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지나가고
태풍이 지나가고 오랜만에 날씨가 맑다. 지난 주까지만 해도 숨막히게 느껴지던 볕이 약간 헐겁게 느껴진다. 빛은 그대로인데 온도가 약간 내려갔다. 빛이 따갑기는 마찬가지인데 후덥지근하게 몸에 엉기는 느낌이 없어졌다. 나는 눈을 감고 천천히 온몸에 햇빛을 느끼면서 걷는다. 눅눅하고 무거운 몸을 말린다.
휠체어 뒤에 따라가면 눈을 감고 걸어도 된다. 제이가 전후좌우 잘 보면서 운전을 하기 때문이다. 난 그냥 휠체어 뒤의 손잡이를 잡고 따라가면 된다. 사람들은 내가 휠체어를 밀고다니는 줄 안다. 길을 다니다 보면 “수고가 많으십니다” 하면서 인사를 건네는 사람이 있다. 하긴, 나도 처음엔 그런 줄 알고 괜한 용을 많이 썼다.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천천히, 빨리… 제이를 내가 운전하려고 낑낑거렸다. 내 맘대로 안 되는 휠체어 뒤에서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나에게 하루는 지나가던 어떤 아저씨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니, 뒤에 매달려 오면서 왜 밀고 오는 것처럼 용을 쓰시오?”
어? 그렇군… 제이의 휠체어는 전동휠체어다. 내가 밀어서 가는 게 아니라 전기로 움직이는 것이다. 그런데 왜 난 힘을 잔뜩 주고 있었지? 내가 주로 안달을 하는 것은… 횡단보도 신호가 바뀔락말락 할 때, 빨리 길을 건넜으면 하는 때이다. 제이는 절대 서두르는 법이 없다. 깜박깜박, 녹색 점멸신호가 3칸, 4칸 남았을 때, 나 같으면 쌩 달려서 빨리 길을 건넌다. 하지만 제이는 천천히 멈추고 다음 신호를 기다린다. 나는 뒤에서 발을 동동 구른다. 아유… 이번에 건널 수 있었는데… 그래봤자 몇 분 차이긴 하다. 신기한 건 이렇게 느려터졌는데도 불구하고 제이는 약속 시간보다 항상 먼저 도착한다. 일찌감치 집을 나서기 때문이다. 가까운 거리도 약속 시간보다 최소한 1시간 전에는 집에서 나선다. 리프트 작동이 안 되거나, 엘리베이터가 고장나거나, 길을 못 찾아 헤맨다거나 하는 돌발사태가 발생한다 해도 어지간해서는 약속 시간 전에는 도착한다.
사실, 오른쪽으로 가든 왼쪽으로 가든 상관이 없다. 내가 보기에는 이쪽이 지름길인데 왜 돌아서 갈까 싶어도 돌아서 가는 길이 지름길이 될 때도 있다. 그래서 요즘은 그냥, 제이가 가는 대로 따라간다.
휠체어 붙잡고 가면서 나는 내 볼 일 다 본다. 무엇보다 무거운 가방을 내려놓을 수 있어서 좋다. 휠체어 등받이에 가방을 걸 수 있기 때문이다. 평소 나는 늘 가방이 무겁다. 이것 저것 읽어야 할 책들을 잔뜩 넣어 다닌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중에 한 권도 제대로 못 읽고, 가방 무게에 짓눌려 주저앉는 때가 많지만… 그래도… 들고라도 다녀야 나는 마음이 편하다. 제이를 만나면 내 무거운 가방을 맡길 수 있으니 난 몸이 가벼워서 날아갈 것만 같다. 그런데 이게… 휠체어에 짐 싣는 게 나만 그런 게 아닌 것 같다. 제이네 식구들도 그런 것 같다. 제이네 엄마도 장봐서 집에 들어갈 때 제이보고 나오라고 한다. 제이 휠체어 뒤에 장본 거 실어서 집에 들어간다. 이때 제이 엄마 하시는 말씀이… 아들 여럿 둔 거보다 휠체어 하나 있는 게 낫구나!
제이 휠체어 꼬리에 매달려 가면서 나는 졸기도 하고, 전화도 하고, 시험 칠 거 외우고, 책도 읽고, 글도 쓴다. 사방팔방 구경하면서 몽상에 잠기기도 한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혼자 있을 땐 시간이 아무리 많아도 뭘 하게 되지를 않는데 제이를 만나면 “말 시키지 마, 나 바뻐”라고 하면서, 따다다다 크게 소리내어 책을 읽는다. 이렇게 읽는 글은 우찌나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지. 혼자 있을 땐 쳐다보지도 않던 책이 말이다. 두 손이 다 빌 때는 뭘 해야 할지 몰라 허둥거리다 시간을 다 보내는데, 제이 휠체어에 한 손이 묶여 있으면 나머지 한 손으로 아주 많은 일을 하게 된다. 나에게 시간은… 혼자 있을 땐 꽝꽝 얼어붙어 있다가 휠체어 꼬리에 매달렸을 때 비로소 파닥파닥 살아나는 것 같다.
