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취의 기술
벤야민의 『일방통행로』
'약선생의 철학관' 프랜차이즈 1호, <약선생의 도서관>이 열렸습니다! 많이 기다리셨지요? 그간 연재를 쉬시며 함께 공부하는 벗들과 같이 읽은 책 혹은 어떤 이끌림으로 혼자 읽게 된 책들에 관해 이야기해주실 예정입니다. (아직 조금 남았지만) 병신년은 약선생님에게 있어 인성과 식상의 해! 약선생님의 인성(책)과 식상(글)이 저희 북드라망 블로그에서 맹활약할 것이니, 앞으로 많은 기대 바랍니다. :D
연말연시는 언제나 술자리로 넘친다. 어른이라면 누구든지 술이 주는 비(非)-일상을 찾아 서로 만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술 끊은 나도 이런 관성을 모두 거스르지 못하고, 몇몇 모임에는 참석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참 묘한 기분에 빠진다. 아마도 ‘취한다’라는 알 수 없는 사태 때문일 것이다. 평소 조용하던 사람도 술이 들어가면 정신을 감싸던 성을 허물고 엉뚱한 말을 해대며 몸을 가누지 못한다. 이 순간만큼은 술 취한 자들의 숨겨진 모습이 드러나는 묘한 시간일 것이다. 특히나 술 안 먹는 내가 보기엔 다른 세상에 온 듯도 하다.
물론 뇌에 들어간 알코올이 뉴런의 막을 녹여 세포들의 정보교환을 엉망으로 만든다는 설명쯤은 나도 들어 안다. 그러나 이 다른 세상을 그런 과학적 설명이 속 시원히 풀어주진 못한다. 오히려 그런 과학적인 설명이야 어찌되었든 이리 엉망이 된 세상이 있다는 점이 더욱 기묘한 것이다. 똑같은 사람들이 다른 배치를 만들어 내는 이 세상에 우리는 그저 익숙해져 있을 뿐,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진 않다. 견고한 성 속에 웅크리고 있던 숨은 세상이 벌어진 틈새로 연기처럼 흘러나오는 이런 일들을 말이다.
그러고 보면 현실세계의 다양한 경험들이 이런 진실들을 숨겨놓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단지 술이라는 물질을 통해서 그런 진실의 공간이 열린 것일 뿐, 언제나 이미 그런 모습으로 우리 곁에 숨어 있었을 것 같다.
벤야민은 이런 생각을 사물에까지 적용해 생각한다. 독일이 극도로 높은 인플레이션 상태에 빠졌던 시절, 그는 사물에서 온기가 빠져나간다고 생각했다. 가격 때문에 새 물건을 사지 못하고, 옛 물건을 고장 날 정도로 사용하게 된 것을 두고 이른 말이다. 사물들이 타락한 인간들에게 위험성을 알리려고 할 때, 온기는 빠져 나간다는 게 벤야민의 감각이다. 일상에 수공업자, 판매원들이 빈번하게 나타나는 이유도 바로 그런 물질상태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경험 속에는 언제나 이미 이런 진실이 숨겨져 있다. 일상의 모습을 깊이 관찰하면 이런 진실들이 연기처럼 새어나오는 것을 포착할 수 있다. 1
벤야민은 이런 진실의 공간을 제대로 보는 자들로 아이들을 지목한다. 아이들은 사물의 맨 얼굴을 어느 누구보다 잘 알아본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잘 모르는 교육학자들이나 심리학자들이 책이나 장난감을 만들어 아이들의 주의력을 빼앗으려 하지만, 벤야민이 보기엔 그런 노력은 오히려 케케묵은 일이다. 아이들을 심지어 폐기물을 가지고도 “어떤 새롭고 비약적인 관계(a new, intuitive relationship)” 속으로 그것들을 집어넣어 자신들을 위한, 자신들만의 작은 세계를 만들어 낼 줄 안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들의 세계는 항상 “공사현장” 2(벤야민은 이런 내용의 아포리즘에 이렇게 제목을 붙였다!)인 셈이다.
