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적인, 너무나 연극적인
“안녕, 가을이야!”
제이는 일주일에 한 번 밀알 모임에 나간다. 밀알은 장애인 선교 모임이다. 여름에는 정기 모임이 없다가 오랜만에 다시 만난 친구들에게 제이는 반갑게 인사를 한다. 어 안녕. 근데 뒤에 뭐라고 한 거야? 친구들은 제이가 “안녕”이라고 한 뒤에 “가을이야”라고 한 말을 못 알아들었다. 응 가을이라구. 친구들은 여전히 못 알아듣는다. 제이 쪽으로 몸을 바짝 붙여서 다시 묻는다. 뭐, 라, 구? 응… 가, 을, 이, 라, 구우… 제이는 손발을 파닥거리면서 온몸으로 외친다. 그래도 친구들은 못 알아듣는 것 같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우뚱 한다. 결국 내가 나서서 제이의 말을 친구들에게 전해준다.
제이는 뇌병변 장애가 있어서 발음이 정확하지 않다. 발음기관의 근육이 경직되어 활동이 원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 제이의 말을 못 알아들은 것은 제이의 발음 때문이 아닌 것 같다. 안녕 여러분, 아름다운 밤이에요. 무대 위에서 반짝이 드레스 입고 연기하는 여배우처럼 제이의 몸짓에는 어쩐지 약간 비일상적인, 연극적인 요소가 있다. 그게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에게 낯설게 느껴진 것 같다.
밀알 모임에 나가는 게 처음에 나는 약간 불편했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 하면서 나한테 교회 다니라고 억지로 강요할까봐서 무서웠다. 그런데 지금은 편안해졌다. 박자 맞춰서 “아멘” 기도도 잘 한다. 예배 시간에 제이 옆에서 성경책 책장을 넘겨주고, 찬송가도 곧잘 따라부른다. 피곤하면 예배실 옆에 있는 작은 방-기도실에 가서 엎드려 잔다. 밀알 모임은 예배와 나눔의 시간이다. 예배는 기도와 찬양, 그리고 목사님의 말씀을 함께 듣는 시간이다. 나눔은 예배 시작 전에 저녁을 같이 먹는 ‘밥상 공동체’ 활동과 예배 끝나고 ‘목장 모임’이라고 해서 모둠별로 성경 구절을 함께 토론하는 활동을 말한다. 물론, 이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밥상 공동체-저녁 같이 먹는 시간이다.
밀알의 밥은 너무 맛있다. 내가 평소 집에서 혼자 먹는 밥이란 게 부실하기 짝이 없다. 바쁘다는 핑계로 라면으로 때우기 일쑤. 혹은 기본 반찬 몇 가지 냉장고에서 꺼내서 찬물에 후루룩 밥을 말아 먹는 때가 많다. 밖에서 사먹는 밥은 비쌀 뿐만 아니라 입맛만 요란하지 속이 든든하지 않다. 그런데 밀알의 밥상은 언제나 정성이 가득하다. 금방 해서 찰지고 고슬고슬한 밥. 장 속의 잡다한 찌꺼기를 씻어주는 구수한 우거지 된장국. 집에서는 좀처럼 해먹기 힘든 정갈한 나물 무침들. 맛깔진 양념장에 버무린 도토리묵. 싱싱한 겉절이. 오늘은 디저트로 과즙이 시원한 배가 나왔다. 야 배가 나왔어! 뭐? 누구 배가 나왔다는 거야? 둘러앉아 함께 밥을 먹는 사람들 사이 유쾌한 수다꽃이 핀다.
오늘 밀알 모임에선 추석을 맞이하여 송편을 함께 빚기로 했다. 예배 끝나고 모여서 미리 준비한 커다란 반죽을 몇 덩어리로 나눠서 대여섯 명씩 한 팀이 되어 송편을 만드는 것이다. 누구 송편이 제일 예쁜가 보자. 사람들은 소매를 걷어올리고 반죽에 달려들어 각자의 솜씨를 뽐낸다.
제이는 손을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 한다. 하지만 왼손은 조금 움직일 수가 있다. 손가락을 정교하게 움직이진 못하는데 주먹을 반쯤 쥘 수가 있다. 이 왼손으로 제이는 휠체어 손잡이를 잡고 운전을 한다. 송편을 예쁘게 빚으면 이뿐 딸을 낳는대. 제이도 예쁜 딸을 낳고 싶다. 제이는 커다란 반죽 덩어리에서 반죽을 조금 떼어 왼손으로 조물조물 주무른다. 이렇게 하면 반죽이 더 찰지게 되어 송편이 뭉개지지 않고 제 모양을 잘 유지할 수 있다. 그런데 제이는 주먹이 꽉 쥐어지지 않으니까 반죽이 야무지게 안 된다. 그래서 주먹 반죽을 어느 정도 한 후에는, 반죽을 식탁 위에 놓고 굴린다. 식탁과의 마찰력으로 반죽의 점성을 높이는 것이다. 그러면 이걸 내가 받아서 납작하게 눌러 홈을 만들어서 설탕과 깨를 섞은 소를 넣고 반죽을 오므려 붙인 후 모양을 만든다. 어떤 모양이 좋을까? 보름달? 반달? 주머니 모양? 제이는 갸름한 반달을 좋아하지만 난 푸짐한 보름달을 좋아한다. 모양 만드는 건 내 손이 하기 때문에 우리가 같이 만든 송편은 보름달이 된다.
