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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인문의역학! ▽/간지 Day

새해를 열어젖히는 호랑이 기운, 인(寅)월의 이야기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3. 2. 26.

한 해의 시작, 갑인월(甲寅月) 호랑이 이야기


안녕하세요. 새로이 북드라망 블로그 편집을 맡은 곰진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제가 이달부터 각 달에 해당하는 지지와 관련된 옛날이야기를 풀어볼까 합니다. 물론 황폐해진 동심을 가꾸고 잊혀져가는 전통을 회복하자..는 거창한 뜻은 없습니다. 다만 옛날이야기를 통해 매 달의 지지를 좀 더 쉽고 재미있게 이해하면 좋겠다는 자그마한 바람이지요. 그럼 앞으로 연재 될 일 년 열두 달.(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 총 12마리 동물에 관한 이야기를 기대하시구요. 이번 달은 음력 1월에 해당하는 인(寅)월, 호랑이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보겠습니다.


2013년이여 오라! 어흥!


호다국(虎多國), 호담국(虎談國)


하늘이 만든 관문으로 가운데는 말 한 필만 통할 만하여 험준하기가 더할 수 없다.


1488년 한양을 찾은 명나라 사신의 기록입니다. 네 맞습니다. 한양, 바로 조선의 도성이자 지금의 서울을 말합니다. 그런데 도대체 서울 어디에 이렇듯 험준한 지형이 있다는 말일까요? 사신은 굳이 평야를 나두고 북한산을 넘어오기라도 한 것일까요? 정확히 사신이 묘사한 지역은 지금의 지하철 3호선 무악재역입니다. 서울의 중심인 경복궁에서 불과 지하철로 두 정거장 떨어진 거리에 있는 고개이지요. 지금은 도심 한복판인 이곳이 과거에는 많은 사람이 꽹과리를 치고 소란을 피워야 넘을 수 있는 마의 고개였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호랑이 출몰지역이었기 때문이지요.  


1900년대초 무악재를 넘는 짐꾼들의 모습.


호랑이에 대한 실감이 없는 저로써는 과거에 정말 그렇게 많은 호랑이가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있어도 깊은 산중에 한두 마리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죠. 하지만 고려시대 한산군(서울)에서는 군수가 호랑이로 인해 3번이나 바뀌고 호랑이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기록이나, 조선시대에는 호랑이를 잡는 특수부대인 착호갑사가 있었다는 기록을 보면 호랑이가 많긴 많았나 봅니다. 


호랑이는 서울에서도 주로 인왕산에 많았다고 합니다. 경복궁의 오른쪽에 있는 웅장한 바위산이 발자국을 남기기 싫어하는 호랑이에게는 최적의 장소였다고 하네요. 흥미로운 것은 인왕산이 풍수 지리적으로 명당(경복궁)의 오른쪽을 감싸고도는 이른바, 우백호자리라는 점입니다. 우백호를 뜻하는 인왕산에 호랑이가 득시글했다니 신기하지요. 당연히 호랑이로 인한 피해도 빈번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동심을 자극하는 민담인 <해님달님>도 당시에는 다르게 들릴 수 있었죠. 호랑이가 장사를 파하고 고갯길을 넘는 어머니를 해친 뒤 피 맛을 잊지 못하고 민가를 습격해 아이들까지 공격했다는 슬픈 시대상을 반영한 스릴러물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쁜 호랑이를 조심해야해


호랑이로 인한 호식(虎食),호환(虎患)이 많다보니 사람의 운명을 그리는 사주팔자에도 ‘백호대살'(갑진/을미/병술/정축/무진/임술/계축) 다른 이름으로는 ‘호식살’이라 불리는 이름만 들어도 ‘후덜덜’한 살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호랑이에게 잡아 먹혀 피를 흘린다는 뜻이죠. 호랑이가 없는 지금은 신체의 질병, 상해, 교통사고 등 뜻밖의 재앙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백호대살이 있다고 무조건 그런 것은 아니고 사주의 구성과 대운 및 세운에 따라 종합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하니 백호대살이 있다고 해서 무작정 긴장하실 일은 아닙니다.


