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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설수설

[행설수설] 죽음과 삶, 그리고 글쓰기

by 북드라망 2023. 3. 22.

죽음과 삶, 그리고 글쓰기

*이 글은 <2020 고미숙의 行설水설 – 티벳, ‘눈의 나라’로의 여행> 강의의 일부 내용입니다.


 
지상에 엮여있는 자아
힌두교의 목적은 뭘까요? 천신의 세계에 태어나는 거예요. 그러려면 신들에게 제사와 공양을 해야 돼요. 그런데 거기의 자아가 견고하잖아요. 나는 크샤트리아, 브라만. 이런 거요. 신에게 가까워졌을 뿐이잖아요. 그래서 이 구조는 중국의 도교하고 좀 닮았어요. 도교도 옥황상제가 있고 하늘나라라는 게 있잖아요. 하늘에 선녀들도 있고요. 근데 그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아주 가벼운 거예요. 너무나 가벼워서 하늘로 올라갈 수밖에 없는 거죠. 땅으로 내려올수록 무거워지는 거예요.

무거움에 온갖 괴로움이 붙어있죠. 그리고 괴로움의 보상이 되는 쾌락적인 것도 몸 안에 다 들러붙어 있는 거예요. 이것을 고정시키는 게 무거움이에요. 몸은 죽은 다음에 사라지는데 자아가 안 사라져요. 뚱뚱하니까 올라갈 수가 없어요. 이건 과학을 통속적으로 설명한 거예요. 일단 죽음이 두렵거나 죽음 이후에 자유로워지려면 가벼워져야 돼요. 그러려면 자아가 해체되어야죠. 그런데 자아를 뚱뚱하게 가지고 있는 게 자본주의의 인간이에요. 자아는 뭐죠? 소유밖에 없고, 소유의 내용은 다 핵가족이에요. 관계도 너무너무 자그마하죠. 

 

 


불교가 가르치는 죽음
달라이라마는 열네 번째 환생자입니다. 그렇다면 환생의 문제를 탐구해 봐야겠죠. 도대체 그냥 그게 신화적인 얘기다. 티벳인들만의 미신이다. 이렇게 한다면 배울 게 없잖아요. 티벳어로는 툴쿠(Tulku)라고 합니다. 그런데 달라이라마만 환생을 하는 게 아니고 판첸라마도 하고 다른 린포체라는 고승들도 다 환생자예요. 이 그룹이 엄청 많아요. 그래서 우리나라에도 이런 린포체들이 와서 명상 지도 같은 것을 하는 네트워크가 꽤 있더라고요. 그런데 그중에 한 분은 굉장히 유명한 분이고 40대인가 그런데 두 명의 고승의 환생자예요. 되게 신기하죠. 그러니까 우리가 아는 자아의 개념이 아닌 거예요. ‘내가 요 자아를 가지고 다음 생에 영속한다. 그걸 기억한다.’ 이런 것은 설령 다 기억한다 해도 그게 무슨 지혜나 자비를 구현할 수는 없어요. 

불교는 깨달음에 이르려면 스스로 자기를 해방해야 해요. 그런데 거기에 이르려면 치열하게 공부해야 돼요. 그렇다면 불교는 이 세계와의 연속성을 어떻게 가질까요? ‘다시 보살의 몸으로 돌아와서 길을 잃고 헤매는 중생에게 구원의 비전을 제시해 주는 역할을 한다.’ 이게 환생이에요. ‘모든 것이 무상하니 슬픔에 빠지지 말라.’ 이것이 핵심이에요. 

불교가 평생 가르친 게 무상, 무아, 열반이잖아요. 그런데 막상 열반에 드는 순간 어떻겠어요. 제자들이 울고불고 난리가 나겠죠. 안 그러겠어요? 그러면 그 스승이 눈을 ‘팍’ 떠요. 너무 슬퍼하니까 조금 더 놀다가 가요. 그렇게 며칠 더 있다가 돌아가시는 스토리가 있어요. 굉장히 유머러스하죠? 왜냐하면 생사가 여일(如一) 하다고 했으니까요. ‘죽음이 삶하고 다른 게 아닌데 왜 슬픈 거냐.’ 이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이 ‘몸’에 갖고 있는 집착 때문에 슬픔을 겪지만 그런 식의 비탄과 슬픔에 빠져서 몸을 망치는데 빠지질 않아요. 그리고 죽음을 비장하게 다루면 원한이 생겨요. 그러니까 ‘누구 때문에 죽었다’라고 하는 마음을 갖게 돼요. 그런데 원한과 비탄을 가지면 윤회의 프로세스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사마천과 정약용은 살아있다
입적을 한 상태의 몸을 화장하지 않고 미라로 만드는 기술이 있더라고요. 물기를 빼고 소금을 가지고 하는 게 중국이에요. 그래서 중국 문명은 환생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지 않아요. 중국은 역사 속에서의 평가가 제일 중요해요. 죽음 이후의 역사적 평가가 중국 지성인들의 핵심인 것 같아요. 불교와 굉장히 다르죠. 저는 이런 것을 인류학적으로 깊이 탐구해 보고 싶어요. ‘무의식 안에서 도대체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러분도 생각해 보세요. 나는 죽음이라는 걸 어떻게 생각하는가.

