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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보 활보(闊步)

날 해고한다구? 브라우니, 물어!

by 북드라망 2012. 10. 15.

밥그릇 싸움


며칠 전, 제이는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일자리 구하지 않느냐. 여기 와서 같이 일해 볼 생각 없느냐. 안 그래도 다음 주면 복지 일자리 근무가 끝나서 일자리 새로 알아봐야 하는데 잘 됐다면서 우리는 기대에 들떠 면접을 보러 갔다.

사무실은 어떤 아파트 단지내 상가 건물 1층에 있었다. 그곳은 최근 새로 설립한 장애인 자립생활센터라고 한다. 책도 내고 여러 가지 문화 행사도 하는 단체라고 한다. 사무실에는 ‘소장님’이라는 여성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기 커피 있으니 타서 마시세요. 소장님이 말했다. 나는 포터의 물을 끓이고 믹스커피 두 봉을 뜯었다. 종이컵에 제이 한 잔, 나도 한 잔 커피를 타서 마셨다. 제이를 사무실의 응접 테이블에 앉게 하고 나는 사무실 한쪽 구석에 앉았다. 가방에서 책을 꺼내 읽으며 제이가 면접 끝날 때까지 기다릴 요량이었다. 그런데 소장님이 제이랑 단둘이만 얘기하고 싶다고 했다. 이런 경우가 지금까지는 없었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나는 약간 당황해서 제이를 쳐다봤다. 제이는 나가서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나는 사무실을 나와 아파트 단지 사이를 배회하며 제이의 면접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여름이 지나고 어느새 가을도 깊어 가는지 목에 와 닿는 공기가 선득하게 느껴졌다. 주차장 언덕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진흙길에 난 바퀴 자국 같은 구름에 노을빛이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하늘 본 지 참 오랜만이구나. 나는 붉은 구름이 남청색 어둠으로 조금씩 가라앉는 일몰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삼십 분쯤 지났을까. 면접이 끝났다는 제이의 전화를 받고 나는 다시 사무실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얘기가 잘 된 것 같다. 안녕히 계세요. 제이는 소장님께 다정하게 인사를 한다. 나도 가방을 챙겨 제이의 휠체어를 밀면서 사무실을 나오려는데 소장님이 문간에서 조금 전 제이가 앉았던 테이블 위를 가리키며 저것도 가져가라고 한다. 제이가 먹다 남긴 커피다. 나는 제이에게 마저 마실 거냐고 묻는다. 제이는 안 마시겠다고 한다. 어차피 버릴 건데 빨리 마셔요. 소장님이 말했다. 나는 약간 당황했다. 커피 좀 남기면 안 되나? 그리고, 버릴 거니까 니가 마셔라니. 말을 왜 저렇게 하나 싶어 나는 소장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소장님의 눈은 사시였다. 도대체 누굴 보고 말을 하는 건지. 그럼 제가 마실게요. 제이가 먹다 남긴 커피를 내가 마저 마시고,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버린 후, 우리는 사무실을 나왔다.

날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아파트 언덕길을 걸어 내려오면서 나는 제이에게 면접은 잘 봤냐고 묻는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제이가 전하는 면접 내용을 듣고… 나는 그 자리에서 까무라치고 말았다.

- 제이 : 급여는 30~40만 원 정도 됐으면 좋겠다. 근무할 수 있는 시간은 월요일에서 목요일까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 소장님 : 근무 시간은 그렇게 하자. 그런데 여기 센터 만든 지가 얼마 안 돼서 형편이 어렵다. 급여를 그렇게 주기 힘들다. 일단 29만원 주겠다. 내년에는 지원이 늘어날 예정이니 그때 급여를 올려주겠다.
- 제이 : 내가 여기서 해야 하는 일이 뭔가?
- 소장님 : 이것저것 필요하다 싶은 일을 찾아서 하면 된다. 사무실 지키고, 전화 받고, 청소하고… 웹디자인을 배웠다니 센터 안내 홍보물을 만들 수도 있지 않겠는가.

제이는 생각한 것보다 급여가 좀 적다 싶었지만, 그래도 일을 할 수 있는 게 어디냐 싶어 좋아했다. 무엇보다 자신이 배운 웹 디자인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 기뻤다. 배운다 생각하고 열심히 일하자. 이렇게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단, 하면서 소장님이 요구하는 조건이 몇 가지 더 있었다. 내가 보기엔 이게 핵심이다.

지금 소속되어 있는 센터를 여기로 바꿀 것. 활동보조도 여기서 붙여주는 사람을 쓸 것. 작업장 일하던 거 당장 그만두고 내일 모레부터 여기로 출근할 것.


