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는 창조다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
나는 푸코와 들뢰즈, 그리고 사르트르가 데모에 나섰다가 우연히 함께 찍힌 사진을 좋아한다. 그 사진에서는 들뢰즈가 푸코를 바라보고 있고, 사르트르가 뒤에서 그런 그들을 조용히 바라보는 순간이 절묘하게 잡혀 있다. 이 사진을 볼 때마다 나는 푸코나 들뢰즈 보다, 사르트르에게 더 눈길이 가게 된다. 이들 젊은 세대에게 수모를 당한 사르트르의 처지가 저 알 수 없는 시선에 묻어나 보여서다.
미셸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맑스주의가 얼마간 파문을 일으킬지는 모르겠으나 기껏해야 ‘찻잔 속의 폭풍’(tempêtes qu'au bassin des enfants, ‘아이 세숫대야의 폭풍’)에 불과할거라고 좀 세게 조롱했었다. 맑스주의가 서양의 인식론적 배치(disposition)를 어지럽힐 의도도, 힘도 전혀 없다는 게 그 이유이다. 1
'맑스주의는 기껏해야 ‘찻잔 속의 폭풍’에 불과하다'
이런 조롱들은 사르트르를 무척이나 자극했다. 심지어 어떤 인터뷰에서 푸코는 사르트르의 주저인 『변증법적 이성비판』(Critique de la raison dialectique)을 정확하게 조준하여 ‘20세기를 사유하려는 19세기 인간의 놀랍고도 눈물겨운 노력’이라고 가혹하게 조롱하기도 한다. 이즈음 사르트르는 푸코에게 망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2
그러나 사르트르는 현대 사상계에 그림자를 짙게 드리운 사유의 거인이다. 돌이켜보면 초기 푸코는 언제나 사르트르를 의식하며 자신의 사유를 전개했고, 들뢰즈도, 바디우도 젊은 시절을 모두 사르트르주의자로서 출발했다. 젊은 바디우는 너무 사르트르 흉내를 낸다는 지적을 받을 정도로 열렬한 사르르트 추종자였다. 말하자면 현대철학에서 사르트르란 은폐된 기원과도 같다.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 그는 약간 비만형에 키 157cm인 다소 추남형의 남자였다. 심지어 얼굴에 마마자국이 있는데다 사팔뜨기이기까지 했다. 미국 영화감독 존 휴스톤은 그를 두고 나무통처럼 생겨서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추하게 생겼다고 표현했다. 지금 사진으로 봐도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3
그럼에도 사르트르는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하긴 좋아하는 샹송 가수나 배우를 쫓아다니며 성심성의껏 가사나 희곡을 썼고, 심지어 여자를 유혹하기 위해 소설과 철학서를 쓴다고 까놓고 말한 걸 보면, 여성과 사귀기 위해 남모르는 노력도 제법 했을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다들 잘 알다시피 무척 미인이었던 페미니스트 지식인 시몬 드 보부아르와 연인이었으며, 그 외에도 그의 연애편력은 대단했다. 물론 그에 뒤질세라 시몬 드 보부아르도 다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4
보부아르와 사르트르
하지만 그가 연애관에서만 그렇게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다. 그는 뼛속 깊이 자유주의자였다. 자기 자신을 ‘장상테르’(Jean-sans-Terre, 가진 땅이 전혀 없는 장)라고 부를 정도로 평생 물적 소유를 거부하며 살았다. 그는 평생을 조그만 호텔 꼭대기 층에 방을 빌려 살았으며(시몬 드 보부아르도 같은 층에 다른 방을 빌려 살았다!), 죽는 순간에는 자기 책마저 소유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그만 소유마저 구속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죽음을 앞둔 순간에도 그는 “나는 살면서 그랬듯이 죽을 때도 자유를 깊이 느끼며 죽을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5
사르트르의 자유는 경찰서 앞에 구호처럼 붙어 있는 ‘자유민주주의 수호’가 말하는 그 흔한 자유가 아니다. 그것은 통상적으로 법에 명시된 그런 자유, 그러니까 사람이 어떤 권리가 있기 때문에 얻게 되는 그런 자유가 아니다. 그의 논리를 쫒아가다 보면 거꾸로 법 이전에 우리 자신 자체가 본래적으로 자유여야 할 것으로 느껴진다. 뭔가 쟁취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인간 존재 자체가 본래적으로 자유가 아니라면 삶 자체가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그런 것이다.
