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펜터즈 <Now & Then> - 아버지의 빽판, 나의 정규반
카펜터즈의 <Now & Then> 앨범이다.
어째서 단색 인쇄일까? 흑백도 아니고 보라/백색 1도 인쇄라니. 그러니까 이 음반은 청계천이나 황학동, 혹은 인천의 배다리 같은 곳에서 팔았던 일명 ‘빽판’이다. 그런데 이걸 ‘백판’이라고 쓰는 게 맞는지, ‘빽판’이라고 쓰는 게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백반’만은 아니다. ‘빽판’은 익숙한 말로 ‘해적판’이다. 저작권료를 지불하지 않고 불법으로 복제한 음반이라는 이야기다. 요즘이야 불법복제를 한다고 해도 디지털 음원을 디지털 음원으로 옮기는 것이니 마음만 먹으면 (이른바) ‘원본’의 품질을 고스란히 복제해 낼 수 있다. 그렇지만 LP의 경우는 이야기가 다르다. 음원을 양각된 금속판에 세기고(이걸 스템퍼stemper라고 부른다) 그 원판을 이용해 수지에 음골을 찍어내는 식이다. 그러니까 이 과정에선 필연적으로 물리적인 마모가 일어난다. 극한을 추구하는 마니아들이 몇번째로 찍어낸 음반인지까지 따지는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다. 그렇담 ‘빽판’은 어떤가? 이건 말하자면 ‘복제의 복제’다. 해외에서 들여온 음반을 이용하거나 라이센스 발매된 음반을 가지고 마스터를 만들고, 그 마스터판을 이용해 다시 음반을 찍어내는 식이다. 이 과정에서 음질이 훅 떨어져버리는 건 말할 것도 없다.
위의 사진에 있는 음반은 정식으로 발매된 똑같은 음반이다. 게다가 이건 미국제! 청명한 하늘에 뜬 뭉게구름, 그 아래로 누가 봐도 '미국집' 같은 집과 빨간 자동차, 차에 탄 사람이 누구인지도 확실히 알 수 있다(카렌 카펜터와 리처드 카펜터 남매다). 다른 그림찾기를 한번 해보자. 첫번째 빽판에는 있지만, 두번째 정규음반에는 없는 것이 있다. 다름 아니라, 왼쪽 상단에 찍힌 'SING'이라는 문구다. 이 앨범에서 첫번째로 싱글커트된 곡의 제목인데, 어째서 첫번째 음반에는 있고 두번째 음반에는 그게 없는 것일까?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빽판 제작 당시에 정규음반을 싸고 있던 비닐포장, 또는 마스터테이프로 삼은 음반의 재킷에 붙어있던 스티커까지 통째로 복사하면서 찍히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뿐이 아니다. 이 앨범(빽판)에는 또 한가지 미스터리한 점이 있다. 그건 잠시 후에…….
‘음반’은 ‘음악’을 듣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거기엔 ‘음악’ 이상의 것이 있다. 1도 인쇄된 빽판의 자켓을 보고 있자면, 차 안의 인물들이 ‘멀리’ 떠나는 듯 보인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그런데, 오리지널 판의 자켓의 인물들은 그저 드라이브를 떠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컬러에 따라 받는 느낌이 그렇게나 다르다. 나는 그렇게 느꼈지만, 다른 사람들은 달리 느낄 수도 있다. 어쨌든, ‘음반’은 거기에 담긴 음악 말고도 훨씬 다층적인 감정을 전달해 주는 매체인 것만은 분명하다. LP는 그 점이 극대화 된다. 일단 크고, 조심스럽게 만져야하고, 심지어 음악마저도 ‘마찰’을 통해 재생되는 매체다. 디지털 음원이 온 세상의 음악을 점령해버린 오늘날 음악이 가진 (다양한 것이 일관성 있게 완결되었다는 의미에서) 작품성이 현저히 떨어졌다는 느낌을 주는 건 아마도 그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턴테이블에 걸어 놓고 음악을 들어보면, 세상에, 구김살 하나 없는 맑고 고운 노래들의 향연이다. 이를테면 'Sing'의 가사 한구절을 보자. 'sing out loud. sing out strong. sing of good things not bad. sing of happy not sad.' 이렇다. 카렌 카펜터의 목소리도 그렇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미국이 (베트남 전쟁 중이긴 했지만) 한참 풍요로웠던 시절이었다는 걸 단박에 알 수 있다. 이런 음악과 이런 목소리가 담긴 LP는 당연하게도 정규음반의 재킷 속에 들어가 있어야 '착!' 들어맞는다. '명실상부'하달까? '안성맞춤'이랄까? 빽판이 그 자체로 (역사적, 문화적, 개인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규발매반만이 가질 수 있는 ‘완성도’도 넘사벽이다.