뭐...뭥미? 이 상황은...


제이는 생각을 좀 해봐야겠다고 했다. 집에 가서 부모님과 상의를 좀 해봐야겠어요. 그랬더니 소장님이 지금 나이가 몇인데 부모님한테 물어보겠다는 거냐 지금 당장 본인이 결정하라고 했다. 언제까지 복지 일자리 근무만 할 거냐. 자기 일을 해야지. 여기서 함께 센터 키우면서 자립하라. 제이는 엉겁결에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자, 그럼 우리 약속한 거죠? 약속 꼭 지키겠다고 제이는 소장님과 손가락을 꼬옥 걸었다고 한다.

나는 기가 막혔다. 그러니까 제이는 지금 나한테… 너 내일 모레부터 당장 일 그만두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이런 처지였구나… 제이의 말 한 마디에 하루 아침에 밥줄이 끊길 수 있는. 나는 머릿속이 하얗게 비는 것 같았다. 이런 처지에 그동안 제이의 인생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충고를 늘어놓았던 나 자신에 대한 환멸이 온몸에 소름처럼 돋았다.


나는 제이에게 물었다. 내가 뭘 잘못한 게 있느냐. 제이는 없다고 했다. 그런데 어째서 내일 모레부터 당장 일을 그만두라고 하는 거냐. 이런 경우는 없다. 이용자에게 활보를 ‘짜를’ 권리는 없다. 이용자는 고용주가 아니다. 만약 둘이 안 맞아서 활보를 바꾸고 싶다고 해도 최소한 2주 전에는 센터에 통보를 해줘야 하는 법이다. 그러면 센터에서 활보에게 다른 이용자를 연결해 준다. 그래도 이게 금방 연결이 안 되기 때문에 몇 달을 활보는 실직 상태로 보낼 수도 있다. 남의 생계 문제를 이렇게 쉽게 생각해도 되는 거냐. 그리고 작업장 근무가 아직 덜 끝났는데 그거 팽개치고 새 일 시작한다는 게 말이 되냐. 그거는 작업장하고 얘기를 잘 하면 된다고 제이는 말한다.

그래, 그건 니가 알아서 할 일이고, 내가 지금 남 걱정할 형편인가. 졸지에 정리해고 당한 처지에. 혼비백산 얼이 빠진 나에게 제이가 하는 다음 말이 완전히 나를 멘붕 상태에 빠뜨렸다.

“소장님이 나한테 남자 활보를 붙여준댔어.”



오 마이 갓… 나는 더 이상 제이랑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한 가지만 부탁하자고 했다. 이건 혼자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집에 가서 부모님과 상의해본 후 신중하게 결정해 달라. 그러고 우리는 헤어졌다.

밤에 제이한테서 문자가 왔다. 부모님과 상의해본 결과 거기는 안 가기로 했다. 공부해서 인권 강사가 되는 쪽으로 진로를 결정했다. 내가 사회생활 경험이 부족해 경솔한 행동을 한 것 같다. 미안하다.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 해줬으면 좋겠다. 마음에 담아두지 말라.

나는 제이의 뻔뻔스러움에 치가 떨렸다. 문제가 생기면 항상 난 장애인이니까 난 나이가 어리니까 접어 달라고 하는 태도. 사람을 죽여 놓고도 미안하다 실수였다고 하면 되는 건가? 그리고 인권강사 될 거니까 거기는 안 가겠다고 하는 게 지금 나한테 사과가 되는 말인가? 일년 넘게 자기의 손발이 되어 일한 사람의 인권, 아니 생존권을 이렇게 무참하게 짓밟아 놓고 무슨 인권강사가 되겠다는 건가.

다음 날 아침 제이는 소장님한테 전화를 해서 미안하다 거기서 일하는 거 어렵겠다고 말했다. 소장님은 제이에게 자기랑 어제 손가락까지 걸고 한 약속을 하룻밤새 뒤집다니, 그렇게 살지 말라고, 화를 벌컥 내면서 전화를 끊었다고 한다.

부들부들… 남의 밥그릇 뺏으려 한 그 소장에 대한 끓어오르는 분노를 나는 참을 수가 없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도 살고 봐야 하지 않는가. 제이에게 짤리지 않기 위해 앞으로 나는 뭐라도 할 것이다. 일단 성전환 수술을 할 것이다. 백마 탄 왕자 활보가 되어 제이를 위험에 빠뜨리는 악의 무리로부터 제이를 영원히 지킬 것이다. 즉, 내 밥그릇 뺏는 놈들 다 죽여버리겠어!


-정경미(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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