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약선생의 도서관] 『명상록』 - 나를 위해 쓰는 글!


여가, 자기를 만드는 시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글이란 걸 처음 쓰기 시작했던 마흔 즈음, 나는 대체 누구에게 글을 쓰고 있는 걸까, 라는 질문을 나름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다. 사실 변변한 블로그 하나 없던 나는 내 글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은 욕망 따위는 애당초 없었고, 설사 있었어도 에세이 발표장이 아니면 내 글을 읽어 줄 사람도 딱히 없었다. 


그런데도 고통스럽게 글을 쓰는 내 모습을 보면, 대체 누구에게 보이려고 이 괴로움을 감수하려는지 알쏭달쏭했던 것이다. 직장 스트레스도 감당 못하는 주제에 아무도 안 보는 글에 쏟아내는 그 무의미한 고통이라니, 한심한 노릇 아닌가. 그 여가에 잠이라도 실컷 자 놓지, 이런 참.


그 시간에 잠이라도 달게 자면 괴로움도 덜할텐데!



고민 끝에 나는 한 가지 묘안을 냈다. 당시 초등학생인 큰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빠가 한 학기에 하나씩 에세이라는 걸 쓰는데 말이야, 나중에 아빠 기일이 되면 가족들과 함께 한편씩 소리 내어 읽어주렴.” 난데없는 아빠의 요청에 영문을 모르는 아이는 대체 기일(忌日)이 뭐냐고 물었던 것 같다. 아무튼 현재의 독자를 확보하지 못한 나는 미래의 독자를 포섭해 두는 꼼수를 부린 것이다.


이렇게 독자를 확보하고 나니, 신기하게도 글을 쓰는 게 한결 수월해졌다. 미래의 기일에 모여들 내 글의 독자를 상상하며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독자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달라지는 걸 보면 글이란 요상한 물건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최근에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큰 아들에게 그 일을 물어보니,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믿을 녀석은 전혀 아니다.


그런데 이 고민을 무색하게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바로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그는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오로지 자기 자신이 읽기 위해 글을 썼다. 마르쿠스 스스로 자신의 비망록에 붙인 그리스어 제목도 ‘ta eis heauton’[각주:1]. ‘자기 자신에게’(To himself)라는 뜻이다.


푸코는 자기가 자기에게 글을 쓰는 이 기묘한 행위에 관심을 보이며, “자기 안으로의 은둔”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로 들기도 한다. 여기서 ‘은둔’(retreat)은 산속에 들어가 도를 닦는 것과는 하등 상관이 없다. 푸코에 따르면 은둔의 글쓰기는 글쓴이가 나중에 다시 읽어보고, 글에 담긴 일반 원칙들을 자기 자신의 삶에 실제로 되살리기 위해서 행하는 작업이다. 그것은 자기가 자기에게 가하는 작업(the work of oneself on oneself)이라고 할 수 있다.[각주:2]
 
언뜻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다. 어떻게 그리 한단 말인가? 마르쿠스는 근심이 생길 때면 항상 그동안 작업하며 새겨두었던 이 원칙들이 머리와 몸에서 감각적으로 떠오르기를 기대했다. 다시 말하면 내가 근심이나 위기에 빠지면 그 순간에 내가 썼던 글들(원칙들)이 솟아나서 나와 함께 그것들을 돌파해 나가기를 원했다.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하면, 예전에 써 놓았던, 예컨대 “고통을 당할 때마다 상기하라. (중략) 마음은 이성적인 한, 공동체적인 한, 고통으로 파괴될 수 없다.”[각주:3] 는 글을 떠올린다. 그리고 이 생각은 생각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신체가 진정 그렇게 느끼면서 그 언어들이 고통과 대면하여 함께 싸운다고 느낀다. 이 의미에서 내 몸에 받아들인 언어들은 일종의 장비들인 셈이다.


내가 위기에 빠지는 순간, 내가 썼던 언어들이 나의 장비가 된다!


그는 이런 재활성화가 순식간에 이루어지도록 그런 원칙들이 짧고 기본적이어야 한다는 말도 덧붙인다. “네 원칙들은, 그것들을 눈앞에 떠올리기만 해도 당장 네 근심을 모두 쫓아주고 네가 돌아가고 있는 것들에게로 아무 불만 없이 너를 보낼 수 있도록 짧고 기본적(short and elemental)이어야 한다.”[각주:4] 
 
마르쿠스는 이런 원칙들을 즉각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언제나 자기 자신을 응시하라(blepe se)고도 말한다.[각주:5] 그는 충동적인 움직임이 자신의 이성적이고 지성적인 움직임을 제압하려고 하면, 평소 자신을 응시하면서 마련해 놓은 원칙들이 순식간에 나타나서 그런 충동에 기만당하지 않도록 함께 싸워준다고 믿었다. 글은 이 순간을 위해 쓰인다. 궁극적으로 내가 아니라, 그 글들이 위기와 싸운다. 따라서 글쓰기란 사건들을 돌파하기 위해 준비하는 작업이다.