워쇼스키 남매가 만든 드라마, <센스8 (Sense8)>에는 아이 같은 어른들이 나온다. 주인공 8명은 모두 특별한 재능을 갖고 있다. 서로 다른 곳에서 살며 다른 문화와 언어를 가진 8명의 사람들이 텔레파시로 정신이 연결된다. 정신적으로 공간 이동을 하는데, 그들은 상대의 공간에서도 같은 감각을 가지고 행동 할 수 있다. 영국과 미국에 있는 주인공들이 각자의 자리에 있으면서 서로 키스하는 장면도 연출된다. 어느 한 편에서 이런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주인공이 하는 행동을 보면 전혀 엉뚱하게 보일 터이다. 어떤 한 사람이 위기에 빠질 때 다른 7명이 위기에 빠진 사람의 공간으로 이동하여 그 사람을 도와준다. 일종의 ‘8인 공동체’이다.
여기서 내 주목을 끈 것은 정신적으로 공간이동을 해서 같은 감각으로 그곳의 사건을 경험한다는 점이다. 워쇼스키 남매가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론 정보나 지식 저장고만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감각까지 전송된다는 것이다. 전자는 이미 이메일이나 클라우드 같은 형식으로 실현된 지 오래다. 그러나 그것으로 내가 미국에 있는 사건을 직접 경험하지는 못한다. TV 생방송 같은 작업을 통해서 이미 만들어 놓은 프레임으로 ‘시각’과 ‘청각’이 일정하게 해방된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능동적으로 경험하지는 못한다. 워쇼스키 남매가 제안하고 있는 이야기는 전혀 다르다. 우리들의 감각 자체가 전송되어 멀리 떨어진 공간을 능동적으로 체험하도록 한다. 이제 감각조차 우리들의 육체와 분리되어 전송되는 상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서두에 이야기한 술 취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감각을 다른 세계에 전송한 사람들이 아닌지 싶다. 그리고 그들은 벤야민이 말한 그 어린 아이들처럼 자신을 둘러싼 것들을 가지고 새롭고 비약적인 관계를 일시적으로 만들어 낼 줄 알게 된 것이 아닌지 싶다. 결국 따지고 보면 술 취한 자들은 사물들에게 온기를 되돌려주고 사물들의 새로운 세계에 자신의 감각을 맡긴 자들인 것이다. 이를테면 그들은 일시적인 초현실주의자이다.
벤야민의 『일방통행로』는 초현실주의적 모티브를 대상으로 써낸 글들이다. 그는 일상적인 사물들을 다르게 경험하길 원했다. 사실 그것은 초현실주의자들이 시도했던 것이기도 했다. 사회적으로 빈곤한 상태에 있는 것들, 초라하게 서 있는 건축물들, 검은 그을음으로 낡아버린 실내장식 그 자체는 노예화된 사물들이면서, 또한 다른 것들을 노예화하는 사물들이다. 그 자신도, 그것들을 바라보는 자도 빈곤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런 사물들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아주 다른 풍경이 나온다. 벤야민의 표현대로 그것은 “혁명적 니힐리즘”을 불러일으키는 풍경이다. 어떤 반전이 숨어 있는 것이다. 이런 풍경 속으로 들어가야만, 일상에 버티고 있는 답답하기 그지없는 ‘합리적 개인’을 극복할 수 있다. 이 의미에서 그가 중대하게 여긴 것이 바로 ‘도취(Rausch)’이다.
고대 사람들이 우주와 관계 맺는 방식은 이와는 달랐다. 그들은 어떤 도취의 상태(the ecstatic trance)에서 우주를 경험했던 것이다. 도취야말로 우리가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 그리고 가장 멀리 있는 것을 스스로에게 확신시킬 수 있는 경험인 것이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과 가장 멀리 있는 것은 항상 함께 확인된다. 그 중 하나가 없다면 다른 하나는 결코 확인되지 않는다. 이 말은 취함의 상태에서 우주와 소통하는 일은 반드시 공동체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발터 벤야민,「천문관 가는 길」, 『일방통행로』, 162~163쪽 [Walter Benjamin, ibid., p. 103]
"취함의 상태에서 우주와 소통하는 일은 반드시 공동체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진은 발터 벤야민)
벤야민이 보기에 고대인과 현대인을 가르는 중요한 특성은 우주적 경험에 자신을 맡기느냐 아니냐이다. 근대에 와서 천문학은 우주와 “시각적”으로만 연결될 뿐, 감각의 차원에서 온전히 연결되지 않게 되었다. ‘도취’라는 기술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도취는 가장 가까이 있는 사물 속으로 들어가 사물의 혁명성을 느끼게 해주는 기술이었고, 가장 멀리 있는 우주적 사건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확신하게 해주는 기술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그런 기술이 싹 사라지고, 기껏해야 술이나 마약 같은 것들만 남고 말았다.