다음 사진도 한번 보자.
빽판의 뒷면이다. 가사가 빼곡하게, 역시 1도로 인쇄되어 있다. 이게 끝이다. 앞면, 뒷면, 속에 든 음반 한장, 끝. 그럼 정규음반은 어떨까?
3단으로 접혀져 있는 음반을 좍 펼치면 빨간 자동차가 과거 미국의 패밀리카의 상징과도 같았던 '왜건' 스타일의 자동차임을 알 수 있다. 집도 미드에서 보던 미국의 전형적인 교외 주택이다. 뒷면은?
뒷면엔 리처드-카렌 카펜터의 초상과 앨범 크레딧이 적혀 있다. 정말이지 풍요롭다. '정규'이자 '오리지널'과 빽판의 차이가 이렇게나 크다.
빽판은, 40여년 전에 아버지가 구입한 것이다. 정규음반은 내가 대학생이 되어서 산 것이다. 그러니까 아버지도 스무살 무렵에, 나도 스무살 무렵에 각자 카펜터스 앨범을 구입한 셈인데……. 나는 뭐라고 해야 할까, '선물'은 아니지만 아버지를 꽤나 의식하면서 샀다.(거금 삼만원!) 왜 그랬는가 하면, 마침 그때가 IMF 여파로 집이 망한 후 그나마 다시 좀 괜찮아지던 무렵이었는데, 아, 그렇다고 부자가 되었다는 것은 아니고, 신용카드 8개로 돌려막던 것이 2~3개로 돌려막을 정도가 되었다는 뜻이다. 여하간 그래서, 아버지는 그 몇년 사이에 눈에 띄게 나이가 들어버렸고, 움츠러들었고, 나는 그런 아버지가 영 싫어서 말도 잘 안 하고, 방구석에 틀어박히면 거실로도 잘 나오지 않고 그랬다. 그렇지만 그냥 단순히 '싫었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 새학기만 되면 내 등록금을 구하러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아버지니까.
그 무렵에 아주 짧은 기간 동안만 하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벤처 열풍에 편승한 선배가 차린 IT(비슷한) 회사였는데, 일당이 꽤 짭짤했다. 일한 값을 받아 두둑한 주머니를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으로 이대 앞이며 신촌을 쏘다니던 중이었는데, 마침 점포 정리를 하는 음반가게가 있었다. 집이 그렇게 어려운 와중에도 철없는 '대학생' 아들 놈은 거기서 눈이 뒤집혀 '일한 값'을 LP 서너장과 바꿔버렸다. 그 중에서도 (오늘의 음반인) 카펜터스 음반을 구입한 것은 꽤나 사치스러운 짓이었다. 집에, 비록 빽판이지만 판이 있는데, 똑같은 앨범을 더 사버린 꼴이니까. 사실, 한참 망설이기는 했다. 카펜터스 음반을 안 사고 3만원 더 보태어서 비틀즈 <화이트 앨범> LP를 사버릴까 싶기도 했으니까. 다만, 그러면 일당은 다 날아가고 차비만 남는다. 그때, 아버지 생각이 난 것이다. 젊을 때부터 2~300장 쯤 되는 LP들을 모았지만 빽판을 빼고 나면 멀쩡한 '정규음반'이라고는 몇장 있지도 않은 아버지의 음반 콜렉션이 떠오른 것이다. 그래서 그냥 샀다. 아버지랑 말도 잘 하지 않을 때였으니까, 딱히 선물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런 거 생각하지 않고 그냥 샀다.