그렇다면 자신을 응시하고 언어를 통해 자신의 몸에 원칙이란 장비를 구축하는 것은 사활을 걸고 행해야 할 일이 된다. 이때 스승의 존재는 무척 중요하다. 선대의 황제인 하드리아누스는 어린 마르쿠스를 옛 카르타고 출신 수사학자인 프론토에게 글을 배우도록 하였다. 마르쿠스와 나이 차이는 스무 살 남짓. 그들은 서로 편지를 자주 주고받았는데, 독특하게도 마르쿠스는 그 편지에 자신의 하루 일과를 시시콜콜한 것까지 모두 써넣었다고 한다. “귀가하여 잠자기 위해 모로 돌아눕기 전에 나는 내가 한 일을 펼쳐 늘어놓으며 달콤한 스승에게 나의 하루를 보고한다.”[각주:6]
 
물론 여기에는 사랑에 가까운 정조가 흐르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마르쿠스가 프론토에게 보고했던 내용에 있다. ‘모로 누워 자기’, ‘목 가글하기’, ‘식사 내용’ 같은 건강과 양생술에 대한 내용들, 읽은 책(카토의 『농업론(De Agricultura)[각주:7])과 쓴 글, 어머니와 토론한 내용 같이 생활의 모든 것이 빠짐없이 서술된다. 마치 스승인 프론토와 함께 자기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이런 ‘편지 응시’를 통해서 나는 생활양식을 윤리적으로 끝없이 교정하게 되는 것이다. 응시는 스승과 함께여야 완결된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더 살펴봐야 할 게 있다. 편지 내용 중에는 농촌 실습이 길게 서술되어 있는데, 언뜻 보면 황제 수업으로는 적당치 않아 보인다. 귀한 여가(otium) 시간을 ‘포도수확’에 할애하는 것은 현대적 감각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 궁정생활과 황제수업에 스트레스가 심할 황제의 양자(마르쿠스는 하드리아누스의 다음 황제인 안토니누스의 양자였다)가 그런 육체노동에 여가를 쓰다니, 어딘가 이상하지 않은가. 나 같으면 여행이나 다니며 호기심을 충족하거나, 하다못해 늘어지게 잠이라도 잘 것 같은데 말이다.




은둔의 글쓰기가 의미하는 바가 뜻밖에도 여기에 숨어 있다. 로마의 여가 개념은 현대적인 여가와 매우 다르다. 마르쿠스에게 농촌실습은 두 가지 효과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포도수확은 마르쿠스로 하여금 땀을 흘리게 하고, 또 마음껏 외치게 해준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일종의 ‘양생술’인 것이다. 아울러 이 흔한 농부 생활을 통해서 가족관계, 주변 사람들과 자기와의 관계, 노예 등 아랫사람 돌보는 방식을 가장 단순한 형태에서 수행해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농부 생활을 통해 ‘작은 정치’를 경험하는 셈이다.


중요한 한 가지가 더 있다. 그것은 땀 흘리고 나서도 충분히 독서하고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 허용된다. 따라서 여가는 정신을 집중적으로 수련할 수 있는 장이기도 하다. 재활성화 할 삶의 일반 원칙들은 이 순간에 글로 쓰인다. 그러니까, 삶의 일반 원칙들이 언어라는 장비로 내 몸에 구축되는 시간인 것이다.


결국 여가는 통치 활동의 축소판이다. 일상은 일상을 못 보지만, 여가는 일상을 새롭게 보게 한다. 여가(otium)란 “타인과 함께하는 일종의 은거이지만, 이는 자기 자신을 위해, 자신을 보다 잘 형성하기 위해, 자기 자신에 대한 작업을 진척시키기 위해, 자기 자신에 도달하기 위해서 하는 은거 생활”이다.[각주:8] 즉 여가는 자기 자신을 돌보고, 자신을 새롭게 만들어 내는 데 보내는 시간인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고대 로마인의 감각을 다시 느낄 수 있다. 그들은 여가를 통해서 모든 단계의 통치를 통합하여 수련하는 노력을 한다. 그들에게 여가는 작은 세계를 구성하여 훈련하는 장이다. 그 훈련으로부터 자기를 돌보는 기술을 터득하고, 세상으로 다시 나아간다.