특히 그에게 글쓰기는 그런 자유를 드러내는 매우 중대한 행위였다. 이 문제는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익히 들어본 이른바 ‘참여문학’이라는 주제와도 긴밀하게 연결된다. 나는 80년대 끄트머리에 대학에 들어갔기 때문에 젊은 시절 이 단어를 수도 없이 들었다. 그러나 내게 이 문제는 온통 극사실주의적인 이미지로 가득하다. 내 통념에 따르면 참여문학은 뭔가 고통 속에 있는 인민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애환과 괴로움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울분에 찬 교훈으로 마무리하는 글인 것이다. 아마 시인 고은 표현대로 ‘먹물잽이 조동아리’에서 나온 헛소리를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인 게 틀림없다.
마치 '운동권'이라고 하면 이런 이미지가 떠올리듯이 말이다.
그러나 정작 ‘참여문학’론을 처음 제기했던 사르트르가 그런 통념을 비판했다는 걸 알고 신선한 느낌이 들었다. 사르트르는 1945년 10월에 간행된 「현대」 6(Les Temps modernes)지(誌)에 자신이 쓴 창간사에서 문학의 참여 기능을 강조하면서 생긴 논란을 자신이 재정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쓴 책이 『문학이란 무엇인가』. 그는 자유와 참여문학에 대해 아주 강렬한 문체로 서술해 나간다.
먼저 시와 산문의 차이에 주목한다. 사르트르에게 시와 산문은 전혀 다르다. 시는 말(les mots)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말을 ‘섬긴다’. 시인들은 말을 기호(signes)가 아니라 사물(choses)로 대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연 사물들과 다름없이 말이라는 사물들을 더듬고 만져보고서 그것들을 시로 끄집어낸다. 마치 화가가 색들을 조합하듯이 시인은 ‘사물로서의 낱말들’ 7(les mots-choses)을 서로 뭉쳐서 ‘사물로서의 문장’(la phrase-objet)이라는 시적 단위를 구성해낸다. 이 의미에서 보면, 시인은 말들을 조립하는 ‘말의 기계공’이다. 8
그러나 산문은 본질적으로 실용적(utilitaire)이다. 그러니까, 산문가들은 말을 사용한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그것은 여섯째 손가락이며 셋째 다리, 그리고 우리들의 껍질이며 촉각이다. 이를테면 산문으로서의 말은 행동의 어떤 특수한 계기인 것이다. 시에서 말이 초월적인 것이라면 9(이때의 말은 우리들 밖에 서서 그 자체 사물로서 더듬을 수 있는 것이었다), 산문에서 말은 도구로서 행위적이다(이때의 말은 우리들과 연결되어 사용되는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다). 즉, 여기서 말한다는 것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첫 질문에 대해, “나는 상황(situation)을 바꾸기 위하여 나 자신과 남들에게 상황을 드러낸다(dévoiler).”고 대답한다. 드러낸다는 것은 바꾼다는 것이다. 말을 사용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드러낸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실 뒤집어 생각해보면 오직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만 드러내게 될 것이 틀림없다. 10
왜 그럴까? 인간은 상황을 바꾸지 않고서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볼 수조차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상황을 까발릴 때에야, 즉 말로 상황을 드러내야만, 우리는 자신의 상황을 깨닫는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사르트르의 철학을 좀 더 들어가 보아야 한다.
