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송 선어록』
부처님은 상황에 따라
한 말씀씩 하셨을 뿐이다
한 스님이 운문화상에게 물었다.
“부처님이 일생토록 펼친 가르침은 어떤 것입니까?”
운문화상이 말했다.
“상황에 따라 한 말씀씩 하셨을 뿐이다.”
― 문성환 풀어 읽음, 『낭송 선어록』, 91쪽
불경뿐 아니라 스승과 제자 사이에 오고간 이야기들을 풀어놓은 동양고전들을 읽어보면 ‘스승님’들이 여기서는 이러셨다가 저기서는 저러셨다가 하는 듯한 느낌을 자주 받습니다.(『논어』에는 아주 콕 집어서 그걸 문제 삼는 제자와 공자님께서 나눈 문답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쩔 때는 ‘뭐 어쩌라는 거야’하는 불손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요. ^^;
그런데 그게 바로 이른바 서양철학과는 다른 동양철학(사상)의 독특한 점입니다. 상황과 조건에 따라 대응하는 유연함이 사상 내부에 있는 셈이죠.(모두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학문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이었는지 하는 관점에서 보면 이 차이는 더욱 두드러집니다. 서양철학은 대체로 앎을 습득하는 것에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이기는 하지만, 그 목표는 앎이 충만하다면 ‘당연히’ 되는 것이라는 느낌입니다. 반면에 부처님이나 공자님은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몸과 마음이 어떤 ‘상태’에 도달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듯합니다. 그 상태에 도달했다면, 사실 아느냐 모르느냐는 부수적인 문제인 것이죠.
따라서 ‘상황에 따라 한 말씀씩 하셨을 뿐이다’라고 할 때, 하셨던 ‘말씀’을 많이 알고 있다고 해서 부처에 가까워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부처님 말씀은 깨달음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필요한 지도라기보다는 차라리 식량 같은 것이죠. 어쩌다 마주친 말씀 하나에 힘을 얻기도 하고(에너지가 충만한 상태), 번뇌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것을 걷어내 주기도 하는(눈 밝은 상태) 그런 것이 아닐까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가산적으로 ‘앎’을 추구하여 높고 깊은 앎의 세계를 이루는 것보다 그저 한순간이라도 마음이 편안한 상태에 머무르는 힘을 얻고 싶습니다. 그런 힘을 낼 수 있는 상태(체력)를 만드는 것이 ‘공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그런 점에서 불경은 ‘낭송’에 아주 적합한 텍스트라고 생각합니다. 입술을 움직이고 배에 힘을 주어서 ‘소리’를 내고 그 소리를 듣는 일련의 낭송 과정이 몸과 마음의 특정한 ‘상태’를 끌어내주고 있으니까요.
낭송은 하는 사람 뿐 아니라 듣는 사람의 상태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사진을 눌러 큰 사진으로 청중들의 얼굴을 한번 보세요^^
‘상황에 따라’ 하신 말씀이라는 것도 참 의미심장합니다. ‘상황에 따라’ 이야기를 하려면 무엇보다 ‘상황’을 감지할 수 있어야 하겠죠. 바깥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감각이 살아 있지 못하면 결코 ‘상황’에 맞는 말을 할 수 없었을 겁니다. 글자를 보는 시각, 책을 손에 쥘 때 전달되는 촉각, 내가 입으로 낸 소리를 듣는 청각까지 ‘낭송’은 감관을 훈련시킵니다. 총체적으로 신체를 활용하는 활동인 셈이죠. 물론 읽고 외워야 하니 머리도 바쁘게 움직입니다. ^^
『낭송 선어록』은 저런 텍스트로 가득합니다. 대부분 짧고요. ‘낭송’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죠. 도력 높은 선승들이 나눈 부처에 관한 이야기, 수행에 관한 이야기가 ‘언어’의 한계를 넘나들며 펼쳐집니다. 읽고, 요약하고, 암기하는 식의 공부에 지친 분들이라면 『낭송 선어록』부터 낭송해 보는 걸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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