그것은 현대적 여행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들 시선으로 보면 현대인의 여행 개념은 일종의 낭비다. 자기를 충실하게 하는 여가가 아니라, 자기를 포기하는 여가다. 어쩌면 그들은 여행조차도 이런 고대적 여가로 재구성해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땀을 흘리고, 현실과 다름없이 관계를 맺으며, 글을 읽고 쓰는 여행이라야 여가라고 부를 듯싶다. 제대로 된 여행이라면 그 과정에 삶의 원칙들이 언어화되고 그것을 내 몸에 장착시키는 여행이어야 한다. 그런 구성이 아니라면 그들에게 그것은 탕진에 가깝다.


자기 자신에 도달하기 위한 여행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보면 황제 수업이라는 게 별게 아니다. 마르쿠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신을) 카이사르 황제로 착각하거나(Caesarified) 궁전 생활에 물들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러기가 쉽기에 하는 말이다. 따라서 늘 소박하고, 선하고, 순수하고, 진지하고, 가식 없고, 정의를 사랑하고, 신을 두려워하고, 자비롭고, 상냥하고, 맡은 바 의무에 대하여 용감한 사람이 되도록 하라. 철학이 너를 만들려고 했던 그런 사람으로 남도록 노력하라. 신들을 공경하고, 인간들을 구하라. 인생은 짧다. 지상에서의 삶의 유일한 결실은 경건한 성품과 공동체를 위한 행동이다.” [각주:9]


마르쿠스가 일러주는 황제의 행실은 보통 사람이더라도 일상에서 지켜야할 것들이다. 황제이기 때문에 윤리적이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지향하는 것은 황제 이전에 ‘철학이 만들려고 했던 그런 사람’이다. 즉, 그의 지향점은 황제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인 것이다. 따라서 철학이 가르치는 일을 해 나가면 황제의 임무도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다. 황제로서의 임무란 별게 아닌 거다. 궁극적으로는 보통사람도 자기 일을 진지하게 해 나가면 황제의 일도 당연히 잘해 낼 수 있게 된다. 결국 보통사람의 진리가 황제의 진리이다. 그는 너무나 범박하지만, 새삼 급진적인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 이르면 우리는 그들이 이야기하는 ‘여가’의 의미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된다. 내가 어떤 위계 속에서 삶을 영위하더라도, 그리고 어떤 복잡한 난관을 헤쳐 나가더라도, 가장 기본적인 관계를 훈련하고, 지성적으로 사건을 예비한다면 그 어떤 것도 돌파할 수 있다. 여가(otium)는 바로 그 기본적인 관계를 설정하고 지성적인 훈련을 수행하는 장이다. 따라서 여가는 나를 풀어 놓는 자유시간이 아니라, 자기를 수렴 하는 훈련시간이라고 해야 한다.


고대 로마인은 묘비에 “NF F NS NC”를 새긴다고 한다. ‘non fui, fui, non sum, non curo((I was not, I was, I am not, I don’t care.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존재했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이를 신경 쓰지 않는다)’라는 문장의 머리글자를 딴 것이다.[각주:10] 아마 죽음이란 본래의 무로 돌아간다는 말이리라. 기일이 뭐냐고 물었던 아이의 얼굴이 떠오른다.


나에 대한 응시는 미래의 독자인 이 아이와 함께 완결되는 것일지 모르겠다. 마르쿠스적인 글쓰기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글은 현재의 나에게는 현재의 고정된 자기가 실제의 자기라고 착각하지 않게 해주고, 미래의 독자에게는 그들 미래의 삶을 바꾸게 해준다. 내가 응시했던 것들이 되살아나서, 아이들과 함께 싸워주었으면 좋겠다. 어쩌면 그것이 시간을 넘어 나와 아이를 연결하는 소중한 길이 될 것이다.


