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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연암을만나다

학술제 ‘소경’에게 지팡이 쥐어주기

by 북드라망 2020. 6. 11.

학술제 ‘소경’에게 지팡이 쥐어주기

 


연구실에 오니 여행 할 일이 참 많아졌다. 평소 나는 여행을 할 때, 보통 무계획(?)으로 다녔다. 치밀하게 짜놓은 계획이 지역곳곳의 상황에 따라 무용지물이 되는 것을 몇 번 겪고 나니 계획은 ‘큰 얼개만 짜자!’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이후 가고 싶은 나라와 도시, 보고 싶은 것들 정도를 정해놓고 일단 떠났다. 여행을 하면서 만난 친구들의 고급정보(!)를 따라 일정을 바꾸기도 하고, 좋은 곳에 더 머물기도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함께 여행을 할 때는 이럴 수가 없었다. 공부한 친구들과 함께해서 좋기도 했지만, 빽빽하고 치밀한 일정으로 여행이 무거워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면서 ‘이 정도까지 짜야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여행을 할 때 함께 리듬을 맞추는 것, 그리고 일정을 짜는 것은 어느 정도로 해야 하는 걸까?


무릇 도道란 길과 같으니, 청컨대 길을 들어 비유해 보겠다. 동서남북 각처로 가는 나그네는 반드시 먼저 목적지까지 노정이 몇 리나 되고, 필요한 양식이 얼마나 되며, 거쳐 가는 정자·나무·역참·봉후烽堠의 거리와 차례를 자세히 물어 눈으로 보듯 훤히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 뒤에야 다리로 실지實地를 밟고 평소의 발걸음으로 평탄한 길을 가는 법이다. 먼저 분명히 알고 있었으므로, 바르지 못한 샛길로 달려가거나 엉뚱한 갈림길에서 방황하게 되지 않으며, 또 지름길로 가다가 가시덤불을 만날 위험이나 중도에 포기해 버릴 걱정도 없게 되는 것이다. 이는 지知와 행行이 겸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박지원, 「《위학지방도》발문」,『연암집(중)』, 돌베개, 106쪽)


생각보다 치밀하다. 목적지까지 거리, 시간, 중간에 쉴 곳, 필요한 음식의 양까지…! 훤~히 알고 있어야 한다고 연암은 말한다. 그런 뒤에야 이 땅에 발을 디디고, ‘평소의 발걸음’으로 걸어갈 수 있다고. 일상을 영위하듯이 낯선 길을 걸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길에만 적용되는 문제가 아니다. 배울 때에도, 일을 시작할 때에도, 활동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아무 준비 없이 시작하면, 먼저 마음이 급해지고, 발걸음이 빨라진다. 그러다보면 허둥지둥 거리다가 길을 잃고 사고를 치게 되기 마련이다.


이제 곧 학술제가 시작된다. 작게 축소해서 한다고 하지만, 예상인원 120명! 우리는 이렇게 큰 행사를 감당해 본 적 없는 ‘소경’들이다. 아니다. 했었다, 분명. 작년에는 어떻게 했었지?! 정말 매번 새롭다.^^ 우리는 전체 기획팀, 북파티팀, 주방팀으로 나뉘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내가 속한 ‘장자방낭자들’팀에서는 학술제 전체 기획을 맡았다. 공부를 하면서 지지고 볶고 고군분투하며 만난 책들, 그런 책들과 또 다른 만남을 주선하는 책다방! ‘책과 만나는 다양한 방법’이라는 컨셉으로 학인들이 책과 어떻게 재밌게 만나 놀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프로그램을 짜는 일들은 생각만으로도 즐거웠다. 우리가 신나서 짠 만큼 다른 사람들도 재밌게 놀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 스텝은? 이 즐거운 일을 재밌게 할 수 있도록 ‘보이지 않지만 자연스러운 동선’을 만드는 일이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공간도 생각하고, 움직임에 거리낌이 없게 프로그램들을 셋팅하고, 2층과 3층을 프로그램에 따라 이동할 수 있도록 시간적으로도 잘 배치해야 한다. 말로는 굉장히 쉬워보였지만, 머릿속으로 상상해보니 걸리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학술제 당일 우리가 체계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될 일이었다.


《위학지방도爲學之方圖》는 성리학을 공부하는 방법을 그림과 해설로 알기 쉽게 보여준 책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 책에 대한 발문을 연암이 쓴 것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할 때, 그 길을 잘 그려놓고 가게 되면 방황하지 않을 수 있다고 연암은 말한다. 중간에 위험이 찾아와도 여정대로 잘 따라가면 된다고 말이다.


여행길로 다시 돌아가 보자. ‘어느 정도로 준비를 해야 하는 걸까?’라는 질문. 어느 정도란 건 없었다. 그저 버스시간 등 세부일정을 하나하나 조사 한다기보다는 ‘평소의 발걸음으로 갈 수 있는 정도’로 준비하면 된다. (이정도도 생각보다 쉽진 않다;;) 무조건 다 세세히 정하는 것이 아니라 뭘 보러 가고 싶은지, 거길 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발걸음을 평소처럼 할 수 있도록 하면 되는 것이다. 스스로 어디로 갈지 명확히 알면, 갈림길에서 방황하지 않을 수 있고, 생각보다 멀고 힘든 여정이라며 중도에 포기하지 않을 수도 있다.


지금 준비하는 학술제에서도 마찬가지다. 잘~ 그려놓으면 중간 중간 생기는 우연적 사고들에 좀 더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된다. ‘평소의 발걸음’대로 덜 당황하면서! 이제 내일 모레로 다가왔다! “소경에게 지팡이가 있는 것”처럼 “밤에 등불이 걸린 것”처럼 학술제 당일을 구성해나갈 수 있기를! 우리 모두 무사히~


글_원자연(남산강학원 청년스페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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