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옥, 바깥에 대한 관심이
글쓰기를 결정한다
이옥이 관찰한 바에 따르면, 얼핏 꿈틀거리는 것들은 다 같아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다 다르다. 그런데 인간은 그 모두를 ‘꿈틀거리는 것’으로 일반화하고, 그것들을 ‘더럽다’고 가치화한다. 하지만 꿈틀거리는 것들에게 기적처럼 날개가 돋으면 이전의 모습은 오간 데 없이 우아하고 화려한 모습으로 변신하고, 이를 본 인간들은 벌레를 볼 때와는 사뭇 다르게 그 아름다움에 넋을 잃는다.
― 채운 지음, 『글쓰기와 반시대성 이옥을 읽는다』, 200쪽
때는 바야흐로 '이미지의 시대'입니다만, 사실 볼 것이 너무 많아져서 안 보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고 만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더군다나 ‘인간’은 수많은 개별적인 것들을 추상화해서 머릿속에 입력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에 개체들 각각의 특이성들은 쉽게 무시하곤 합니다. 그래서 글쓰기가 진짜 중요합니다. 어떤 사건이나 사물에 대해서 글을 쓴다고 상상해 보면 쉽습니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글을 쓰고자 하는 소재가 글쓰기의 대상이 되지 못한 다른 것들과 어떤 차이가 있어서 ‘소재’가 되었는지 생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차이’를 의식하는 능력이야말로 ‘글쓰기’의 동력이 되는 것이죠.
이옥은 그 능력이 엄청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쓴 글들의 대부분이 ‘차이’를 포착하는 섬세한 능력 덕분에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의 씨앗문장은 이옥의 그러한 섬세한 관찰이 사람들의 추상화 또는 일반화하는 습관에까지 가서 닿는 것을 지적합니다. 차이를 의식하는 섬세한 감각, 그것을 글로 풀어내는 재주가 결국엔 인간을 이해하는 데에까지 나아가는 셈입니다.
'차이'를 의식하는 능력이야말로 '글쓰기'의 동력이 되는 것이다.
‘벽’癖은 글자 뜻 그대로 병, 그것도 심각한 ‘중독증’이다. 하지만 박제가는 이 병의 건강성을 예찬한다. ‘벽’은 병이지만, 동시에 창조를 위한 약이 될 수 있다는 것. 병을 비웃으며 보신이나 일삼는 자들보다는 차라리 자기만의 세계를 가진 병자가 되겠노라는 도발적 선언.
― 같은 책, 172쪽
이옥도 ‘벽’에 있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재배법부터 격을 갖추어 피우는 법까지를 세세하게 밝혀놓는 책을 쓸 정도의 담배 애호가였고, 과일과 상추쌈에도 벽을 가지고 있었죠. 여기에 이르러 저는 생각합니다. ‘차이’를 느끼는 감각은 ‘벽’과 함께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죠. 경상도 사과와 충청도 사과가 어떻게 다른지, 수확한 때에 따라 맛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등을 느끼려면 사과에 ‘벽’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죠. 그러니까 사과를 사랑해야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글쓰기’는 글을 잘 쓰냐 못 쓰냐의 문제라기보다는 얼마만큼의 강도로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이옥은 그런 형태의 글쓰기에 있어 하나의 전범일 수 있고요. 그러니까 ‘이제, 이옥을 읽을 시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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