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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선생의 도서관] 가라타니 고진 - 코뮤니스트 칸트? 혁명적 칸트!

by 북드라망 2016. 4. 5.


레드 칸트, 에티카 맑스

가라타니 고진

『트랜스크리틱-칸트와 맑스』



1.
한국에서 잘 알려져 있고, 또 무척이나 많이 읽히고 있지만, 묘하게도 잘 인용하기를 꺼리는 현대 사상가들이 있다면 바로 일본 사상가들이다. 아마 그것은 한국인들이 일본 지식인을 대하는 태도, 그러니까 지성은 선진 서구의 명망 있는 지식인으로부터 이어받아야지, 일본 지식인 따위에게 배우냐는 심리에 기인할 것이다.


한번은 옛 연구실에 일단의 일본 지식인들이 찾아왔다. 국제 워크숍이었는데, 주제는 “인문학에서 현장이란 무엇인가”였다. 그때 참가한 젊은이들 중에는 요즘 한국에서 유명해진 긴 머리의 고쿠분 고이치로(國分功一郎)씨도 있었다(당시에는 살짝 히피족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는 몇몇 철학자로부터 ‘환대’ 개념을 끄집어내어 솜씨 좋게 설명해내고 있었다. 예쁘게(?) 생긴 친구가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라고 여겼던 나는 많이 놀라고 말았다. 내가 접하던 지식인들과는 다르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을 서구 지식인들과 대등한 선에 놓고 사유를 펼치고 있었다. 물론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그리 과장할 일도 아니지만, 그때의 놀라움은 큰 것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우리나라 인문지식의 많은 부분이 일본 지식인으로부터 획득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역시나 나도 다케우치 요시미(竹內好)로부터 루쉰(『루쉰』)을, 아사다 아키라(淺田彰)[각주:1]로부터 들뢰즈나 현대 사상가들의 요체(『도주론』)를, 나카자와 신이치(中沢新一)로부터 인류학(『대칭성 인류학』)을, 아즈마 히로키(東浩紀)로부터 루소와 데리다(『일반의지 2.0』, 『존재론적, 우편적』)를, 사토 요시우키(佐藤嘉幸)로부터 푸코, 들뢰즈 등 프랑스 철학자들(『권력과 저항』)을 익히게 되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책으로 다시 돌아온 고쿠분 고이치로(國分功一郎)에게서 들뢰즈(『들뢰즈 제대로 이해하기』)를 다시 읽을 수 있었다.    


특히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1941~ )의 문체는 나를 사로잡았다. 대부분의 한국 독자들이 그렇듯이 내가 처음 읽은 고진의 책은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이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그가 사상가라는 느낌을 갖지는 않았다. 그저 유명한 일본 문예평론가이며, 그가 정리한 서구 사상들이 꽤 깔끔하다는 느낌뿐이었다.


그러나 맑스에 대한 짧은 글(『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을 읽고 그가 무척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그 책의 연장선상에서 쓴 『트랜스크리틱』은 정교할 뿐 아니라, 대담하기까지 했다. 고진은 짧은 문장만으로 난해한 개념들을 풀어 갈 줄 알았다. 더군다나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것을 자기 사유로 진전시킬 줄도 알았다. 즉 서구의 개념을 사용하더라도, 그것들을 자신의 사유에 따라 재배치하고 있었다. 최근에 새 번역본으로 『트랜스크리틱』을 다시 읽고 그의 서구 사유에 대한 이해력과 배치 역량을 더욱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아는 한, 그는 자신의 힘으로 자신만의 철학 세계를 만들어 가는 유일한 동아시아인이 아닌가도 싶다.



2.

고진이 만든 ‘트랜스크리틱’(transcritique, トランスクリティ)이란 용어는 말 그대로 ‘트랜스’하게 ‘크리틱’한다는 뜻이다. 트랜스(trans-)를 ‘횡단’으로 새겨 억지로 번역해 본다면 ‘횡단비판’ 쯤 될 것이다.