사르트르는 사물을 ‘즉자’(卽者), 인간을 ‘대자’(對自)라고 부른다. 사물은 자연법칙에 따라서 스스로 독립되어 존재하기 때문에 ‘즉자-존재’(l’être-en-soi)이다. 그것은 그것 자체만으로 충만하게 존재한다. 다른 한편으로 사물들로부터 자기 자신을 이탈시키고, 분리시키는 인간의 자기의식이 있다. 그것은 사물과 관계하여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대자-존재’(l’être-pour-soi)이다. 그것은 그것 자체만으로 존재할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텅 비어 있다. 오로지 자신 이외의 것과 관계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의 의식은 무엇에 ‘대해서’ 존재하는 의식이다. 그것은 무언가를 지향할 때에만 의식일 수 있다. 즉, 의식은 어떤 지향운동 속에서만 의식이다. 예컨대 식탁 위에서 아이와 식사를 하는 상황에는 수많은 지향운동이 존재한다. 배고프니까 밥을 지향하게 되고, 순간적으로 여행간 아내가 염려스러워 아내를 지향하면서 밥을 먹게 되고, 때마침 아이의 질문이 귀에 들어오자, 아이를 지향하면서 답하게 된다. 의식은 매 순간 다른 지향운동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매 상황별로 어떤 선택 상황에 놓인다고 할 수 있다. 배고프면 밥을, 아내가 부재한 상황에는 아내에 대한 염려를, 아이가 질문할 때는 아이에게 해줄 대답을 지향하고 선택한다. ‘자유’의 문제는 바로 이 순간에 나타난다. 사르트르에게 ‘자유’란 매순간 도래하는 상황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 행위인 것이다. 인간의 의식은 매순간 개별 상황 속에서 선택을 함으로써 자유로울 수 있다.
"인간의 의식은 매순간 개별 상황 속에서 선택을 함으로써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언제나 함정이다. 더군다나 우리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 상황을 드러내지 않고서는 선택조차 불가능하다. 즉, 자유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렇게 된다. 의식은 자유다. 그런데 의식은 텅 비어 있고, 무언가를 지향할 때만 의식이다. 즉 그것은 근본적으로 지향운동이다. 그리고 그 지향운동 속에서 매 순간 선택을 함으로써 자유다. 하지만 그런 선택을 위해서는 상황을 드러내야 한다. 내가 처한 상황을 드러낼 때, 그 즉시 우리는 선택을 하고, 자유인이 될 수 있다.
상황을 드러내어 무언가를 지향하고 구속 없이 선택하는 것, 이 자유의 프로세스를 사르트르는 ‘기투’(Entwurf)라고 불렀다. 기투는 선택을 통해 미래 상황 속으로 자신을 내던지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하려는 과제이고 기획이다. 우리는 오로지 기투를 통해서만 자유는 완성되고, 또 살아가고 있다. 11
그러므로 작가는 “만일 모든 사람이 내가 쓴 것을 읽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라고 자문하면서 글을 써야 한다고 말한다. 폭로(드러냄)는 어떤 사태를 일으킬지 알 수 없는 모험인 것이다. 이 의미에서 글쓰기는 상황을 드러내는 것이고, 선택하여 행동하는 것이다. 글쓰기 자체가 행동이다. 심지어 이렇게까지 말한다.
“말을 한다는 것은 권총을 쏘는 것이다(S'il parle, il tire) 작가는 물론 침묵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단 총을 쏘기로 작정한 바에야, 어른답게 과녁을 노리고 쏘아야지, 어린애처럼 오직 총소리를 듣는 재미로 눈을 감고 무턱대고 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르트르에게 글쓰기는 전투를 벌이는 것과도 같다. 그것은 적들을 정확하게 조준하여 방아쇠를 잡아당기는 일인 것이다. 또한 그것은 무엇인가를 ‘위하여’ 벌이는 전투다. 이 의미에서 글쓰기는 하나의 기도(企圖, 의도된 기획, une entreprise)라고 할 수 있다. 사르트르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분명한 의도를 가지는 행위이다.
쓴다는 것은 분명한 의도를 가지는 행위이다. 마치 총을 쏘는 것과 같다.
이 지점에 이르면 사르트르는 역시 푸코와 완전히 다른 주장을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푸코는 작가의 의도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인데 반하여, 사르트르는 작가의 의도를 확고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하나의 난관이 있다. 사르트르의 입장에서 보자면 작가는 자신이 드러낸 세계를 대상으로서 마주하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작가는 자기가 쓴 것을 객관적으로 마주보지 못하고, 여전히 주관적으로만 관계한다. “목수가 자신이 지은 집에 살 수 있는 것과는 반대로, 작가는 자기가 쓴 것을 스스로는 읽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읽는다는 행위는 다음 장면을 모른 채 예측하고 13(prévoit) 기대하면서(attend)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독자에게 책읽기는 숱한 가정 속에서 꿈을 꾸고, 깨닫는 과정, 그리고 희망과 실망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사르트르가 보기에 작가는 그렇게 읽지 못한다. 그는 이미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상황을 드러냈으되, 자신이 드러낸 상황을 ‘객관적으로’ 마주하지는 못한다. 미래와 미지(未知)가 없다면 객관성도 있을 수가 없다. 드러낸 세계는 오로지 독자에게만 예측하고 기대하는 ‘사물’로 다가오는 것이다. 작가에게 자신이 쓴 글은 여전히 주관의 세계일뿐이다.