중요한 것은 가까이 있는 것과 멀리 있는 것이 함께 확인된다는 사실이다. 어느 한쪽이 없으면 다른 쪽도 없다. 일상의 사건과 우주의 사건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일상의 사건이 없다면 우주의 사건도 없다. 결국 우주의 사건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일상의 사건에 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기술의 의미도 바뀐다. 기술은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 간의 관계를 지배한다. 기술은 도취의 상태에서 자연과 인간을 서로 연결토록 한다.
수잔 벅 모스(Susan Buck-Morss)는 벤야민의 이런 기술관을 두고 벤야민의 ‘자연(Nature)’을 두 가지로 나눈다. 첫 번째 자연은 수백만 년에 걸쳐 천천히 진화해온 자연-이 자연이 우리가 흔히 아는 그 자연이다-이며, 두 번째 자연인 우리의 자연은 산업혁명과 함께 시작되어 매일같이 얼굴을 바꾸는 자연이다. 아직도 ‘옛 자연’을 자연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에겐 지금 벌어지는 사태들이 낯설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 대상으로 구성되는 기술로서만 이해되기 때문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새 자연’에 맞는 기술일 것이다. 3
벤야민은 이렇게도 선언한다. 종으로서의 인간(Men as a species)은 끝났지만, 종으로서의 인류(Mankind as a species)는 이제 시작이라고 말이다. 어떤 기술을 통해 인류(Mankind)에게 새로운 신체(physis)가 조직되고 있다. 이 새로운 ‘신체’ 위에서 인류가 우주와 맺는 관계는 아주 새로운 단계로 진입한다. 따라서 그것은 개체인 인간이 가능한 단계가 아니다. 오로지 공동체로서의 인류가 함께 도취 4(Rausch[Ecstacy])로 연결될 때에야 가능한 일이다. 벤야민은 단언한다. 그것이 바로 프롤레타리아의 힘이라고 말이다. 따라서 벤야민이 말하는 도취는 함께 가는 길이다. 워쇼스키 남매도 말한다. “새떼나 물고기떼가 하나 되어 같이 움직이는 걸 봐봐.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생각해봐. 어떻게 사시나무가 수백 마일 멀리 떨어져서 자라는지. 또는 어떻게 버섯이 숲이 원하는 걸 알 수 있는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원초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단지 그런 기술이 억압되어 있었을 뿐. 5
어쩌면 프롤레타리아란 함께 취한 자들일지 모른다. 연대를 통해 답답한 일상의 합리성을 깨는 순간에야 도래하는 그런 공동체이다. 도무지 혼자서는 깨지 못하는 일상들이 함께하면 깨지고 바뀐다. 한 잔 술에 취하고, 한 남자, 한 여자에 취하기도 하겠지만, 벤야민의 정신으로 곰곰이 따져 보면 내 주위의 사물에 취하고, 내 옆의 동료들에게 취해야 한다. 돈벌이에만 취하지 말고 세계에 취해야 한다. 혼자 취하지 말고, 같이 취해야 한다. 비록 일들이 골수까지 밀어 닥친 상황이더라도, 물 한잔으로 함께 취해야 한다. 그것이 새 자연을 살아내는 기술이다.
글_약선생
- 발터 벤야민 지음, 『일방통행로 / 사유이미지』, 김영옥·윤미애·최성만 옮김, 도서출판 길, 2007, 89쪽[Walter Benjamin, 『One-Way Street and Other Writings』, Edmund Jephcott·Kingsley Shorter(Translators), NLB, 1979, p. 58] [본문으로]
- 발터 벤야민, 같은 책, 81쪽 [Walter Benjamin, ibid., p. 53] [본문으로]
- 수잔 벅 모스,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김정아 옮김, ㈜문학동네, 2004, 100쪽 [본문으로]
- 발터 벤야민, 같은 책, 164쪽 [Walter Benjamin, ibid., p. 104] [본문으로]
- 워쇼스키 남매, 「센스 8(Sense 8)」 시즌 1 에피소드 1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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