고진이 횡단한 곳은 뜻밖에 칸트와 맑스. 이 책에서 고진은 칸트적 비판과 맑스적 비판 사이를 서로 횡단하며 코드변환(transcoding)을 시도하고 있다. 그는 칸트가 당대의 철학과 비판적으로 대결한 방식을 따라 맑스의 비판을 다시 읽는다. 또 맑스가 당대의 고전경제학을 비판적으로 돌파한 방식을 따라 칸트의 비판을 다시 읽는다. 고진은 비판과 비판을 교차하면서 자신의 새로운 비판을 직조해 낸다.


그러나 이건 통념과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독해다. 칸트는 언제나 ‘주관성의 철학’을 연 사람으로 '비난'받아 왔다. 내 안에 품고 있던 어떤 형식대로만 세상(대상)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보자면 칸트 철학은 확실히 ‘주관 중심주의’라고 해야 한다.[각주:2] 실제로 칸트의 ‘사물 자체’(Ding an Sich, ‘물자체’ 인식주관과 독립하여 존재하는 본질)라는 개념은 정통 맑스주의에서 비판의 표적이 되곤 했다. 특히 레닌은 그것을 단순한 불가지론(不可知論)에 불과하다면서, 과학적 인식의 발전을 무시한 헛소리라고 맹비난한다.[각주:3] 이런 상황에서 칸트를 맑스와 연결한다는 것은 여러 비판에 직면할 위험을 감수하는 일일 것이다.


칸트를 맑스와 연결한다는 것은 위험을 감수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고진은 생각이 달랐다. 그는 칸트의 ‘취미 판단’으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사람들에게는 다양한 취미가 있다. 그리고 그런 취미들에 대한 판단도 제각기다. 어떤 사람은 「시그널」이 흥미로웠다고 하는 반면, 또 어떤 사람은 「태양의 후예」가 더 낫다고 한다. 이런 취미 판단(Geschmacksurteil)에서 사람들을 강요하는 규칙이란 없다. 사람들의 심미안은 각자 다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사람들 사이에 ‘복수의 주관’(서로 다른 관점들)이 대두된다. 이 지점에 이르러 칸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공통감각’(Gemeinsinn)을 들고 나온다.  


그러나 그렇게만 하면 하나마나한 짓이 된다. 사람들이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질 뿐이라는 흄(David Hume)의 의견으로 회귀하고 마는 것이다. 타자와의 합의에 불과한 공통감각은 아무리 다수가 동의했더라도 보편성을 보증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공통감각이란 기껏해야 역사적으로 변해가는 사회적 관습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게 합의에 불과하다면 공간적 적용범위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공통감각은 역사적으로도 현재적으로도 복수적인 게 된다. 즉 시대마다 다르고, 지역마다 다르게 되어 공통감각이라고 해봐야 소용없게 되는 것이다. 만약 보편성이 존재한다면 그와 같은 다수의 공통 감각조차 넘어서는 것이어야만 한다.


공통감각이 필요한데, 이것조차 복수적이다?! 무언가 더 필요해 보인다. 마침내 이 문제는 『형이상학의 꿈에 의해 해명된 시령자의 꿈』(1766, 이하 『시령자의 꿈』)이란 칸트 자신의 분열적 분석에서 기묘한 형태로 다가온다. 이 책의 기묘한 문제의식이 공통감각의 딜레마를 해결하는 단초가 된다.


칸트는 1756년 리스본의 지진을 예언했던 시령자(視靈者, 영혼과 이야기를 나누는 예언자) 스베덴보리의 기적 능력에 관심을 갖는다. 칸트는 시령자의 영적 능력(초감성적인 것)을 인정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런 능력을 부정할 수도 없었다. 예언했던 지진은 실제로 발생했고, 돌이켜보면 확실한 증거도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칸트는 이상한 딜레마에 빠진다.


