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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인문의역학! ▽/간지 Day

봄을 닮은 앙증맞은 지지(地支), 묘월(卯月)의 이야기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3. 3. 26.

꽃피는 춘삼월의 재간둥이 토끼 


3월은 일교차와 꽃샘 추위가 있긴 하지만 1월에 비해서는 유순한 토끼 같은 달(卯月)이죠.


한 달 동안 잘 지내셨나요? 어느덧 3월의 마지막 주가 되었습니다. 3월은 지지로 치면 묘월(卯月)에 해당하는데요. 묘월은 겨울잠 자던 개구리가 천둥소리에 놀라 뛰어나온다는 경칩과 대지에 봄기운이 완연해지는 춘분이 자리잡고 있는 달입니다. 아직 일교차가 심하고 꽃샘추위도 기승을 부리지만 호랑이처럼 맹렬하던 인월의 추위에 비하면 토끼처럼 유순하고 따뜻한 날씨를 느낄 수 있죠. 이번 묘월은 꽃피는 춘삼월과 딱 어울리는 동물인 토끼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꾀돌이 토끼야 토껴! 


우리가 어릴 적 읽었던 동화책들은 동심에 자양분이 됨과 동시에 많은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화를 자세히 살펴보면 어린 아이들에게는 심의가 불가한 상당히 잔혹한 내용이 많은 것을 알 수 있죠. 그럼에도 우리는 동화가 귀요미 동물들에게 빗댄 우화이기 때문에 내용의 심각성을 모를 뿐이죠. 


동화는 동화일 뿐 오해하지 말자!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별주부전도 그렇습니다. 남해던가? 동해던가? 용왕이 병이 나자 수중세계에서 좋다는 약들은 모두 용궁으로 들어갑니다. 하지만 용왕의 병환에는 아무런 차도가 없죠. 그런데 용한 의원이 토끼의 간을 먹으면 용왕의 병이 낫는다는 처방을 합니다. 그 의원은 생전 토끼라고는 본적도 없는 생선(?)인 주제에 말이죠. 아무래도 용왕의 병을 고칠 방도가 없으니까 대충 둘러댄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무튼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용왕은 수륙양용이 가능한 종 6품 주부자리에 있는 거북이를 뭍으로 내보냅니다. 토끼의 간을 구해오라는 ‘장기브로커’의 사명을 띠고 말이죠. 그 다음부터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얘깁니다. 거북이의 농간에 속은 토끼는 용궁에 끌려가 곤욕을 당할 뻔 하지만 기지를 써서 달아납니다. 때문에 토끼를 놓친 거북이는 용왕을 볼 면목이 없어 바위에 머리박고 죽었다는 결말 혹은 거북이의 충심에 감동한 산신령이 용왕의 약을 주었다는 훈훈한 결말이 전해지고 있죠. 


헛... 토끼를 뜻하는 묘(卯)는 목(木)에 속하고 목(木)에 배속된 오장(五臟)이 바로 간(肝)이라는 공교로운 사실이!!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은연중에 거북이를 응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직하고 충직한 거북이가 어떻게든 토끼를 잘 사로잡아 용왕의 병을 고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그래서 토끼가 간을 지상에 두고 왔다고 꾀를 낼 때 토끼가 살짝 얄밉기도 했죠. 토끼입장에서는 산 채로 생간을 뺏길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한 (애)드립이었는데도 말이죠. 아마도 제게 토끼가 얄미웠던 것은 옛날이야기 속 토끼가 자주 지략과 간계의 명수로 등장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토끼는 자연계의 먹이사슬에서 주로 포식자의 먹이가 되는 동물입니다. 때문에 힘으로는 천적과 대적할 수 없죠. 대신 이야기 속 토끼는 작고 앙큼한 꾀돌이로 나타납니다. 하룻강아지 아니, 토끼 한 마리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호랑이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을 술술 늘어놓죠.


어느 겨울이었습니다. 토끼가 길을 가던 중에 호랑이에게 잡아먹힐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때 토끼는 자신을 살려주면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해주겠다고 호랑이를 설득합니다. 호랑이는 토끼의 혓바닥에 놀아나서 꼬리를 낚시줄처럼 물에 담그고 황금어장에 대한 꿈에 부풀지만, 결국 호숫물이 꼬리와 함께 꽁꽁 얼어버리는 바람에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고 토끼는 호랑이를 비웃으며 도망칩니다. 


재밌는 점은 이야기 속 토끼들이 엄청난 꾀보에 ‘수려한 혀놀림’으로 생명을 보존하는 것과 달리 실제로 토끼는 조금 미련한 행동을 한다는 점입니다. 토끼는 천적인 야생동물에게 잡혀 큰 상처를 입고 간신히 도망치더라도 곧바로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사건의 현장으로 돌아오는 습성이 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동물들도 그런 ‘회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멧토끼의 경우 생존에 위협이 될 만큼 빨리 돌아오는 경향이 있죠.-.-;; 그래서 경험 있는 사냥꾼은 토끼가 돌아올 무렵 다시 그 자리에 찾아가 토끼를 생포한다고 합니다.(『십이지지 토끼』, 생각의 나무, 2010, 204쪽)


토껴라 토끼야!