이렇듯 호환으로 인한 인명피해는 물론, 농사밑천인 누렁이를 물어가거나 논밭을 파 엎어서 한해 농사를 망치는 민폐는 사람들에게 원망을 사고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나타납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노파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날마다 심술 고약한 호랑이 한 마리가 노파가 애써 가꾼 무밭을 망가트리자 노파는 꾀를 낸다. 호랑이에게 팥죽을 쑤어 줄 테니 집으로 오라고 유인하고는 장독간 화로에 꺼진 숯불을 묻어 두고 부엌 물통에 고춧가루를 풀어 놓은 뒤 선반 행주에는 바늘을 가득 꽂아 두었다. 그런 다음 문 밖에 쇠똥을 잔뜩 깔고 마당에는 명석을 펴놓았다. 끝으로 대문간에 지게를 세우고 호랑이를 기다렸다. 날이 어두워지고 호랑이가 오자 호랑이는 날씨가 춥다며 투덜댔다. 노파는 추우면 장독간에 화로를 가져와 피우라고 했다. 하지만 호랑이가 장독간으로 가보니 화롯불을 꺼져 있었다. 호랑이가 노파에게 화롯불이 꺼졌다고 말하자. 노파는 그럼 입으로 불어보라고 했다. 노파의 말대로 한 호랑이의 눈에는 화로의 재가 들어갔다. 호랑이가 이번에는 눈에 재가 들어갔다고 하자. 노파가 그럼 부엌의 물통에 눈을 씻으라고 했다. 호랑이가 가서 눈을 씻으니 고춧가루를 푼물이라 눈이 빠질 듯 따가웠다. 호랑이가 소리치니 노파가 시치미를 떼며 눈에 무언가가 들어간 것 같으니 선반위에 놓인 행주로 눈을 닦아보라고 한다. 노파의 말대로 한 호랑이는 마늘 박힌 행주로 눈을 닦았고 비명을 지르며 노파에게 속았다는 것을 깨닫고 도망을 치려다 마당의 쇠똥을 밟고 넘어진 뒤 멍석에 말려 지게에 실린다. 노파는 그것을 짊어지고 바다로 가서 호랑이를 바다에 던져버렸다. 

─ 디지털용인문화대전, 정혜경 집필, <쇠똥에 빠진 호랑이>,1985년에 채록 용인군지에 실려있음 


얼마나 호랑이가 지긋지긋했으면 노파가 저런 고도의 치밀한 작전과 계획으로 호랑이에게 복수할까요. 게다가 무거운 호랑이를 짊어지고 한달음에 바다로가 던져버리는 노파의 신체나이를 초월한 행동에는 서늘한 냉기마저 느껴지네요. 제가 보기에 이 이야기의 흥미로운 점은 노파의 지혜와 호랑이의 힘의 싸움이라는 점입니다. 총과 같은 신식무기가 없는 이상, 백두산 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잡는 꺽정의 여인 운총이와 같은 여걸이 아닌 이상, 인간이 호랑이를 힘으로 이긴다는 것은 매우 힘듭니다. 하물며 노파는 말할 것도 없지요. 대신 인간에게는 ‘지혜’가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민담에서 호랑이를 물리치는 것은 ‘지혜’ 혹은 ‘꾀’입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라는 말처럼 살려면 머리를 써야 했지요.


이처럼 호랑이가 많은 나라(호다국)에서 살던 우리네 조상님들은 그로인한 원망과 근심을 지혜와 해학이 가득한 수많은 민담으로 풀어내셨습니다. 호랑이만큼 호랑이 민담의 수도 많았기에 육당 최남선은 우리나라를 일러 ‘호담국'(호랑이 이야기가 많은 나라)이라고 했다네요.   