그런데 옆에 있는 C는 송편 속이 자꾸 터진다. 반죽을 다시 반죽해서 속을 넣어야 하는데 큰 반죽에서 뗀 거 그대로 속을 넣으니 이게 반죽이 찰지지가 않아서 속에 들어 있던 설탕 깨가 자꾸 밖으로 터져나오는 것이다. 깨가 쏟아지네! C는 황급히 속이 벌어진 반죽을 주먹에 쥐고 공처럼 뭉친다. 그리고는 다시 모양을 만들려고 하는데 손놀림이 어눌해서 모양이 잘 만들어지진 않고 너무 오래 주무른 탓에 결국 폭탄처럼 터져버린 송편 앞에서… 앙, 반죽이 잘못됐어! C는 자신의 요령 부족을 반죽 탓으로 돌린다. 뭐 어때 그래도 들어갈 거 다 들어갔으니 다시 뭉쳐서 쪄놓으면 맛있어. 나는 자폭해버린 송편을 수습하며 C를 위로하지만, C가 만든 송편을 제이는 절대 안 먹을 것 같다. 제이는 암만 맛있어도 이상하게 생긴 거는 안 먹는다. 그런데… 뜻밖에도… 폭탄 송편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제이는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속이 터진 송편을 어떻게 먹느냐고? 믿음으로 먹지!”
사람들이 깜짝 놀란다. 그렇구나… 추석을 맞이하는 데는 신심이 필요한 거구나… 이거 송편이야, 믿어!
송편에도 신심이 필요한 거였구나~
한편, P는 시각 장애인이다. 앞을 전혀 못 본다. 나는 P가 화장실에 갈 때 팔짱을 껴서 화장실 문 앞에까지 데려다준 적이 있다. P는 천사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선교회의 중창단으로 활동하면서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노래를 선물한다. 앞이 안 보이는 P는 어떤 모양의 송편을 만들까? P가 만든 송편은 독특했다. 다른 사람들이 만든 송편은 조금씩 모양이 다르긴 해도 대체로 ‘둥근’ 모양의 범주에 속했다. 송편은 달 모양으로 만들고, 달은 둥글다. 대체로 이런 공통감각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P가 만든 송편은 네모 모양이었다. 그리고 가운데를 손가락으로 꾹 눌러서… 뭐랄까… 약간 추상적인 나비 모양이었다. 이것도 송편인가? 수군거리는 사람들 속에서 이 테이블 저 테이블 돌아다니며 송편 찐 거 얻어먹고 품평을 해주시던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래 너는… 눈에 뵈는 게 없다 이 말이지?”
속이 터진 송편이나 나비 모양의 송편이나 형태를 분명히 알 수 없는 울퉁불퉁한 모양의 송편이나 커다란 솥에 쪄서 김이 무럭무럭 날 때 함께 둘러앉아 먹으니 다 맛있다. 지난 주 맞선 프로젝트에서의 불운 때문에 의기소침해 있던 제이는 오늘 밀알 모임에 와서 웃고 떠들고 손에 가득 반죽을 묻히며 송편을 만드는 동안 기분이 좋아졌다. 추석은 정말 좋은 날이로구나!
모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거리의 어떤 까페 앞에서 제이는 사진을 한 장 찍어달라고 한다. 테라스가 예쁜 까페다. 하늘색 목책이 둘러져 있고 창틀이 노랑색이다. 무채색의 배경 속에 한 장의 색깔 선명한 그림 같다. 제이는 이 까페 앞에서 포즈를 잡는다. 오늘 제이는 가을을 맞이하여 새 티셔츠를 입고 왔는데 모임의 누구도 이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어머 이 티셔츠 너무 예쁘다. 너랑 너무 잘 어울려. 이렇게 감탄을 해줘야 하는데 아무도 제이의 새로운 패션에 주목해 주지 않았다. 제이는 그 허전함을 사진을 찍는 것으로, 미지의 어떤 시선에 찬탄을 받는 상상으로 대신 달래는 것이다. 노란 줄무늬 티셔츠가 잘 보이게, 그리고 뒤의 까페 배경과 잘 어울리게 사진 예쁘게 찍어달라고 말하는 제이의, 턱을 살짝 들어 도도한 표정! 흐그… 이게 여배우들이 하는 짓이 아니고 뭔가 말이다.
안녕 여러분, 아름다운 가을날이에요… 찰칵!
_ 정경미(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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