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선 프로젝트
“선생님, 추워요 안아주세요!”
제이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이었던 총각 선생님을 좋아했다. 키 크고, 핸섬하고, 똑똑하고, 다정하신 선생님이 제이의 첫사랑이었던 셈. 매일 써야 했던 일기 숙제는 제이의 연애편지로 채워졌다. 선생님, 하늘의 구름이 너무 예뻐요. 선생님, 눈이 오면 왜 내 마음은 들판을 향해 달려가나요. 같은 반 친구들이 우우 야유를 보내면 얼굴이 약간 붉어진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자자, 얘들아 괜찮아. 너희 나이 땐 누구나 좋아할 수 있어. 선생님을 좋아하는 건 자연스러운 거야. 제이는 좀 조숙했다고 할 수 있다. 그건 학교를 몇 년 늦게 들어간 탓에 동급생보다 나이가 많은 때문이기도 했지만, 제이는 자신의 영혼이 성숙해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학교를 졸업하고 제이는 통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없었다. 일요일에 교회에 가서 예배를 보는 것이 거의 유일한 외출이었다. 이렇게 십 년 가까이 집에서 혼자 지내다가 정부에서 제공하는 활동보조 서비스를 받으면서 제이는 처음 세상 구경을 하게 되었다. 밀알 모임에도 나가고, 취업 준비를 위해 학원에 나가 컴퓨터도 배웠다. 동네 슈퍼가 아니라 차 타고 나가서 쇼핑도 하고, 미술관이나 박물관 전시도 보고, 남이섬에 여행도 갔다. 최근에는 복지 일자리 근무도 하고, 인권강사 양성 아카데미에서 공부도 한다. 제이는 지금 서른 살이지만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는 몇 년 안 된다. 제이는 세상에 대해 궁금한 게 너무 많고, 이것저것 해 보고 싶은 것도 많다. 이것저것 해 보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자기 자리를 찾아 자신의 몫을 하면서 어른이 되어 살고 싶다. 누나는 도대체 뭐 하는 거야? 하는 일이 뭐가 있어? 이렇게 맨날 자기를 무시하는 동생에게 “난 이런 일을 한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래서 열심히 일도 하고, 공부도 하고, 시도 쓰고 하지만 제이가 무엇보다 가장 하고 싶은 것은 ‘연애’이다.
매일 아침 어머니가 제이의 머리를 빗겨 주신다. 어떤 날은 앞머리만 핀을 꽂아서 웨이브가 출렁이는 머리를 해주시고, 또 어떤 날은 단정하게 한 묶음으로 묶어주시기도 한다. 어머니는 어디를 가든 제이가 소중하게 돌보는 손길 속에 있다는 걸 보여주신다. 그런데 어머니는 요즘 부쩍 제이의 나이를 들먹이신다. 너도 이제 서른이 되었구나. 여자 나이 서른이면 계란 한 판이 넘어가는 나이가 아니냐(계란 한 판에 달걀이 서른 개라고 한다). 내가 언제까지 니 머리를 빗겨주어야 하니… 제이도 이제 엄마 품을 떠날 때가 된 것이다. 엄마 품을 떠나 자기의 삶을 사는 것. 자립을 하는 것. 그러나 제이에게는 아직 그 일이 멀게만 느껴진다. 내 힘으로 밥벌이를 하는 것. 짝을 만나 시집을 가는 것. 두 가지 다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부딪쳐볼수록 절감하게 된다.
그런데 이번에 제이는 짝을 찾을 좋은 기회를 만났다. 모 단체에서 맞선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는 것이었다. 뭐? 그게 어떤 거지? 제이는 마음이 들떴다.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제이는 아껴 두었던 옷을 꺼내 입었다. 어머니는 평소보다 오래 제이의 머리 매무새를 단장해 주셨다. 옆머리를 땋아서 뒤로 살짝 반짝이 나비핀을 꽂아주셨다. 뒷머리는 얼마 전 새로 파마를 한 웨이브가 우아하게 드리워지도록 드라이를 해주셨다. 그리고 얼굴에 화장도 하고 은은한 살구빛 립스틱도 바르고 제이는 설레는 외출에 나섰다.
어딘가에 있을 내 운명의 반쪽!
행사는 미혼 남녀 스무 쌍 몇 정도가 참여해서 여러 가지 게임을 하면서 자신을 드러내고, 이렇게 해서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골라 짝을 정하는 이벤트였다. 시작할 땐 남자 스무 명, 여자 스무 명이었는데 게임이 끝나면 그 중의 몇 쌍이 커플이 되는 것이었다. 게임을 하는 중간 중간에 호감이 가는 이성에게 스티커를 붙여주고, 최종적으로는 메모지에 마음에 드는 사람 1순위 2순위 3순위 해서 세 명을 적으면 그게 쌍방이 통했을 때 커플이 탄생하는 것이었다. 빼빼로 게임 , 풍선 안아서 터뜨리기 이런 게임을 통해 낯선 파트너와 호흡을 맞추고, 사회자가 게임 진행하면서 참여자에게 다가가서 말을 건다. 이것저것 질문을 해서 대답을 하는 동안 그 사람의 매력이 한껏 빛나도록 한다.