엠마누엘 스베덴보리(Emanuel Swedenborg : 1688-1772



그런데 그것은 이 지점에만 머무를 문제가 아니었다. 칸트가 보기에 그것은 시령자의 꿈에 한정되지 않았다. 자신이 지금까지 탐구하고 있던 ‘형이상학’도 동일한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형이상학도 스베덴보리의 기적처럼 아무런 경험에도 힘입지 않은 사념을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다루기 때문이다. 과학에서 보자면 조롱거리에 불과한 그 사념들을 형이상학은 실재처럼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스베덴보리의 영적 능력처럼.


그러나 칸트는 다시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도 ‘무언가를 생각하는 한에서’ 조롱거리에 불과한 이 형이상학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닌가? 무언가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언제나 이미 ‘형이상학적’이기 때문에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그것을 실재하는 것처럼 다루어야하는 난관에 봉착하는 것은 아닐까?


칸트는 어떤 분열적 문제에 마주치고 만다. 그는 스베덴보리 또는 형이상학을 긍정하는 동시에, 긍정하는 자신을 비웃는 서술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아포리아였다. 자신이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무언가 생각하기만 하면 헛소리에 가까운 형이상학(레닌이 ‘사물자체’를 헛소리라고 했던 것을 기억해보라!)으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러나 기묘하게도 바로 이것이 칸트의 참다운 사유가 된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이것은 이성이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서서 앎을 확장하는 것을 부정함과 동시에, 이성이 그와 같이 할 수밖에 없게 하는 ‘충동’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형태가 된다. 『시령자의 꿈』에서의 풍자적인 자기 비평은 『순수이성비판』에서 ‘이성에 의한 이성의 비판’이 된다. 칸트는 그것을 자기의 문제로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자연적 본성이 이성에게 부과한 문제’로서 다루고 있다. 그것이 ‘초월론적 비판’이다.

- 가라타니 고진 지음, 『트랜스크리틱-칸트와 맑스』, 이신철 옮김, 도서출판b, 2013, 76~77쪽.


고진의 분석대로 칸트는 자신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지성의 입장에서만 인간지성을 고찰해 왔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 한다. 그것은 기껏해야 공통감각이라는 형태로만 나타났었다. 그런 한계를 벗어나려면, 이성을 넘어서야 했다. 즉, 공통감각의 한계를 벗어나려면 일반적인 자신의 이성, 그 자체를 넘어서야만 하는 것이다. “지금 나는 자신을 자신의 것이 아닌 외적인 이성의 위치에서, 자신의 판단을 그것의 가장 은밀한 동기와 함께 타인의 시점에서 고찰한다. 이 두 고찰의 비교는 확실히 강한 시차를 낳기는 하지만, 그것은 광학적 기만을 피해 개념들을 그것들이 인간성의 인식 능력에 관해 서 있는 참된 위치에 두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기도 하다.”(칸트의 『시령자의 꿈』)[각주:4]


여기서 칸트가 말하는 ‘타인의 시점’은 “다른 사람 입장에서 보라”고만 하는 흔해빠진 시점이 아니다. 그 정도라면 여전히 ‘공통감각’ 정도로 회귀하고 만다. 칸트의 그것은 ‘강한 시차’(parallax)를 느끼게 하는 완전히 다른 타자, 우리들의 공통감각조차 완전히 넘어서고, 우리가 품고 있는 이성조차 완전히 넘어서서 있는 자, ‘참다운 타자’를 만나는 일이다.


"지금 나는 자신을 타인의 시점에서 고찰한다."


이 지점에서 고진의 해결책은 놀라운 반전이다. 고진은 바로 그 타자가 인식주관과 독립된 ‘사물 자체’라는 개념으로 도입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동안 비과학적인 헛소리라고 비난받아 왔던 그 개념, ‘사물 자체’가 초월론적 비판을 통해서 이성이 스스로 넘어서야 만날 수 있는 ‘타자’였던 것이다. 그것은 내가 현실적으로 만나는 그런 타자가 아니다. 어쩌면 미래의 존재일지도 모를 그런 타자인 것이다. 코뮤니스트 칸트, 레드 칸트는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3.
칸트의 이런 문제의식은 놀랍게도 맑스의 정치경제학과 함께 더욱 강렬하게 드러난다. 고진이 맑스의 『자본론』을 가지고 ‘타자’를 만나는 장면은 마치 추리소설과도 같아서 흥미진진하기 그지없다.


