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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설수설

[행설수설] 지옥에서의 평정심 – 1959년 라싸, 그리고 달라이라마

by 북드라망 2023. 2. 22.

지옥에서의 평정심 – 1959년 라싸, 그리고 달라이라마


* 이 글은 <2020 고미숙의 行설水설 – 티벳, ‘눈의 나라’로의 여행> 강의의 일부 내용입니다.

달라이라마의 시험
동쪽에서는 게릴라들의 항전이 계속되면서 중국군이 라싸로 진격을 하고 있었던 상황이었어요. 그리고 이미 1950년에 라싸의 국경에서 ‘티벳은 중국의 땅이다.’라고 선언을 해버렸죠. 라싸에서 중국군 기지와 티벳 군대가 대치하는 상태로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거의 매일 궁에서 달라이라마는 분노에 가득 차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을 대하는 피로 속에서 자비심을 훈련합니다. 그런데 1959년에 이르러서 양쪽이 참을 만큼 참은 상태를 넘어 부딪치게 됩니다.

1958년부터 달라이라마가 불교 철학 시험공부를 했어요. 필기시험, 암송 시험, 토론 시험을 다 통과해야 박사학위를 받아요. 근데 이 와중에 거기에 전념하고 있는 모습이 정말 놀라웠어요. 세계에 어떤 군주가 그 순간에 이런 삶을 살 수 있을까. 그렇게 3월에 달라이라마가 시험을 준비해요. 그 시험은 어마어마한 시험이에요. 수천 명의 군중 앞에서 최고의 승려들과 학자들이 다 모인 데서 토론을 하는 거예요. 불교의 인식론과 논리학으로 토론하는 건데, 토론을 잠시도 머뭇거리면 안돼요. 놀라운 건 뭐냐 하면 인식론과 논리학을 배우는 것이 자비심과 연결된다는 거예요. 어떤 점에선 티벳 민중 전체가 온 힘을 다 기울여서 한 사람을 부처로 만들고 있는 거죠.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불교의 인식론과 논리학, 최고로 난도가 높은 형이상학 테스트를 받는 게 티벳 사람들에게는 축제였어요. 그랬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이 고난의 시기를 스트레스 받지 않고 지났다고 생각해요. 스트레스 받으면 대부분의 군주들은 술을 먹거나 여색에 빠져버려요. 아무것도 할 게 없기 때문에. 그런데 이분은 공부가 일상의 부질없는 스트레스와 번뇌를 헤쳐 나가는 힘이 된거죠. 느끼는 게 없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은 이것저것 다 갖고 있는데 왜 스트레스 타령을 할까요. 삶의 지향점이 없기 때문이에요. 거기에 매 순간 몰입하는 공부가 없기 때문이에요.

달라이라마는 중국군하고 대치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 시험을 굉장히 훌륭히 치렀어요. 그런데 시험공부를 하는 와중에 중국군이 와서 ‘베이징에서 최고의 창극 배우들이 왔으니, 특별히 연극 공연을 해주겠다.’고 제의해요. 달라이라마를 공연에 초대한 것이지요. 근데 뭔가 이상하잖아요. 그리고 지금 시험공부하고 있는데 무슨 창극 배우들을 보라고 해요? 근데 조건이 뭐냐면 경호원 없이 오라는 거죠. 이건 말도 안 되는 상황이잖아요. 그래서 뭔가 심상치 않다. 그런데 일단 시험이 끝난 다음 일방적으로 3월 10일에 오라는 식으로 결정이 돼버렸어요.



평정심, 달라이라마의 이적
달라이라마는 그날 아침의 상황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어요. “새벽에 잠이 깼을 때 나는 그날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여느 때처럼 기도실로 갔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조화로웠고 평화롭고 친숙했다. 나는 기도를 올리고 명상을 한 다음 정원으로 나갔다. 처음에는 당면한 문제들에 골몰했으나 이내 그 봄날 아침에 아름다움에 빠져 그것들을 잊어버렸다.”