평생 같이 살아도 사람의 속은 알 수가 없는 법인데 어떻게 처음 만난 사람과 단 몇 시간 같이 있어 보고 짝을 찾을 수 있을지… 하지만 이 행사의 몇 시간은 몇 년, 몇 십 년을 같이 산 것과 비슷한 밀도를 가지는 것 같았다. 참여자들 모두 기필코 내 운명의 짝을 찾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게임에 올인했다. 그리고 원래는 여자 20명 남자 20명 이래야 하는데 여자 수가 좀 모자라서 남녀 짝을 지어서 해야 하는 게임에 남자들 두 명이 짝이 되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때 짝이 없는 남자들도 전혀 실망하지 않고 상품이라도 타야 한다는 열의로 수염 난 턱이 맞부딪치는 사태도 피하지 않았다.
활보는 행사에 참여할 수 없고 뒤에서 지켜보기만 해야 한다. 하긴, 내가 옆에 있으면 제이는 신경이 쓰여서 짝을 찾는 활동이 오히려 불편할 것이다. 뒤에서 보니까 제이는 완전 흥분해서 표정이 들떠 있다. 사방에 남자들이 둘러싸고 있고, 이 남자들이 제이에게 경탄의 눈빛을 보낸다. 아가씨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호감이 가는 사람들에게 붙여 주도록 되어 있는 스티커를 제이 가슴에 붙여준다. 제이는 마치 뭇남성들에게 한꺼번에 청혼의 꽃다발을 받은 듯 황홀한 표정이다. 뒤에서 보니까 제이는 그야말로 한 송이 아름다운 꽃처럼 이벤트의 주인공이 된 것 같다.
마침내 게임의 시간은 끝나고 마지막, 행사의 결과, 내가 가장 마음에 드는 사람 이름을 종이에 적어 커플을 정하는 시간. 제이도 1순위 2순위 3순위 남자를 정했다. 제일 마음에 드는 사람은 맞은편에 앉았던 앳된 청년. 점자 만드는 일을 한다는 청년이었는데 표정이 밝고 반듯해 보이는 사람이다. 두 번째는 제이 바로 옆에 앉았던 남자. 스티커 붙이는 종이를 가슴에 달아야 하는데 제이는 혼자 그걸 달 수가 없다. 이때 옆에서 도와주었던 남자. 다정한 사람이라 호감이 갔다. 세 번째는 저쪽 테이블에 있는 약간 멀리 있는 남자인데 제이가 보기에 게임에 가장 열정적으로 참여했던 사람이다. 짝이 없어 남자끼리 빼빼로 물기를 해야 했던 때에도 전혀 실망하는 기색 없이 파트너에게 다가가서 둘 사이 남은 빼빼로가 거의 없었던 남자. 이 사람의 열정에 제이는 감동했다. 이렇게 세 명의 남자 이름을 적은 메모지를 행사 진행자에게 넘기고 제이는 결과를 기다렸다. 두근두근… 그도 나를 찍었을까?
그러나 청실홍실 연분을 맺어주는 월하노인은 이번에 제이와 함께 하지 않은 것 같다. 사회자가 다섯 쌍의 커플을 발표하는데… 거기에 제이의 이름은 없었다. 짝이 맺어진 다섯 쌍의 커플은 모두의 축하를 받으며 다른 곳으로 데이트를 하러 떠나고. 참여자 모두에게 주는 선물-머그컵 두 개를 받아 쓸쓸히 행사장을 나와야 하는 제이의 심정은 씁쓸하다. 그 많은 남자들이 모두 나만을 사랑하는 것 같았는데 어째서 내가 찍은 세 명의 남자들은 모두 나를 외면한 거지? 사회자의 발표 후 제이는 속이 상해 죽을 것만 같았다. 짝을 찾는 일이 어디 그리 쉬운가. 이렇게 한 번 이벤트로 그게 성사된다면 세상에 결혼 못 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면서 나는 제이를 위로한다. 제이는 그래도 영 분이 안 풀리는지 씩씩거리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한다.
“하긴… 마흔이 넘도록 시집 못 간 언니도 있는데 내가 힘 내야지… 그래도 속에 열불 나 죽겠어. 우리 시원한 팥빙수나 한 사발 먹고 가자!”
_ 정경미(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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