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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연암을만나다

[연암을만나다] 생긴 대로 살자!

by 북드라망 2020. 5. 7.

생긴 대로 살자!


 

연암은 출세의 관점에서 보자면 재야의 선비였지만 문장으로는 유명인사였다. 정조가 연암의 문장을 알아보고 글을 쓰게 했을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역시 문장으로 명망 높던 선비 중, 연암에게 ‘글 피드백’을 부탁했다가 큰 원수를 지고 만 이가 있다. 이름은 유한준, 호는 창애(蒼厓)라는 이다. (그는 젊은 시절엔 연암과 친구였으나 결국 연암의 피드백을 수용하지 못하고 분기탱천하여 ‘연암의 징-한 원수’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유감스럽게도 창애의 글은 연암의 앞에만 가면 탈탈 털렸는데, 그 이유는 그가 자기 문장을 쓰지 않아서였다. 연암의 말에 따르면, 그의 글은 경전 인용이 너무 많고, 여기저기서 말을 떼어오니 ‘명칭’과 ‘실상’이 서로 따로 놀아 흡사 ‘나무를 지고 다니면서 소금 사라고 외치는 격’이라는 것이다.


연암은 이런 유한준에게 (화담 서경덕이 들려줬던) 한 소경의 이야기를 해준다. 그 소경은 20년 동안 앞을 못 보다가 갑자기 길 한가운데에서 눈이 뜨였는데, 비슷비슷하게 생긴 대문들과 온갖 갈림길이 보이기 시작하니 오히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였다. 그에 대한 연암(과 화담)의 해답은 ‘도로 눈을 감고 가시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소경이 다시 눈을 감으니 집을 잘 찾게 됐다는 것이 결론.




우리에게 이 이야기는 제법 유명한 이야기인데, 아마 ‘도끼’를 맞은 것 같다가도 빗맞은 것 같은 모호함 때문이 아닐까 한다. 다시 눈을 감으라고 말하는 그들의 지혜에 놀라면서도, ‘장님한테 그냥 장님으로 살라는 건가? 눈을 안 뜨는 게 낫다는 건가? 그럼 생긴 대로 살라는 말인가?’ 하는 의문들이 따라붙기 때문이다.


본분으로 돌아가 이를 지키는 것이 어찌 문장에 관한 일뿐이리오. 일체 오만 가지 것이 모두 다 그러하다오. (중략) 눈 뜬 소경이 길을 잃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색상色相이 뒤바뀌고(顚倒) 희비의 감정이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바로 망상妄想이라 하는 거지요. 지팡이로 더듬고 발길 가는 대로 걸어가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 분수를 지키는 전제詮諦(진정한 도리)요, 제집으로 돌아가는 증인證印(증득한 것을 인정함)이 되는 것이오. (박지원, 『연암집』(중), 「창애에게 답함 2」, 돌베개, p377)


연암은 오히려 눈을 감고 지팡이로 더듬어 가는 것이 분수를 지키는 것, 우리의 진정한 도리이고, 깨달은 행위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분수를 지키고 본분으로 돌아가라는 것은 정말로 장님한테 장님으로 살라는 것이고, 제발 ‘생긴 대로’ 살라는 것이다.


왜? 소경은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고, 코로 맡던 자신의 방식을 버리고 눈으로 보려고 하면 길을 잃기 때문이다. 아마 우리는 오히려 두 눈을 부릅뜬 채로, 우리 자신의 방식을 버린 채로 살고 있을 것이다. 이미 생긴 대로 살지 않고 있을 것이다. 이게 정말 내 욕망인가? 내 생각인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진부한 욕망과 생각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뻔한 말과 뻔한 행동을 반복하고 있지 않은가.


다시 유한준의 문장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좋은 말들과 경전의 문장들을 이리저리 엮는 걸로는 글이 되지 않는다고 연암은 말해주고 싶은 것이다. 아니 더 정확히는 자신이 본대로, 느낀대로 쓰지 않은 글은 아무 길도 내지 못하고 망상이 될 뿐이라고 일침을 놓는 것이다.


내가 나의 방식으로 감각하는 실상을 쓰는 대신 다른 말을 가져올 때 문장은 더 비루해지고, 빈약해진다. 다른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관계 맺고 싶은 욕망을 인정욕망으로, 잘 살고 싶은 욕망을 소비욕으로 (등등) 오해하고 왜곡할 때 삶은 비루해지고 빈약해진다. 눈을 도로 감고, 본분으로 돌아가는 길에 대해 사유하자. ‘일체 오만가지’ 방면으로!


글_이윤하 (남산강학원 청년스페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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