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된 용도가 없다는 것
어른들의 세계에서는 대부분의 물건이 용도가 정해져 있다. 가령 책이라면 읽거나 냄비 받침으로 쓰거나 정도다. 그러나 아이들의 세계에선 용도에 제한이 없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무한한 쓰임을 얻는다. 우리집에 꽤 오랫동안 있었지만 '그림 그리기'라는 용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사용하지 않았던, 색연필이 건축물의 소재가 되었다. 더 어릴 때는 혹시나 다칠까봐서 꺼내주지 않았던, 조금 뾰족한 색연필을 주었더니 그림은 안 그리고 탑을 쌓아 올린다. 매사가 이런 식이다. 책은 까꿍놀이용, 냄비는 머리에 쓰는 용도, 도미노 블럭은 바닥에 쏟는 용도.... 베르그송이나 들뢰즈가 순수생성이라는 개념을 창안할 때도 이 녀석들을 참고한게 틀림없지 싶다. 그리고 많은 부모들이 자신의 아이가 너무나도 창의적이라고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나는 이 무한한 용도들의 생성이 곧 끝나리라는 걸 안다. 이게 영원히 지속되는 게 아마 '천재'일텐데, 우리 딸이 천재일리는 없으니까. 벌써 기미가 보이기도 한다. 여하간 그 전까지, 이 폭발하는 생성에 내 몸을 맡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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