맑스가 영국에서 부딪친 문제는 ‘공황’(crisis)이었다. 고전 경제학에 있어 공황은 원리적으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저 실수이자 사고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된다. 아마 화폐를 매매의 매개물에 불과한 것으로 과소평가하면서 생긴 문제일 것이다. 매개물에 불과한 것 때문에 시스템에 문제가 생기기야 하겠는가.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자. 자본이란 자기 증식하는 ‘화폐’라고 해야 한다. 그것을 나타내는 맑스의 정식은 바로 G-W-G′(화폐-상품-화폐)[각주:5]. 이 정식에서 보자면 물건을 싸게 사서 더 비싸게 팔아 더 많은 화폐를 확보하는 것, 그것이 자본이다. 이 정식은 맑스가 말하길 ‘대홍수 이전부터 있는’ 자본의 형태다. 흔한 수전노의 대금업이 그것일 것이다.


돈(G)으로-물건(W)을 사서-더 비싼 돈(G')을 받고 판다. 물건은 무엇이든 상관 없다.


그러나 이 정식이 상업자본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산업자본에도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정식을 산업자본에 맞게 고쳐보면 G-(Pm+A)-G′[화폐-(생산수단+노동력)-화폐][각주:6]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지점을 골똘히 들여다봐야 한다. 산업자본의 순환은 상인자본의 순환에서 W(상품)가 생산수단(Pm)과 노동력(A)으로 바뀌었을 뿐, 결코 다르지 않다. 고전 경제학이 대금업에 불과하다던 상인자본으로부터 산업자본으로의 전화는 형식적으로는 G-W-G′로부터 G-(Pm+A)-G′로의 변형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정식의 변환에서도 보다시피, 생산수단(Pm)과 노동자(A)의 분리가 필요하다. 그러니까, 노동력의 상품화가 발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노동력을 파는 사람이 있고, 또 사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 서면 G-W-G′가 G-W와 W-G′라는 두 개의 유통과정으로 나뉜다는 사실이 무척 중요하게 다가온다. 가라타니 고진은 맑스가 몰입한 ‘강한 시차’가 바로 여기서 발생한다고 보았다.


우선 노동자 입장에서 보자. 노동자는 G-W(여기서 W는 Pm+A이다)라는 유통과정을 통해 노동력을 팔아 생계를 유지할 돈을 마련한다. 그런데 그 다음 과정인 W-G′(여기서도 W는 Pm+A이다)를 보면 알듯이 노동자는 자신이 만든 것을 노동자 자신이 되산다(!). G를 가지고 노동자 자신이 만든 상품을 노동자는 G′로 되산다. 자본가에게 되돌아갈 G와 G′의 차이인 잉여가치는 이렇게 생긴다. 그것은 노동자가 만든 것을 자신이 되사는 것에서 발생하는 차액인 것이다. 개별 노동자 위치에서 전체 과정을 인지하지 못할 뿐, 총체적으로 보면 노동자는 자신이 만든 것을 되사고 있다.


