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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인문의역학! ▽/간지 Day

겨우내 움츠렸던 만물이 기지개를 펴는 달, 진월(辰月)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3. 4. 23.

만물이 용솟음치는 달, 진월(辰月)





봄날은 간다


4월은 지지(支地)로 진월(음력 3월)에 해당한다. 특히 이번 달은 간지(干支)의 조합에서 천간의 병화(丙火 : 태양과 같이 큰 불)와 지지의 진월(辰月)이 합치된 달로 이른바, 병진월(丙辰月) 적룡(赤龍)의 달이다. 입으로 화염을 내뿜다 못해 온몸을 불사르며 하늘로 욱일승천하는 용을 상상해보라. 그 위세가 장난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이달에는 용이 몰고 다닌다는 비바람도 많이 불었고, 그 바람을 타고 DMZ(비무장지대)에는 원인 모를 대형 산불이 발생하기도 했다. 


유일하게 십이지지(支地)에서 실재하지 않는 상상 속의 동물인 용의 달, 진(辰)월은 인(寅)월, 묘(卯)월과 함께 봄에 배속된 달이다. 그런데 눈치 빠른 사람은 이미 눈치를 챘겠지만, 인·묘월과 달리 진월은 봄을 상징하는 목(木)기운을 가진 달이 아니라 토(土)의 기운을 가진 달이다. 북드라망 블로그 애독자라면 토 기운에 대해서 대략은 아실 테다. 토는 매개하는 기운, 중재하는 기운이 있다. 진토도 봄의 끝자락에서 봄과 여름을 매개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진월은 봄과 여름이 혼재하는 시기이다. 한낮에는 초여름 날씨 같다가도, 밤이 되면 기온이 떨어진다. 일교차가 심해서 요즘 거리에는 코트를 입은 사람과 반팔 티셔츠만 입은 사람이 한데 섞여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우리가 봄을 만끽할 수 있는 시기는 바로 진월이다. 왜냐하면 봄의 전령사 봄꽃이 대부분 진월에 개화하기 때문이다. 벚꽃이 피기 전부터 벚꽃엔딩을 들으며 기다려온 사람들에게는 지금만한 ‘춘삼월 호시절’도 없다. 지금 우리 집 뒷산인 남산에는 벚꽃, 개나리, 철쭉, 진달래 등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는데, 그 때문에 서울시내 모든 커플들이 남산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꽃을 보러왔으면 꽃에만 집중해라!) 뿐만 아니라, 봄을 더욱 실감나게 해주는 각종 봄 축제 소식도 여기저기 들려온다.(봄 축제에서도 마찬가지다! 커플들이여! 꽃에 집중해라!...이건 절대 솔로의 삐뚤어진 성격이 아님을 밝힌다.)


이누야샤와 카고메 당장 떨어져랏!


이렇듯 온 나라를 꽃대궐로 만들며 봄을 화려하게 마무리하는 진월, 그런데 진월의 주인공은 봄꽃만이 아니다. 꽃들 사이에서 수줍게 기지개를 켜는 이름 모를 새싹들, 너른 논 한쪽 구석 못자리에서 한해를 시작하는 어린 벼도 여름을 맞을 채비를 하고 있다.



만물이여 때를 기다려라


진월은 봄을 마무리 하고 여름으로 나아가는 달로 한해 농사를 짓기 위한 준비를 하는 달이다. 하여 진월에 속하는 청명에는 논·밭을 갈고, 곡우에는 못자리를 만들고, 볍씨를 담그는 등 본격적인 농사준비를 한다. 옛말에 “곡우에 모든 곡물들이 잠을 깬다.”는 속담이 있는데 이는 진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봄을 상징하는 동물은 진월의 지지와 같은 용이다. 바로 동청룡. 동청룡은 봄의 밤하늘에서는 빛나는 별자리로 자신의 존재감을 발휘하고, (봄의 별자리는 달군의 별자리 서당 참조) 대지에서는 만물이 기지개를 켜도록 추동한다.



『연해자평』 에서 진(辰)은 신(伸)으로도 보는데, 이것은 ‘만물이 펴진다.’는 의미와 함께 ‘기지개를 켠다’는 뜻도 포함이 되어 있다. 그러니까 지하에서 힘겹게 올라온 묘목(卯木)이 힘을 얻은 다음에 진토로 넘어온 단계에서는 기지개를 켜면서 힘차게 펴진다는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겠다.


─ 『지지(支地)』, 삼명출판사, 낭월 박주현, 160쪽



묘월(卯月, 음력 2월)의 묘목은 힘겹게 땅 위로 머리를 내밀지만, 아직은 매서운 추위 탓에 따뜻한 흙 속에 웅크린 채 미풍이 불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개구리도 경칩의 우렛소리에 놀라 잠을 깨지만 바로 활동에 들어가는 건 아니다.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경거망동했다가는 얼어 죽거나, 굶주린 포식자에게 먹이가 되기에 십상이다.


인간도 예외는 아니다. 천하의 정세를 읽고, 경영할 수 있는 뛰어난 능력이 있었음에도 제갈량은 시골의 은자로 숨어 살면서 유비가 자신을 세 번이나 찾아오도록(三顧草廬) 때를 기다렸다. 마찬가지로 허생전의 허생 또한 찢어지게 가난한 상황에서 부인이 득달같이 바가지를 긁어도 때를 기다리며 독서에 전념한다. 


오 저 스펙을 보라... 저 스펙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력이 100이라니...


음과 양의 개념을 통해 우주 만물의 모든 현상을 풀이하는 학문인 주역. 주역 64괘(복희(伏羲)가 만든 8괘를 후대 사람이 2괘씩 겹쳐 중괘(重卦) 64개를 만든 것.)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중천건(重天乾) 괘의 초구 효사(6개 효 중 첫 번째 효를 설명한 것.)는 ‘초구 잠룡 물용(初九 潛龍 勿用)’이다. 초구라는 말은 이야기를 전개하는 데 중요치 않으니 차치하고, '잠룡 물용'이란 말을 살펴보자. 즉, 잠긴 용은 아직 미숙한 상태니 쓰지 말고 때가 이르도록 기다리라는 것이다. 이무기는 용이 되기 위해 1000년 동안 차가운 물속에서 기다린다. 그런데 긴 숙고의 시간을 거쳐 용이 되었다고 해서 바로 천지를 주름 잡는 건 아니다. 아직 미숙한 상태이므로 좀 더 기다려야 한다. 제아무리 용이라도 때를 만나야만 풍운 조화를 부리고 구름을 휘감아 비를 내리는 신물(神物)이 되는 것이다.


봄의 생물들도 마찬가지다. 모두 묘월에 힘써서 언 땅을 뚫고 나왔지만, 바로 자신을 드러내는 동시에 성장을 시작하는 경솔한 양태는 보이지 않는다. 모두 진월이 올 때까지 조심스럽게 은거하며 기다렸다. 그리고 진월이 오자 마치 용이 솟아오르듯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것이다. 출근길, 산책길 주위를 둘러보자. 지금 때를 만나 터져 나오는 갖가지 것들이 겨우내 황량했던 빈터를 가득 채우고 있다.         



곰진(감이당 대중지성)



※ 병진월(丙辰月)은 다음 절기인 입하(5월 5일) 전까지입니다. 그럼, 정사월(丁巳月) 편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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