호다국의 은혜로운 호랑이

호랑이가 꼭 위의 이야기처럼 원망과 복수의 대상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호랑이와의 훈훈한 관계를 다룬 이야기도 많으니까요. 우선 이야기를 살펴볼까요?

 


옛날 옛적 고령군 성산면 강정리 강정마을에 영리하고 민첩한 젊은이가 살고 있었다. 젊은이의 집은 매우 가난하여 삼시 세끼 밥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할 정도였으나 젊은이는 매사에 밝고 성실했다. 그리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농사일을 도우는 틈틈이 글공부를 했다. (중략) 젊은이는 과거에 급제하여 부모님을 편안히 모시는 것이 소원이었으며, 이를 위해 주경야독하여 한양으로 과거를 치러 떠나게 되었다. 그런데 과거가 치러질 날짜가 얼마 안 남아서 시험장에 시간 내에 도착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고, 젊은이는 밤낮을 쉬지 않고 너무 무리해서 산길을 오르다가 그만 지쳐 쓰러지고 말았다. 그 때 집채만 한 호랑이 한 마리가 젊은이 앞에 나타나 넙죽 엎드리며 타라는 시늉을 했다. 젊은이는 호랑이의 등에 올라탔고, 호랑이는 바람과 같이 달려서 한양에 도착했다. 젊은이는 호랑이 덕분에 장원 급제를 해서 금의환향을 하게 되었으며, 소원대로 부모님을 편하게 모실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날 밤 젊은이 앞에 호랑이가 나타났고, 젊은이는 호랑이에게 절을 하며 보은에 감사했다. 이후로 둘은 친구가 되었고, 호랑이는 수시로 젊은이에게 찾아와서 함께 있다 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호랑이가 죽을 때에 임해서도 젊은이를 찾아와 젊은이를 등에 태운 후 자신이 죽을 자리로 데려가 젊은이 앞에서 죽었다. 젊은이는 눈물을 흘리며 호랑이의 죽음을 슬퍼했고, 호랑이가 자신에게 베푼 은혜에 감사함과 동시에 그의 넋을 기리는 뜻에서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 김광순, <영험한 호랑이 이야기>, 박이정, 2006.10.21, 제 4장


호랑이와 사람의 상부상조. 제가 이 이야기를 꼽은 이유는 평소에 호랑이가 인간에게 보은한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인간이 호랑이에게 보은한다는 이야기는 생소했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인간중심주의를 뛰어넘는 훈훈하고 아름다운 이야기 입니까. 여기서 호랑이는 마치 산신령의 사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효자의 효성에 감격해서 복을 내려준 것이죠. 


산신령 with 호랑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호랑이가 보은하는 이야기도 살펴보겠습니다. 가장 흔한 레퍼토리가 몸이 아픈 호랑이가 인간에게 도움을 청하는 이야깁니다. 그런데 특이하게 호랑이들의 아픈 부위는 하나같이 사람이 치료하기에는 꺼려지는 부위. 바로 살상병기들이 자리하고 있는 부위입니다. 주로 아가리나 앞발이죠. 이야기 속 호랑이 한 놈은 당최 뭘 잡아먹었는지 옥비녀가 목구멍에 걸려 인후통을 호소하며 길 가던 나무꾼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갑작스러운 호랑이의 등장도 놀라운 판국에 갑자기 아가리를 쩍 벌리고 옥비녀를 빼달라는 호랑이의 낌새에 나무꾼은 고민합니다. 하지만 호랑이가 안타까운 마음에 부탁을 들어줬고 호랑이에게 명당자리를 선물 받죠. 또 한 놈은 난산으로 힘들어하는 암호랑이를 위해 애 잘 받기로 소문난 산파에게 도움을 청하는 애처가 호랑이입니다. 호랑이에 의해 납치 되다시피 끌려온 산파는 난생처음 호랑이 굴에서 호랑이 새끼를 받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되지만 최선을 다합니다. 그 후 호랑이는 매일 밤 산파의 집 마당에 각종 고기를 물어다 놓음으로써 은혜를 갚습니다. 덧붙여 한 날은 죽은 사람을 마당에 가져다 놓는 바람에 산파가 큰 곤욕을 치룰 뻔 했다는 재밌는(?) 후일담이 있네요. 뭐……. 호랑이 입장에서는 그 고기가 그 고기겠지만요.