이제 이 장면을 자본가 입장에서 다시 보자. 자본가는 G-W라는 유통과정을 통해 생산수단과 노동력을 나누어 구매한다. 자본가는 이것을 가지고 상품을 생산해낸다. 그러나 자본가의 생존은 그 다음에 달려 있다. 상품이 팔려야 하는 것이다. W-G′[=상품의 판매]가 실현될지는, 그러니까 상품이 팔릴지 아닐지는 맑스의 표현대로 ‘목숨을 건 도약’이다. 아무도 그것을 보장해 주진 않는다. 우리 주변에 사업가들이 노심초사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더군다나 자본은 상품이 팔린 것으로 간주하고 운동을 계속한다. 무슨 말이냐 하면, 사업가들은 나중에 물건이 팔릴 것을 가정하고 일단 미리 대출을 받아서 회사를 운영한다. 순환식 G-W-G′가 중단 없이 진행되도록, 자본가와 노동자에게 대출을 해주고 일시적으로 현금이 부족한 상황을 메꾸어준다. 미래에 상품이 팔릴 것을 가정하여(즉, 상품이 팔린 것으로 간주하고!) 자본가를 채권-채무 관계에 들어서게 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신용’(Credit)이다. 자본이 신용에 잡히고 말았다!


이 순간 팔릴지 어떨지 모르는 ‘위기’(자본가에게는 분명히 위기다)는 결제(현금수수)될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르는 ‘위기’로 바뀐다. 상품 판매에 대한 위기가 대출 상환에 대한 위기로 돌변하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공황이 과잉 생산이나 소비 부족 때문에 생긴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뜯어보면 공황은 팔린 것으로 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팔릴 것으로 간주하여 대출했으니까!) 나중에 결제되지 않음으로써 발생한다. 보다시피 공황은 판매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신용 과열의 결과다.




고진은 이 과정을 칸트의 시각으로 전환해서 살펴본다. 고진의 놀라운 점은 여기에 있다. 칸트식으로 표현해 보면 신용은 일종의 ‘초월론적 가상’이다. 따라서 공황은 ‘초월론적 비판’이다. 왜냐하면 공황이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자기 확장하고자 하는 자본(=이성)에 대한 비판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공황(crisis)은 자본의 투기적(speculative)인 확장을 비판(criticize)하면서 출현한다. 마치 칸트에게서 이성을 넘어서서, 이성을 비판하면서 사물 자체라는 타자가 나타난 것처럼 말이다.


결국 과학적 인식과 순환(자본의 운동)에서조차 ‘믿음’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뜻밖에도 초월론적 가상으로서의 신용이었던 것. 그것은 믿음이다. 그러나 그 믿음 체계가 흔들릴 때, 공황은 그 틈을 비집고 출현한다. 타자가 불쑥 나타나 우리집의 대문을 두드리듯이 말이다.


하지만 놀라운 반전은 여기서 일어난다. 노동자는 뜻밖에도 이 지점에서 반전의 기회를 얻는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자본가는 W-G′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목숨을 건 도약’을 감행해야 했다. 그런 입장에서 보면 “팔리지 않는 상품은, 키르케고르가 말하듯이, 타자에게서 그 근거를 부여받지 못하고서 ‘절망적으로 자기 자신이고자 하는 형태’, 즉 ‘죽음에 이르는 병’에 놓여 있다.”[각주:7] 상품이 팔리지 않을 때 자본은 무너진다. 이를테면 공황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그런데 노동자가 자신이 만든 것을 되사야만, 자본가는 잉여가치를 획득할 수 있다. 그러나 소비자인 노동자가 조직적으로 그것을 되사지 않고, 선별적으로만 구매한다면 자본가가 아무리 잉여가치를 획득하려고 하더라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잉여가치의 실현이 봉쇄되고 마는 것이다.


이 순간 자본은 ‘공황’이라는 초월론적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뒤집어 말하면 이것은 소비자로서의 노동자가 자본가의 안정성을 쥐락펴락하는 위치에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가라타니 고진에게 혁명은 소비자 노동자들의 연합에 의해서 유통과정에서 일어난다. 자본가에게 소비자 노동자는 ‘타자’인 것이다. 그들은 노동자들을 타자로서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 순간 노동자는 바로 자본가의 인식 주관 밖에 있는 ‘사물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맑스는 정치경제학의 경로를 따라 의식하고 있지는 않지만 칸트의 그 타자, 즉 사물 자체를 만나고 있었다. 칸트는 맑스에게 와서 코뮤니스트로서 완성된다. 맑스는 칸트를 경유하면서 비로소 그의 윤리적인 면모가 명확해진다.


