어릴 때는 혹시나 다칠까봐서 꺼내주지 않았던, 조금 뾰족한 색연필을 주었더니 그림은 안 그리고 탑을 쌓아 올린다. 매사가 이런 식이다. 책은 까꿍놀이용, 냄비는 머리에 쓰는 용도, 도미노 블럭은 바닥에 쏟는 용도.... 베르그송이나 들뢰즈가 순수생성이라는 개념을 창안할 때도 이 녀석들을 참고한게 틀림없지 싶다. 그리고 많은 부모들이 자신의 아이.. 2019. 12. 27.
내 몸의 곳간을 비우는 법 내 몸의 곳간을 비우는 법 『동의보감』을 읽다보면 병과 치료가 구별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토(吐), 한(汗), 하(下), 토하거나 땀을 흘리거나 설사하는 것은 병증이다. 그런데 때에 따라서 이것이 치료법이 될 수 있다. 병이 상부에 있을 때는 토하게 하고 중간에 있을 때는 땀 흘리게 하며 아래에 있을 때는 설사시킨다. 계절에 따라 이 처방을 달리하는 것도 재미있다. 봄에는 토(吐), 여름에는 한(汗), 겨울에는 하(下)가 어울린다. 병은 대개가 담음(痰飮)으로 생긴다. 담음이란 진액, 즉 몸의 수분이 졸여져서 뭉친 것인데 이것이 진액의 흐름을 막고 기혈의 순환을 막아 온갖 병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십병구담(十病九痰)이라는 말도 있다. 간질이나 두려움 등 정신질환도 담음의 일종으로 본다. .. 2019. 12. 26.
[쿠바리포트] 새로운 집, 새로운 모험 새로운 집, 새로운 모험 새로운 집으로 이사 온 지 한 달이 지났다. 그리고 나는 이 한 달의 시간에 ‘모험’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있다. 글을 다 읽고 이렇게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서 무슨 모험을 했다고 할 수 있느냐고 시비를 걸 수도 있다. 아, 물론이다. 지난 한 달 간 내가 사는 아바나에서는 혁명도 일어나지 않았고, 게릴라군도 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나의 일상을 모험이라고 부르련다. 우리가 사소하다고 치부하는 것들은 실제로 사소한 것들이 아니다. 일상의 기본을 책임지는 디딤돌이다. 이 요소들이 제대로 충족되지 않을 때, 일상은 곧바로 재난이 된다. 쿠바는 이런 소소한 재난의 천국(?)이다. 도대체가 ‘이런 게’ 내 인생을 괴롭히는 주적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할 때.. 2019. 12. 24.
미셸 푸코 『말과 사물』 - 바닷가 모래사장에 그려놓은 얼굴처럼 사라지기를 미셸 푸코 『말과 사물』 - 바닷가 모래사장에 그려놓은 얼굴처럼 사라지기를 그 유명한 『말과 사물』(미셸 푸코)의 마지막 문장이다. 한 문장이 네 줄에 걸쳐 있을 만큼 복잡하지만, 결국 요지는 하나. '배치'가 바뀌면 모든 게 바뀐다는 뜻. '인간'은 스스로 '인간'임을 자각한다. 그리고 '인간'이 아주 오래 전부터 지금과 같았다고 믿고 있다. 『말과 사물』은 그러한 '인간'의 '인간'으로서의 자각이 사실은 특정한 배치의 산물임을 밝힌다. 더 간단하게 말하자면 주체로서의 '인간'은 발명(또는 발견)되었다. 굳이 말하자면, 영 유치한 생각이기는 하지만, 나는 발명(발견)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내 삶에 거의 100%(는 뻥이고 구십 몇 퍼센트 쯤) 만족하기는 하지만, 가끔 '인간'으로 사는 것이 너무 .. 2019. 12.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