제이는 이번 주에 인권강사 아카데미에 가서 약간 주눅이 들었다. 이번 주 공부 주제는 장애인 인권 교육의 필요성과 현황. 내가 이 공부를 왜 하고 있는 거지? 에 대한 질문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장애인 인권에 관한 법적 근거를 찾아보고, 전국에 이런 인권 단체로 어떤 곳이 있으며 그곳에서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장애인 인권에 관한 법률을 어디에 가서 알아봐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고, 다른 친구들이 찾아와서 알려주는 법률 조항의 말들을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강의 시간에도, 토론 시간에도 조용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공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도 제이는 여전히 조용하다. 내가 “오늘 강의 어땠어?” 물어보니 제이는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한다. 그리고 걱정이 된다고 한다. 뭐가? 집에 가면 식구들이 오늘 어떤 거 공부했냐고 묻는데 자기는 대답을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것이다.
제이가 인권강사 아카데미에 공부하러 가는 날. 공교롭게도 이 날은 내가 공부하러 가는 날과 겹친다. 제이가 공부하는 시간은 오후고, 내가 공부하는 시간은 저녁이지만… 제이 공부 마치고 집에까지 데려다 주고 가면 내가 공부하러 가는 시간에 늦게 된다. 어떻게 하지? 가장 좋은 것은 이 날만 나 대신 다른 활보가 와서 제이랑 함께 활동을 하면 좋지만 시간 맞는 활보 구하기가 쉽지 않다. 센타에다가는 전부터 얘기를 해두었지만 적당한 사람이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방법은… 제이 공부 마치는 시간까지는 내가 함께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제이 집에까지 데려다주고 나면 내 공부 시간에 너무 늦게 된다. 그러니 전철 같이 타고 가다가 중간에 내려서 나는 공부하러 가고 제이는 혼자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제이가 혼자 집에 들어갈 수 있으면 조금 늦긴 하지만 나도 공부하러 갈 수 있다.
하지만 역시 불안하다. 전동차와 승강장 사이가 넓어 휠체어 바퀴가 끼진 않을지, 제이가 혼자 전철역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를 수 있을지, 전철역에서 나와 차들이 쌩쌩 다니는 도로를 건널 수 있을지, 경사진 아파트 언덕을 오를 수 있을지, 건물 출입문의 버튼키를 누를 수 있을지, 혹시 비가 와서 꼼짝달싹 못 하고 있진 않을지… 전에 다른 친구 얘기를 들어보니 휠체어를 타고 손발을 뒤틀고 하니까 이상하다고 다짜고짜 이 친구를 패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제이가 혹시 그런 미친놈한테 걸리는 건 아닌지… 걱정되니 집에 도착하면 문자 보내달라고 얘기하고 내가 먼저 전철에서 내린다.
제이는 무사히 도착했을까? 생각하며 나는 제이의 노트를 뒤적여 본다. 강의 들은 내용을 적은 노트이다. 아카데미 원장님이 제이에게 “활보가 열심히 노트 필기를 하던데 집에 가서 봐?”라고 하셨다. “네, 집에 가서 노트 보면서 강의들은 거 열심히 복습해요!”라고 제이 대신 내가 대답했다. 제이의 명예를 위해서 종종 나는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한다. 그런데 노트에는 휘갈겨 쓴 글씨가 가득하다. 글자를 하나도 알아볼 수가 없다. 글자들은 마치 폭풍 속에서 미친 듯이 아우성치는 숲의 나무들 같다. 강의 시간에 받아 적은 것을 집에 가서 다시 정리를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 했다. 내 공부하느라 바빠서 제이의 노트는 완전히 방치한 것이다.
멍청한 제이 같으니라구! 이러니까 강의 들어도 뭔 말인지 하나도 모르는 거야! 자기 휠체어 꼬리에 매달려 내가 맨날 딴짓 해도 모르는 제이에게 나는 갑자기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그래서 “노트 이리 줘!” 하면서 정리 다시 하겠다고 뺏아왔는데… 같이 있으면서도 딴짓만 하는 내가 따로 시간을 내서 제이의 노트를 정리해줄 수 있을지… 지각이다 지각! 허겁지겁 공부하러 달려가면서 나는 의문이 들었다.
_ 정경미(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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