글_약선생


명상록 - 10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지음, 천병희 옮김/도서출판 숲


  1. 로마사가 프리츠 하이켈하임은 라틴의 산문 문학이 그리스어로 쓰인 이유로 기존의 그리스어 어휘와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라틴어로 새로운 어휘와 개념을 만들어 사용하는 것보다 쉬었다는 점을 든다. 물론 라틴어를 너무 조야하고 자신들의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긴 그리스인들과 로마의 엘리트층의 태도에서 연유하기도 한다. [세드릭 A.요, 프리츠 하이켈하임 지음, 세드릭 A.요·앨런 M. 워드 개정, 『로마사』, 김덕수 옮김, 현대지성사, 1999, 303쪽] [본문으로]
  2. 미셸 푸코 지음, 『성의 역사 3』, 이혜숙·이영목 옮김, 나남출판, 2004, 70쪽 ; Michel Foucault, 『The Care of the Self-Volume 3 of The History of Sexuality』, translated from the French by Robert Hurley, Vintage Books, p. 51. [본문으로]
  3.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지음, 『명상록』, 천병희 옮김, 도서출판 숲, 2005, 123쪽 Ⅶ, 64. ; Marcus Aurelius, 『Loeb Classical Library - MARCUS AURELIUS』, Edited and Translated by C. R. Hains, Havard University Press, 1916, p. 191. Ⅶ, 64. ; Marcus Aurelius, 『Meditations』, Translated with notes by Martin Hammond, Penguin Books, 2006, p. 67~68. Ⅶ, 64. [본문으로]
  4.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지음, 같은 책, 53쪽 Ⅳ, 3. ; Marcus Aurelius, ibid.(Harvard), p. 69. Ⅳ, 3. ; Marcus Aurelius, ibid.(Penguin), p. 23. Ⅳ, 3. 펭귄 판에서는 ‘few and fundamental’로 번역하고 있다. 천병희 선생님은 ‘짧고 원초적’이라고 번역하셨다. [본문으로]
  5.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지음, 같은 책, 121쪽 Ⅶ 55. ; Marcus Aurelius, ibid.(Harvard), p. 187. Ⅶ 55. ; Marcus Aurelius, ibid.(Penguin), p. 66. Ⅶ 55. [본문으로]
  6. 미셸 푸코 지음, 『주체의 해석학』, 심세광 옮김, 동문선, 2007, 194쪽. [본문으로]
  7. 현존하는 최초의 라틴 산문이자 기원전 2세기에 로마의 삶과 경제사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귀종한 자료이다. [본문으로]
  8. 미셸 푸코, 같은 책, 197쪽. [본문으로]
  9.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지음, 같은 책, 97~98쪽. Ⅵ. 30. ; Marcus Aurelius, ibid.(Harvard), p. 187. Ⅵ. 30. ; Marcus Aurelius, ibid.(Penguin), p. 51. Ⅵ. 30. [본문으로]
  10. 모토무라 료지 지음, 『처음 읽는 로마사』, 이민희 옮김, 교유서가, 2015, 210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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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세븐 2016.03.08 15:53 답글 | 수정/삭제 | ADDR










    "마음은 이성적인 한 고통으로 파괴될 수 없다". 요즘 후배가 고통에 낙담해 있습니다. 큰 부상으로 골절된 뼈를 지지하는 철심을 박았다가 6개월 뒤 제거 수술을 받았는데 자기만 모른 채 제거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면...철심이 이미 살과 달라붙어 몸의 일부가 되면서 분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평생을 1 5센티 가까운 철심을 몸 안에 남겨진 채 생활해야 한다는 고민... 그래서 그 후배에게 약샘의 에세이와 함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선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역시 고통에 괴로워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쓰는 글이 아니라 남에게 보여주는 글에만 집착했던 것 같습니다. 저를 돌아보는 시간을 만들어준 글이었습니다.

    • 북드라망 2016.03.08 16:22 신고 수정/삭제

      큰일을 겪고 계시네요. 후배분께 <명상록>과 약샘의 이 에세이가 든든한 '장비'가 되기를 저도 바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약선생 2016.03.11 09:49 수정/삭제

      아, 무척 힘드시겠군요. 글이 그런 상황을 돌파하는 힘이 되기를 정말 기원하겠습니다. 다만, (세븐 선생님은 전혀 그러지 않으시지만, 다른분들이 혹시 오해하실수도 있다는 노파심에) 저는 감동적인 글귀에 관념적으로 젖어서 고통을 잊어버리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는 말씀도 드립니다. 장비로서의 언어는 감동으로 고통을 잊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대면하고 끊임없이 삶의 길을 만들어가도록 자신을 독려하는 것으로 작동합니다. 후배님도 저와 마르쿠스의 글을 통해 삶의 길을 뚫기를 바랍니다. 글 읽어 주셔서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 호연지기 2016.03.08 17:36 답글 | 수정/삭제 | ADDR

    생활양식을 윤리적으로 교정하기 위한 글쓰기라니! 저는 이런 실용적인 목적이 끌리나봅니다. 갑자기 글쓰기가 확~ 가깝네 느껴지네요^^

    • 북드라망 2016.03.09 10:32 신고 수정/삭제

      저도 글쓰기가 좀 더 가까워진 느낌이었지요^^

    • 약선생 2016.03.11 09:52 수정/삭제

      네^^ 글쓰기의 유일한 실용이 바로 '자기를 만드는 힘'으로 작동할때 나타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그것이 타자들을 움직이기도 합니다만. 아무튼 저는 그런 실용성에 대해 아주 관심이 큽니다. 제 글을 보고 글쓰기가 가깝게 느껴지셨다니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