아버지에게 '전달'하지도 않았다. 그저 아버지가 가끔 내 방에 들어와 둘러보다가 나가는 걸 알았으므로, 일부러 듣다가 나간 것처럼 판은 턴테이블에 걸어놓고, 앨범은 방바닥에 널부러뜨려 놓았을 뿐이다. 나중에 엄마에게 들으니 '이야 이놈이 이제 이런 것도 찾아서 듣나 보네' 하면서 내 방 오디오를 켜고, 집이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로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들었다고 했다. 엄마는 당연히 말렸다. "걔가 지 물건 만지는 거 얼마나 싫어하는데 알면 어쩔려고 그래!" 우리 아버지는 "아 고대로 바늘만 올렸다가 빼는데 지놈이 어떻게 알겠어!"라고 했고, 그런 소심한 태도가 조금 멋쩍으셨는지 "아니 지가 나 아니면 이런 걸 어떻게 알았겠어!"라고 답했다고 한다. 뭐, 당연히 나는 아버지가 들어왔다가 나간 것을 알고 있었다. 새로 산 앨범의 속종이 한쪽 귀퉁이가 심하게 접혀 있었고, 무엇보다 내가 나갈 때는 A-Side 쪽으로 얹혀져 있던 음반이 B-side로 돌아가 있었으니까. 에효, 허술한 아저씨 같으니라고…….
아, 그러고 보니 까먹을 뻔했다. '미스터리'.
빽판의 라벨이다. 놀랍게도 제작일이 '1967.5.17'이다. 이것만 보면 '이게 왜?'인가 싶겠지만, <Now & Then> 앨범은 1973년에 발매되었다. 빽판에 찍힌 제작일이 이렇다는 걸 나도 오늘에서야 알았다.
이게 내가 구매한 정품의 라벨이다. 라벨하단에 '1973 A&M Record Inc'라고 정확하게 기재되어 있다. 빽판에 적힌 대로하면 1967년에, 아마 녹음도 되지 않았을 앨범을 한국의 빽판 제작자가 어딘가에서 구해서(아마도 타임머신을 이용한 것일테지) 빽판을 제작했다는 이야기인데, 놀랍다. 아버지는 타임머신까지 동원된 앨범을 구입한 셈.(조금 썰렁한가……)
흐릿하고 엉성한 빽판과 말끔한 정규음반 두 장을 놓고 보니 아버지의 인생과 내 인생이 보인다. 학교라고는 제대로 다녀본 적도 없고, 소금물로만 끓인 국수라도 실컷 먹어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유년시절을 보낸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어른이 되어서 낳은 나는, 그 아버지가 학교를 보내주고, 용돈도 주고, 주말이면 나가서 고기도 먹여주고, 중학생이 되어서는 음악도 들으라며 방에 오디오도 놔주고, 카드 돌려막기를 하면서도 군대 갈 때를 빼곤 휴학 한번 없이 대학생활을 하게 해 주었다. 오래간만에 정규앨범 말고 빽판을 턴테이블에 올렸다. '지직 지직 지지직' 거리기는 하지만 들을 만했다. 점점 볼륨을 올렸더니, 그 허술했던 아버지가 떠오른다. 아마 B-Side의 경쾌한 곡들이 나올 때 어깨를 들썩거리셨겠지. '아빠, 선물이야' 할 걸 그랬나 싶긴 하지만, 스무 살 무렵을 떠올려보면 도저히 그럴수가 없었을 것 같다. 아쉽다. 그러다 문득, 아버지 'Da Doo Ron Ron'이 나올 때 엄마를 붙잡고 춤을 추려다가 면박만 당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웃긴다. 보고싶다.
sing out loud
sing out strong
sing of good things not bad
sing of happy not s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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