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아는 것이 두렵다
(오래 쉬었네요. 기다리시는 분은 없으시겠지만, 그래도 어쨌든 한 편에 한 문장씩 뽑아서 글을 써가며 『논어』를 다 읽겠다고 마음먹었으니 저는 쓰겠어요. 흑)
작년 연말에 김연수의 『소설가의 일』을 읽었다. 접다 보면 모든 페이지를 다 접어야 할 만큼 좋은 글들로 가득한 책이었다.(저는 인상적인 구절이 있으면 귀퉁이를 접어 두는 버릇이 있어요)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북회귀선』의 작가 헨리 밀러의 ‘11계명’이었는데, 11계명 중에서도 ‘새 소설을 구상하거나 『검은 봄』(헨리 밀러의 두번째 소설)에 새로운 내용을 추가하지 마라’라는 두번째 계명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자로의 이야기나 헨리 밀러의 계명이나 가리키는 것은 같다. 지금 하는 것에 집중하라는 것이다. 정말 어렵다.
A를 보는 사이에 B가 보여서, B를 하다 보니 A를 까먹고 C를 하다가 A가 생각나서 A를 하고 C는 영영 잊혀진 경험, 다들 있으시죠?
공부를 하려고 책을 펴면 그 책을 써낸 필자가 읽은 다른 책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면 그 책이 읽고 싶어진다. 운동도 그렇다. 야트막한 동네 뒷산을 오를 때에도 숨을 헐떡이면서 마음은 지리산, 설악산을 오르는 중이다. 공부나 운동처럼 특별한 일을 할 때뿐이 아니다. 출근해서는 퇴근 후를 생각하고, 퇴근해서는 출근할 걱정을 한다. 밥을 먹을 때도 마찬가지 먹고 난 후에 무엇을 할까 생각하고, 그것도 아니면 스마트폰에 눈이 가 있다. 이런 자잘한 예들을 들다 보면 도대체 어느 한순간도 그 순간을 살고 있었던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런 사소한 집중조차도 어려운 마당에 ‘아는 것을 아는 바대로 행하는’ 윤리적 차원에서의 ‘집중’은 말 그대로 ‘아는 것’밖에 되지 못한다. 어쩌면 행하지 못한 것이니 ‘아는 것’도 못 되는 것일 수 있겠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더 아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 세계다. 아는 바대로 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아는 것이 훨씬 가치 있다고 ‘여기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점점 그런 식의 전제에 회의가 든다. 오랫동안 알지 못했던 자연의 비밀이 파헤쳐지면서 자연이 파헤쳐졌고, 있는지조차 몰랐던 인간 심리의 어두운 반대편을 알게 되면서 주체하지 못할 정도의 욕망들이 곳곳에서 소용돌이친다. 재화는 엄청나게 늘었지만 결핍감도 그에 비례해서 늘어나고, 결핍감이 늘어가는 것에 맞춰서 불안도 함께 는다. 이른바 삶을 윤택하게 하는 모든 것이 늘었지만 정작 윤택해지지 않은 삶이라는 역설의 중심에 ‘행行의 무능’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머릿속에 들어오는 정보와 지식의 양은 폭증하였으나 몸은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니까 욕망은 잡다해지고 만족은 요원하기만 한 것이다.
온 세계가 특정한 전제 속에서 세팅되어 있는 마당에 나 혼자 단번에 어떤 경지에 도달할 수는 없는 노릇이겠으나, 머물러 행行하는 법부터 연습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책을 읽어도 ‘읽어 치우는’ 식으로 읽지 말고 1년에 단 한 권이라도 온전히 읽기를 바라고, 밥 한 끼를 먹어도 밥에 집중해서 먹을 수 있기를 바란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이런 일들을 못해서 그간의 괴로움을 겪었다고 생각하니 사는 게 참 힘들다는 생각도 들지만, 기왕에 사는 건데 조금이라도 덜 힘든 상태로 살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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