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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연암을만나다

[연암을만나다] 하늘 ‘천’天에 담기지 못한 하늘을 그려라

by 북드라망 2020. 5. 21.

하늘 ‘천’天에 담기지 못한 하늘을 그려라



연암의 글 중에는 ‘글쓰기’에 관한 글이 유독 많다. 자타가 공인하는 ‘명문장가’였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긴 하다. 헌데 그는 글쓰기 요령이라든지, 글쓰기 전략이라든지 하는 것들을 말하진 않는다. 비유와 상징, 원문의 예술적 배치까지 더해진 〈소단적치인〉을 예외로 두면 말이다. (물론 이 글은 차원이 다른 글쓰기 전술을 보여주고 있다.)




연암은 글이란 뜻을 그려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도 글을 쓸 때, 생각한 바를 드러내고, 마음에 들어온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무엇이, 어떤 지점이 나의 글과 연암의 글을 다르게 만드는 것일까?


마을의 어린애에게 『천자문』을 가르쳐주다가, 읽기를 싫어해서는 안 된다고 나무랐더니, 그 애가 하는 말이 “하늘을 보니 푸르고 푸른데, 하늘 ‘천’天이란 글자는 왜 푸르지 않습니까? 이 때문에 싫어하는 겁니다.” 하였고. 이 아이의 총명이 창힐로 하여금 기가 죽게 하는 것이 아니겠소.


- 박지원, 「창애에게 답함3」,『연암집(중)』, 돌베개, 379쪽)


이 아이, 엄청나다. 가끔 어린아이들의 말에 헉! 하며 놀랄 때가 있는데, 이번에도 뒤통수 한 대 제대로 맞은 기분이다. 이 아이가 보기에 하늘 ‘천’이라는 글자는 눈으로 보고 느낀 ‘진짜 하늘’과 완전 다른 것이었다. 이 글자에 ‘하늘’은 없었다. 이게 어찌 하늘뿐이었겠는가. 『천자문』 속의 땅도, 집도, 어느 것 하나 만물의 모습이 담긴 것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하늘을 그냥 ‘하늘’이라고 부른다. 그냥 그렇게 배웠다. 또 우리가 디디고 있는 것을 ‘땅’이라고 배운다. ‘땅’이라는 글자에는 만물을 키워내는 힘, 흙냄새, 드넓은 벌판, 바람이 불면 날리는 모래사막 등등 많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제는 도시의 아스팔트, 건물을 지탱해주는 땅까지. 이 모든 것을 떠올리진 않지만, 각자 상상하는 ‘땅’은 다르겠지만, 글자에 담기지 않은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이렇게 우리는 많은 것들이 지워진 표상화 된 언어로 서로 소통을 한다. 그렇게 사는 게 지금은 참 자연스럽다. 하지만 여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언어로 날려버린 소리, 감각, 다채로운 형상들이 한계를 증명한다.


그 한계를 깨뜨려주는 것이, 한계를 넘어서게 하는 것이 어쩌면 글 쓰는 자의 역할이라고 연암은 말하는 듯하다. 글자에 숨어있는 것들을 읽어내고 드러내어 표현하는 것. 그것이 곧 연암이 말하는 글쓰기다.


연암은 말한다. “우주 만물은 단지 문자나 글월로 표현되지 않은 문장”이라고. 단순히 글 소재가 널려있다는 말이 아니다. 우주 만물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광산에서 석탄을 캐듯, 적극적으로 캐내야 한다. 연암은 우주 만물에서 문장을 읽어내고, 그것을 썼던 사람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푸른 나무로 그늘진 뜰에 철따라 우는 새가 지저귀고 있기에, 부채를 들어 책상을 치며 마구 외치기를, “이게 바로 내가 말하는 ‘날아갔다 날아오는’ 글자요, ‘서로 울고 서로 화답하는’ 글월이다. 다섯 가지 채색을 문장文章이라 이른 진대 문장으로 이보다 더 훌륭한 것은 없다. 오늘 나는 참으로 글을 읽었다” 하였습니다.


- 박지원, 「경지에게 답함2」,『연암집(중)』, 돌베개, 366쪽


어쩐지 글을 쓰는 일이 어렵게 느껴진다. 보여 지는 것뿐 아니라 그 속의 이야기들을 읽어내야 한다니. 하지만 지금까지 논의된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보면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있다.




우리는 이미 ‘하늘’이라는 글자 안에서 수많은 ‘하늘’을 감각하고 있다. 우리가 느끼는 것들을 잘 펼쳐내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뭉뚱그려진 ‘하늘’이 아니라 다양한 빛깔이 담긴 ‘하늘’을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연암의 글쓰기는 우주 만물의 빛깔을 “읽어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의 글쓰기도 이곳에서부터 한 발짝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글_원자연(남산강학원 청년스페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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