 * * *


안토니오 네그리가 주체성의 가능성을 생산의 단계에 위치시켰던 것에 반해, 가라타니 고진은 노동자를 소비로 재배치시킴으로써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물론 지나치게 소비과정의 중요성을 과장하여 노동자를 소비자로만 추정할 위험이 있는 이론이긴 하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역설적으로 소비자로서의 노동자를 긍정함으로써 상품관계를 단지 세계적 규모로 확장하기를 재촉할 위험마저 상존한다.[각주:8]


그러나 고진의 사유 전개는 놀라운 점이 있다. 고진은 맑스가 말했던 “그들은 의식하고 있지 않지만 그렇게 행한다.”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또한 작품의 사상은 작가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다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런 사상을 가진 ‘작자’를 끊임없이 만들어 낸다고도 말한다. 작가가 작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작품’이 수많은 ‘작가’를 생성한다는 말이다.


부르주아 철학자라는 기존 통념을 뒤집고 칸트는 공산주의자 칸트로 바뀌었다. 실로 ‘레드 칸트’(Red Kant)라고 부를 만하다. 맑스는 정치경제학적으로만 조명 받았던 기존 시선에서 벗어나 수면 아래에 잠겨 있던 타자의 윤리론자로 떠오른다. 이를테면 에티카 맑스(Ethica Marx)이다. 고진은 맑스와 칸트가 “의식하고 있지 않지만 행하고 있는” 것들을 실로 절묘하게 잡아냈다. 우리가 고진에게 배워야 한다면 숨어 있는 체계를 잡아내는 바로 이런 역량이다. 대상을 탈바꿈해내는 마법 같은 철학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글_약선생(강민혁)



트랜스크리틱 - 10점
가라타니 고진 지음, 이신철 옮김/비(도서출판b)


  1. 각주 1) 가라타니 고진, 나이토 유지 등과 함께 생산 협동조합인 히효쿠칸사라는 출판사를 운영하기도 한다. 고진의 『트랜스크리틱』은 2001년 여름 이 출판사에서 최초로 출판되었다. [본문으로]
  2. 각주 2) “칸트는 ‘사물자체’, ‘현상’, ‘가상’ 세 가지를 구별햇다. 칸트는 물(物)이 외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긍정하는 유물론자이다. 다만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사물자체가 아니라 주관적인 구성에 근거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이 경우 현상이란 사실상 과학적 인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현상은 가상이 아니다.”[가라타니 고진 지음, 『철학의 기원』,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2015, 166~167쪽.(물자체는 사물자체로 수정)] [본문으로]
  3. 각주 3) “현상과 사물자체 사이의 신비하고 현학적이고 교묘하게 그려놓은 모든 차이점은 모두 철학적 헛소리이다. 현실에서 우리들은 ‘사물자체’의 현상으로의, 즉 ‘우리에 대한 사물’(ding für uns, 인식 가능한 현상)로의 간단명료한 전화를 수없이 보아왔다. 이러한 전화가 바로 인식이다.” [V.I. 레닌 지음,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정광희 옮김, 아침, 1988, 125쪽.(용어들은 인용자가 수정)] [본문으로]
  4. 각주 4) 가라타니 고진 지음, 같은 책, 77쪽. [본문으로]
  5. 각주 5) G = Geld(화폐), W = Ware(상품). [본문으로]
  6. 각주 6) Pm = Produktionsmittel(생산수단), A = Arbeitskraft(노동력) [본문으로]
  7. 각주 7) 가라타니 고진 지음, 같은 책, 294쪽. [본문으로]
  8. 각주 8) 인디고 연구소(InK) 기획, 「마르크스주의적 시차」(해리 하루투니안), 『가능성의 중심-가라타니 고진 인터뷰』, 2015, 241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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