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마다 괴로움 하나씩은 있는 법
위 속이 비어 있을 때는 도리어 굶주리는 백성을 생각해본다. 이들은 한 달에 아홉 번밖에 먹지 못하여 달력을 보아가며 불을 지핀다.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을 때는 도리어 멀리 떠난 나그네를 생각해본다. 이들은 만리 타향에서 십 년 동안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몹시 졸릴 때는 도리어 아주 바쁜 관리들을 생각해본다. 이들은 파루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고 물시계의 물이 다할 적에 닭 울음소리를 듣고 입궐했다가 서리 내린 새벽에 퇴궐한다. 처음 과거에 떨어졌을 때는 도리어 궁색한 유생을 생각해본다. 이들은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경전을 궁구했지만 향시에 한번도 합격하지 못했다. 외롭고 적막함을 한탄할 때는 도리어 노승을 생각해본다. 이들은 인적 없는 산을 쓸쓸히 다니며 홀로 앉아 염불한다. 음탕한 생각이 일어날 때는 도리어 환관들을 생각해본다. 이들은 어찌하지도 못하고 외롭게 홀로 잠든다.
― 이옥 지음, 채운 풀어 읽음, 『낭송 이옥』, 77쪽
(조금 길지만, 너무 절절해서 옮겨보았어요.) 제가 잃어버려 왔고, 잃어버리고 있는 마음이 저기에 있더라고요. 조금만 힘든 일이 닥쳐도 폭풍처럼 자기연민이 일어나 버리고 맙니다. 그게 곧 마음의 벽이 되고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고 안타까운 사람이 되어서는 다른 이들이 겪는 고통들엔 무관심해지고 맙니다. 단순히 무관심뿐이라면 뭐 사람이 다 그런 거니까 그럴 수도 있다 하겠지만, 남들의 괴로움을 알면서도, 그것이 내 괴로움에 견주어 결코 적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애써 내 것보다 가벼운 것으로 여기려고 합니다. ‘자기연민’은 이기주의적인 자기합리화로 귀결되고 맙니다.
남들의 괴로움에 관심을 갖고, 나를 희생해가며 그들을 돕고 그러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사실 그것은 (총체적인 삶의) ‘능력’에 달려 있는 것이기에 자기연민에 휩싸여있는 미물 따위가 넘볼 수 있는 영역은 ‘아직’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급한 것은 내 마음부터 추스르는 것이죠. 이건 ‘자기연민’하고는 조금 다릅니다. 전자는 마음의 벽을 부수어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라면, 후자는 벽을 더 높고 튼튼하게 짓는 것이죠. 어쨌든 지금 단계에서 도달해야할 상태는 나의 괴로움을 별것 아닌 것으로 여길 수 있는 상태입니다.
'자기연민'에 집중하지 말고, 나의 괴로움을 별것 아닌 것으로!
세상에서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괴로움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지금 겪고 있는 괴로움입니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고, 아무런 시간 간격도 없이 ‘지금’ 시점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인데다가, 괴로움이 언제 끝날지도 가늠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괴로움 속에 갇히게 되는 것이고요.(자기연민의 정체가 밝혀졌네요.) 그래서 훈련이 필요합니다. 마음의 시야를 넓히는 훈련이죠. 괴로움을 겪을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마음의 시야를 넓게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나보다 더 배고픈 사람, 더 힘들게 일하는 사람, 더 외로운 사람 등등…. 애초에 이 세계는 누가 누구보다 더 큰 괴로움을 겪도록 설계되질 않았다는 것이 요즘 제가 하는 생각입니다. 저마다 누리는 쾌락의 양도, 고통의 양도 조금씩 차이는 있겠지만 엄청나게 큰 차이는 나지 않는다는 것이죠. 왜 그럴까요? 사람은 누구나 그때 자신이 겪는 괴로움을 가장 큰 괴로움으로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내가 커다란 괴로움을 겪는다 하여도, 어딘가에서 비슷한 강도로 괴로움을 겪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외롭지 않습니다. 배고픔도 고단함도 모두 마찬가지죠. 우리는 모두 함께 그런 괴로움들을 겪는 겁니다.
남들을 돕는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저마다의 괴로움을 안고 살아간다는 걸 아는 것에서부터 ‘도움’이 시작되는 게 아닐까요? ‘자기연민’의 괴로움에서 빠져나오는 게 가장 중요한 듯합니다. 이옥을 읽고 외울 때의 미덕이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 모두가 열패자 취급을 하더라도 이옥은 자기를 동정하지 않습니다. 참 무덤덤하고, 참 많이 보살핍니다. 자기애와 열패감이 시대를 대표하는 정서가 되어버린 이때가 바로 이옥을 낭송할 적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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