와, 대단한 정신승리법 아닌가요? 이거야말로 진정한 정신 승리법. 이런 거를 우리는 배워야 돼요. 근데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면 계속 마음을 착하게 거룩하게 먹어야 가능하다고 생각하는데, 적을 사랑할 수 있는 자비심은 세계를 명료하게 단 하나의 빈틈도 없이 이해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아요. 그게 없으면 절대 지켜지지 않죠. 그냥 미쳐버립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었고 햇볕은 사원 너머 산정을 어루만지고 곧 보석공원(노브링카 궁전)의 궁과 불당들을 비추었다. 봄을 맞아 만물이 싱그럽고 활기찼다. 새 풀이 자란 덤불들 포플러와 버드나무에 연약한 눈들 연못에서는 연잎들이 햇빛 속에 펼쳐지려고 수면을 향해 자라 오르고 있었다.” 이렇게 자세히 묘사를 할 수가 있을까요?

“그러나 여기서 내가 아는 평화의 마지막 순간이 끝났다. 갑자기 정원 담 너머에서 외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변 사람들이 내게 라싸 주민들이 시내를 떠나 노브링카 궁으로 행진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나를 보호하기 위해. 중국인들이 나를 자신들의 기지로 데려가는 것을 막으러 온다고 소리치면서.”

이게 왜 눈에 띄냐면, 우리는 어떤 고민이 있으면 그 고민에 빠지거나, 고민을 잊기 위한 몸부림으로 술을 마시거나, 아니면 수면제 같은걸 먹거나 주사를 맞거나 해서 그 모든 시간을 번뇌 구렁텅이로 스스로 몰고 들어가 버려요. 그런데 아무리 그래봤자 우리가 지금 달라이라마가 처한 상황보다 더 괴로운 일을 겪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물론 괴로움은 다 주관적이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여기에 비견할 만한 괴로움을 겪어봤다고 생각하시는 분 있어요?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기도를 하고, 기도의 평화를 누리고, 그 봄날의 싱그러운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능력. 이게 바로 마음의 능력이에요. 사람들은 당신이 관음보살이라고 하면 ‘뭘 증명해 봐’, ‘날 고쳐봐.’ 중국군들이 그런 식으로 말했어요. ‘너네가 그렇게 수행이 높으면 총을 쏴도 안 죽을 거 아니야?’ 그런 식으로 모욕을 했어요. 그런데 인간은 전부 다 그런 이적을 바라는 마음이 있어요.


달라이라마=티벳
달라이라마의 이런 마음을 가진다면 지옥에 가도 평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겁니다. 티벳의 상황이 지옥 아니겠어요? 악몽이죠. 그런데 악몽 속에서도 삶이 있거든요. 근데 이런 걸 너무 간과하기 때문에 개인들은 조금만 어려움을 겪어도 바로 거기에 완전 빠져 버리고 봄이 와도 겨울이 와도 그걸 하나도 누리지 못해요. 이게 중생의 간장종지만 한 마음이거든요.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스물네 살의 청년이 이렇게 말해요. “중국군의 공격으로 희생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되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나는 철저한 종교 훈련이 내게 아무런 두려움 없이 현재의 몸을 떠날 수 있는 힘을 주었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단지 유한한 존재일 뿐이고 붓다의 불멸하는 영혼의 도구에 지나지 않으므로 외피가 소멸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그때 깨달은 겁니다.

티벳인들은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의 그 생활 방식이라는 무엇보다 귀중한 것을 대표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왕이나 절대적인 통치권자여서가 아니라 티벳인들의 존재 방식을 대변하는 화신이 달라이라마인 것입니다. 부모들이 죽도록 일해서 아낌없이 자식들 공부시키는 것은 자신들의 삶의 비전이 여기 있기 때문이잖아요. 티벳인들은 그 방식, 삶의 귀중한 모든 것을 달라이라마라는 존재에 투사하고 있었어요. 달라이라마는 그 그림자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 거죠. 만약 내 몸이 혹 중국인들의 손에 죽는다면 티벳의 생명도 끝나리라는 것을 알았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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