 


중국의 사마천에서부터 정약용 선생까지 보면, ‘역사 속에서 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 이게 내가 삶을 결정하고 어떤 고난도 견디는 힘이 되거든요. 그렇게 역사에서 평가가 되려면 글이 남아야 되잖아요. ‘사마천이 왜 궁형을 당하고 죽지 않았는가.’ 이름을 남겨요. 그렇지 않으면 나는 그냥 궁형을 당한 아주 한심한, 이름조차 거론되지 않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유배지에 간 정약용 선생도 왜 계속 글을 썼느냐면, 내가 이 글을 안 남기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기 때문인 거예요. 그래서 집이 싹 망했는데도 자식들한테 ‘이제 공부할 때다.’라고 말해요. 이 아버지도 참 무책임하시다고 해야 되나? 아니면 너무 고매하다고 해야 되나? 그래서 자식들은 생계도 굉장히 힘든데 계속 책을 읽고 글을 써요. 그리고 자신도 공부를 하는데 왜 그러냐면, ‘너희들이 글을 쓰지 않으면 이 에비는 의금부의 죄인 문초하는 그 기록으로 남는다.’라는 거예요.

그런데 자식들은 공부를 안 했어요. 공부할 틈도 없었지만, 공부보다 술을 좋아하셨어요. 그래서 계속 잔소리하는 편지를 보내면서도 본인은 매일매일 공부를 하셨죠. 그러니까 어마어마한 글을 남기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정약용 선생님은 지금 여기 서울 한복판에 살아 계시잖아요. 21세기 내내.

 


죽음을 초월하는 길, 글쓰기
그런데 ‘여러분은 이런 식의 삶을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물어보면 ‘나는 내가 죽은 다음에 이름을 남기겠다.’ 이런 생각을 해요. 우리는 역사에 이름남은 사람들을 계속 배우잖아요. 그리고 그 사람을 예찬해요. 그 사람들이 이렇게 뭘 남기지 않았으면, 우리는 정신적인 진화의 과정을 경험하지 못할 거예요. 그런데 자기의 삶에 대해서 죽음을 생각할 때는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죠.

이름을 남기려면 공부를 많이 해야 돼요. 글도 써야 하죠. 그런데 사람들이 이건 포기하고 어떻게 해요? 그냥 ‘영생을 얻겠다.’로 가는 거죠. 이건 미신이에요. 내가 피해서 간 거잖아요. 중화 문명권에서 죽음을 생각하는 인식에도 도달하지 않은 거예요. 사실은 그런 노력도 하고 있지 않다고요. 그래서 기껏 하는 말이, ‘장례식장에 많이 와줬으면 좋겠어.’‘나를 위해서 식구들이 많이 울어줬으면 좋겠어.’ 기억되고 싶다는 정도잖아요. 이게 굉장히 허무주의 같아요. 그래서 삶에서 길을 잃고 갈팡질팡하는 거예요. 

그런데 ‘역사에 이름을 남기겠다.’가 동아시아 문명권에서는 죽음에 대한 가장 고매한 해석이었어요. 다시 환생을 한다는 게 없어요. 이게 뭐냐 하면, 내가 살아서 한 행위 중에 정신적인 것만 남을 텐데 이것이 글로서만 남는 거예요. 글이 살아서 지속되면, 나는 생사의 경계를 넘어서 존재하게 되는 거예요. 영속하는 유일한 길은 나의 정신 활동이 남아서 계속 다음 생에도 칭찬과 비판을 받는 거예요. 이게 살아있는 거죠. 공자는 계속 무덤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잖아요. 여전히 살아 있잖아요.

 

 

강의_고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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