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과 노는 역관
수능만큼이나 조선의 수많은 유생들은 과거에 매달렸나보다. 아니, 내 생각엔 유생들이 더 과했던 것 같다. 재수, 삼수가 아니라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한평생 과거에 매달린 사람들도 많았던 걸 보면 말이다. 거기다 어찌나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합격되기 위해 용을 썼던지 옆에 사람들 막대기로 찌르고 싸우기는 물론 온갖 비리가 속출했다고 한다. 그런데 웃기게도 그렇게 열렬히 매달리던 과거시험도 합격하고 나면, 공부한 것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과거 시험 문장이라는 게 따로 있었는데 문장을 화려하게 꾸미는 것이 주여서 다른 곳에 응용할 수 있는 글쓰기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런 세태에 대해 개탄하고 있던 어느 날, 연암의 옛 제자 ‘이군 홍재’라는 자가 찾아온다. ‘자소집(自笑集)’이라는 자기가 직접 쓴 문집을 하나 들고서 말이다. 자소집을 우리말로 풀면, 스스로 웃으면서 쓴 글 모음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얼마나 글 쓰는 게 재밌으면 저런 제목을 붙일 수 있을까 싶다.
그런데 이 문집을 본 연암 눈이 휘둥그레진다. 연암이 예전에 이군에게 글을 가르치긴 했으나, 대대로 역관 집안이었던 이군이 통역공부를 하고 역관이 되면서는 더 이상 글을 권하지 않았다. 연암도 ‘역관은 통역을 잘하는 것이 주 임무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지나쳤던 이군이 독특하고 해박한 시선을 담은 100여 편이 넘는 글을 써 온 것이다. 연암은 ‘옛날에 문장을 곧잘 배우던 녀석이니 취미로 쓴 걸 가져왔나?’싶었을 거다.
내가 처음에 의아해하며 “자신의 본업을 버리고 이런 쓸데없는 일에 종사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고 물었더니, 이군이 사과하기를, “이것이 바로 본업이며, 과연 쓸데가 있습니다. 대개 사대와 교린의 외교에 있어서는 글을 잘 짓고 장고에 익숙한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본원의 관리들이 밤낮으로 익히는 것은 모두 옛날의 문장이며, 글제를 주고 재주를 시험하는 것도 다 이것에서 취합니 다.”
박지원 지음, 「자소집서」, 『연암집(중)』, 돌베개, 36~37쪽
‘이게 대체 너에게 무슨 의미냐’고 의아하게 묻는 연암에게 이군은 되려 ‘외교에서 글과 장고에 익숙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없습니다!’라고 당연하다는 듯이 답한다. 외교란 국가 간의 관계를 다루는 일이다. 말 한마디, 한마디를 시의적절하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역관들에게 이를 위한 훈련으로 옛 문장을 익히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었다. 옛 문장과 장고 속에 담겨 있는 이치가 외교에서 맞닥뜨리는 상황과 통하는 면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역관들은 한 번 쓰고 버리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평생 내 몸에 익히기 위해 공부를 했다. 매일 매일 밤낮으로 익히고, 자체 시험까지 만들어 재주를 겨루면서 문장을 가지고 놀았다. 그리고 나는 이런 자발성을 볼 때마다 매번 놀랍다. 문장을 밤낮으로 공부하는 것은 과거제도와 비슷한데, 어떤 차이에서인지 이 공부가 이들에게는 하나의 놀이가 되고 있다는 점이 말이다.
글_남다영(남산강학원 청년스페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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