은혜 갚은 호랑이 이야기의 영향 탓인지 호랑이 뿐 만 아니라 호랑이의 성정을 타고 태어난 호랑이띠도 은인은 절대 잊지 않고 두 배로 보답할 것이라는 띠풀이가 있습니다. 자……. 주위에 어려움에 처한 호랑이띠가 있으면 무조건 도와야겠죠.+.+


아 왜 하필... 여기냐고!! 겁나게시리


이처럼 한쪽에서는 야수 호랑이가 지탄과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동시에 다른 쪽에서는 신성하고 복스러운 존재가 되기도 합니다. 인간이 호랑이에게 품고 있는 양가적인 감정이죠. 특히 인간이 호랑이에게 느끼는 신성이나 애정은 인간의 생활 속에 뿌리내려 각종 놀이와 풍속이 됩니다. 새해가 되면 악귀를 막기 위해 호랑이 부적을 붙이고, 상인일(새해 들어 일진으로 첫 범날)에는 일을 하지 않고 놀아야 일 년 내내 건강하다고 여겼습니다. 반면 상인들은 바로 이날 처음으로 가게나 상점 문을 열었다고 하네요. 호랑이날을 시장열기에 가장 좋은 날로 여겼기 때문이지요. 이렇듯 호랑이는 산과 들에만 머무르지 않고 인간들 사이로 나와 일상에 자리 잡았습니다. 호랑이로 표현된 갖가지 상징물들이 이야기 속 호랑이와 같이 은혜로이 복을 내려주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죠.


잊혀져가는 호랑이이야기


호랑이 이야기가 민간에서만 구전 된 것은 아닙니다. 왕실에서도 호랑이 이야기는 왕조의 정당성을 나타내는데 유용하게 애용하였지요.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가 주인공인 <목조의 전설>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목조는 친구들과 나무를 하러 산에 갔다가 물가에서 호랑이를 만납니다. 친구들은 옷가지를 던져 호랑이가 무는 옷의 임자가 호랑이의 희생양이 되기로 했죠. 그런데 호랑이가 목조의 옷을 물었고, 목조는 어쩔 수 없이 호랑이 앞으로 나아갑니다. 바로 그때 물가의 바위가 무너져서 목조만이 죽음을 면하였습니다. 신의 사자인 호랑이가 목조를 선택하고 보호함으로써 조선왕조의 전통성을 부여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고려 태조의 5대조인 호경의 전설과 비슷한 것을 보면 신생 왕조가 주로 애용하는 레퍼토리였나 봅니다.   


오 저 기백을 보라!


여기서 호랑이는 왕조의 수호자이며 용과 함께 왕의 상징물이기도 합니다. 왕은 스스로를 가리켜 호랑이의 새끼 혹은 호랑이라고도 하니까요. 호랑이의 기품과 용맹은 왕의 상징이 되기에 충분했던 셈이죠. 그래서 사람들은 호랑이를 산의 임금이라는 뜻에서 산군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 호랑이의 기품과 용맹은 오히려 탄압의 대상이 됩니다. 일본은 해로운 동물을 없앤다는 명분이었지만 실상은 조선 사람들이 숭배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호랑이를 살상함으로써 식민지에 대한 제국의 우위를 확보하려는 목적이었죠. 그래서 호다국이었던 이 땅에 호랑이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현재는 한 마리도 찾아볼 수 없으니 안타깝습니다. 게다가 호랑이의 멸종과 더불어 수많은 호랑이 이야기까지 잊혀져가는 것 같아 아쉽네요.


곰진(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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