현실과 이야기 속 토끼의 지혜에 간극이 좀 크죠.;; 하지만 현실의 토끼는 꾀 대신 월등한 ‘토끼는’ 실력으로 생존해나가고 있습니다. 조그만 소리에도 화들짝 놀라 산을 향해 내달리는 토끼를 상상해보세요. 우리가 ‘도망치다’를 속되게 이르는 ‘토끼다’는 말도 토끼가 재빨리 달려가는 모습에서 생겨났다고 합니다. 토끼라는 명사가 동사가 된 경우죠. 

토끼는 지금 이 순간에도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예민하게 귀를 곧추세우고 주변상황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천적이 나타나면 순간 시속 80km에 육박하는 스피드로 천적들을 피해 열심히 토끼고 있죠. 


민담 속 톰과 제리, 호랑이와 토끼


이묘봉인도(二卯奉寅圖) 열심히 호랑이님의 담배 시중을 들고있는 두 토끼들.


이묘봉인도라는 민화를 보면 호랑이가 긴 장죽으로 담배를 태우고 있고, 토끼 두 마리가 옆에서 담배시중 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담배셔틀(?)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토끼 한 마리는 호랑이가 편하게 담배를 피도록 장죽을 잡고 있고, 다른 한 마리는 호랑이가 담배 심부름을 시키면 금방이라도 뛰어나갈 듯이 눈치를 보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앞서 본 것처럼 호랑이를 골려주는 토끼가 아니라 백수의 왕인 호랑이를 정성껏 보필하는 토끼의 모습이 보이죠. 

흥미로운 점은 이묘봉인도와 같이 우리나라의 민화나 이야기에는 호랑이와 토끼가 함께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여우나 늑대, 너구리 등 다른 동물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토끼와 호랑이가 짝으로 나오는 경우가 빈번하죠. 제 개인적으로는 인월(寅月) 다음에 묘월(卯月)이 오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이묘봉인도 속 호랑이와 토끼처럼 호랑이(인월) 뒤에서 토끼(묘월)가 보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토끼가 호랑이를 골려주듯 묘월의 춘풍이 인월의 맹렬한 추위를 비웃고 내 쫓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럼 호랑이와 토끼가 함께 등장하는 이야기를 하나 더 살펴보죠.


토끼는 산길을 가다 호랑이에게 잡혀 먹힐 위기에 처합니다. 그런데 토끼가 기지를 발휘하지요. 지금 자신을 잡아먹는 것보다 자신이 떡을 맛있게 구워 먹는 법을 알고 있으니 떡을 먼저 먹고 자신도 잡아먹으라며 호랑이를 꾀어냅니다. 그리고는 돌을 불에 달구어 떡이라고 속이고는 자신은 꿀을 얻어 올 테니 호랑이에게는 기다리라고 하고는 달아나 버리죠. 토끼에게 속은 것을 깨닫지 못한 아둔한 호랑이는 토끼를 기다리다 결국 참지 못하고 불에 달군 돌을 떡인 양 집어 먹고 혼쭐이 납니다. 


영원한 라이벌 톰과 제리~


호랑이의 한입거리도 안 되지만 매번 위기의 상황을 재치 있게 빠져나가는 토끼와 그런 토끼에게 복수를 다짐하면서도 막상 토끼를 사로잡으면 또 다시 속아 넘어가는 호랑이. 저는 이 구도가 낯설지만은 않습니다. 바로 어릴 적 우리를 TV 앞으로 끌어 모았던 귀여운 앙숙콤비 ‘톰과 제리’가 떠오르기 때문이죠. 톰은 호시탐탐 제리를 노립니다. 제리는 도망다니기 바쁘죠. 하지만 제리가 톰에게 당하고만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토끼가 호랑이에게 두 손 놓고 당하고 있지 않듯 말입니다. 제리나 토끼 모두 자신을 괴롭히는 포식자에게 응징을 가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톰이나 호랑이처럼 직접적이거나 공격적인 방법이 아니죠. 최대한 호수나 돌멩이 같은 자연지물로 간접적인 방법을 통해 포식자들이 스스로를 자승자박(自繩自縛)의 상태에 놓이도록 만듭니다. 손 안 대고 코푸는 격이죠. 그러고 보면 천적에 비해 너무나 유약해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천적을 굴복시키는 이들이야 말로 진정한 숨은 강자가 아닐까요? 

인월이 봄의 시작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하늘의 봄으로 지상에 발 딛고 사는 우리에게는 아직 가혹한 시절입니다.(저는 그때 훈련소에 있었습니다! 영하 20도 아래로 내려가는 1월을 봄이라니요!!) 그런데 그 혹한의 추위를 감히 대적할 수도 없을 만큼 유약해 보이는 묘월의 춘풍이 서서히 밀어내고 있습니다. 너무도 연약해 보이는 새싹이지만, 땅을 뚫고 올라오는 소생하는 기운은 그 누구도 말릴 수 없듯이 말입니다. 이제 곧 헐벗은 남산이 파릇파릇한 새싹들로 가득해지면 토끼들이 나와서 풀을 뜯는 모습을 볼 수 있겠네요.   


곰진(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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