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난 연재 ▽/연암을만나다

[연암을만나다] 검지 않은 까마귀를 만나기

by 북드라망 2020. 6. 4.

검지 않은 까마귀를 만나기


 

연암은 무엇을 보아도 괴이하게 생각치 않는 자를 ‘달관’한 자라고 말한다. 세상의 천만 사물 앞에서 그것을 자기가 원래 알던 것과 비교하며 의심스러워한다면 속인이고, 사물 간의 차이를 담담히 보고 여유 있게 ‘응수’한다면 달관한 자다.




속인들은 해오라기에 비해 검은 까마귀가 불길하게 생겼다고 비웃고, 오리와 비교해 학의 긴 다리를 위태롭다고 느끼고, 옛 시를 닮지 않은 시를 기괴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그 말은 각자 잘 살고 있는 까마귀와 학, 이미 쓰여진 시에게는 어불성설이다. 그렇다, 우리가 종종 생각하듯 모든 존재는 다르게 태어났지만 ‘틀리게’ 태어난 적은 없다.


연암은 여기에서 한 번 더 나아가서 이렇게 묻는다. 까마귀는 정말 검은 색인가? 검은색은 어둡고 불길한 색인가?


까마귀가 과연 검기는 하지만, 누가 다시 이른바 푸른빛과 붉은빛이 그 검은 빛깔(色) 안에 들어 있는 빛(光)인 줄 알겠는가. 검은 것을 일러 ‘어둡다’ 하는 것은 비단 까마귀만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검은 빛깔이 무엇인지조차도 모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물은 검기 때문에 능히 비출 수가 있고, 옻칠은 검기 때문에 능히 거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빛깔이 있는 것치고 빛이 있지 않은 것이 없고, 형체(形)가 있는 것치고 맵시(態)가 있지 않은 것이 없다. (박지원, 『연암집』(하), 「능양시집서」, 돌베개, p62)​


검은 색의 대명사인 까마귀도 푸른빛이 돌 때가 있고 붉은빛이 돌 때가 있다. 검은 색은 가장 어두운 색이지만, 물이나 옻칠의 색일 때에는 다른 것들을 비추는 색이 된다. 한 가지 빛깔(色) 안에 수십 가지 빛이 있고, 한 가지 형체가 수백 가지 형태로 변주된다. 어떤 존재를 다른 존재와 ‘다르다’고 말하게 하는 ‘특징’도 고정된 게 아닌 것이다.


그것을 일상적으로 체득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 ‘또 그러네’라는 생각이 들면 마음이 닫혀버린다. 물론 그 사람이 ‘또 그랬’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 사람[形]의 여러 변용[態] 중 한 가지이고, 특정한 상황 위에서만 생겨나는 ‘특징’이다. 오히려 그것을 특징[色]으로 인식한다는 것이 내가 그 사람을 또 똑같은 방식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반증일 수 있다.


함께 세미나를 하던 친구들에게 마음이 꽉 막혀서 뚫리지 않던 때가 있었다. ‘공부를 안 해온다’, ‘재미없어 하면서 왜 이 세미나에 오는지 모르겠다’ 등등의 특징들을 그들에게서 반복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내가 별 다른 걸 해보지 못한 채로 세미나는 어찌저찌 마무리가 됐다. 답답한 상황을 더 이상 만나지 않아도 된다는 게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 인연을 내가 이 정도로 끝내버렸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도 생겼다.


상대에게 마음을 연다는 것은 그 사람이 매번 다르게 뿜고 있는 빛들을 하나하나 보고, 수많은 ‘맵시(態)’를 발견하겠다는 것이다. 내가 그런 열린 마음 위에 있었으면 분명 그들에게서 다른 빛과 맵시를 보았을 것이고, 그것을 보기 위해서 무언가 더 시도했을 것이고, 그만큼 즐거웠을 것이고, 그만큼 ‘관계’랄 게 생겼을 것이다.


‘또 그러네’라는 마음이 올라올 때, 반대로 나는 왜 ‘또 그렇게’ 보고 있는 건지, 적어도 상대의 다른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혹은 어떻게 변해야 하는 건지 생각해봐야 한다. 이 세상은 “천만 가지 괴기한” 존재들과 그들의 수만 가지 빛과 맵시들로 그득하고, 『능양시집』처럼 온갖 문체로 쓰인 시와 같다. 그러니 매일 똑같은 것만 보고 있을 틈이 어디 있겠는가!


글_이윤하 (남산강학원 청년스페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