따라서 그가 쓴 글을 객관적으로 완결하기 위해서는 독자의 읽기를 기다려야 한다. 즉 작가는 창조했으되, 그 창조를 완성하지 못한다. 창조는 작가의 손을 떠나 오직 독자의 읽기를 통해서만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작가가 무언가를 의도하여 까발린 것을 객관적 존재(l’existence objective)로 만들어주는 것은 오로지 독자의 읽기이다. 독자의 예측, 기대, 꿈, 희망이 책과 결합되면서 글은 서서히 창조적인 책이 된다. 이 의미에서 읽기는 ‘인도된 창조’(création dirigée)이다. 사르트르의 놀라운 점은 이 점에 있다. 독자의 읽기가 창조가 되는 순간인 것이다. 14
"창조는 작가의 손을 떠나 오직 독자의 읽기를 통해서만 완성된다"
그러나 독자도 자유롭지 못하다면, 그러니까 독자도 자유롭게 선택하고 있지 않다면, 작가의 창조는 좌절되고 말 것이다. 뻔하고 고정된 기대와 예측, 똑같은 꿈과 희망을 품고 책을 읽는다면 새로운 생각은 완성되지 못한다. 즉, 창조가 불가능해진다. 작가는 이런 창조를 독자의 자유에 호소함으로써 이루어낸다. 고로 문학의 창조는 홀로 이루어질 수 없다.
사르트르는 작가 자신의 자유에서 우러나는 동시에 독자의 자유를 목적으로 삼는 감정을 ‘고매하다’(générosité)고 부른다. 그렇기 때문에 읽기는 사르트르적인 의미에서 ‘고매한 마음의 실천’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읽기는 이 고매한 실천이 이루어지는 창조의 현장인 것이다. 이른바 ‘참여문학’이라는 말은 자유를 실천하는 고매한 마음에서라야 창조되는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고매한 독자들에게 와서야 마무리된다. 15
* * *
사르트르에게 의식은 애초에 텅 비어 있다. 그것은 지향운동을 통해서 스스로를 형성하고, 자기 자신을 창조해 나가야만 한다.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를 창안해 내는 자발성, 바로 그것이 사르트르에게 의식이며, 그 자체로 자유이다. 이 의미에서 피에르 테브나즈(Pierre Thévenaz)는 현상학이 사르트르 철학을 통과하며 행함의 철학, 창조의 철학, 행동의 철학, 요컨대 넓은 의미에서 ‘실용주의’(pragmatisme) 철학으로 발전한다고 평가한다. 사르트르에 이르러 존재는 행동이 되었다. 존재는 행동이고, 행동이 곧 존재다(operari=esse). 16
사르트르는 근대적 주체로부터 힘겹게 벗어나려는 어떤 경계에 서있다. 그러나 그는 벗어나려했으나 벗어나지는 못한 듯하다. 혹은 벗어나지 않았을지도. 테브나즈의 표현대로 그는 ‘휴전선포’를 했을 따름이다. 그는 행동이 존재에 선행한다고도, 존재가 행동에 선행한다고도 결정하지 못했다. ‘텅 빙 의식’은 텅 비었지만 여전히 어떤 주체인 채로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는 근대적 주체라는 함정을 피하지 않고, 정면 돌파를 시도한 최초의 용자(勇者)이다. 그는 텅 빈 의식을 그저 고정된 관조의 대상으로 탐구하지 않았다. 그는 행동을 통해서 텅 빈 의식을 매 순간 새롭게 구성해보려는 전투적 시도를 한 셈이었다. 그 시도가 그에겐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며, 동시에 세상을 변혁시키는 참여였던 것이다. 기투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자유의 상태가 높아질수록 주체는 우리가 아는 고정된 주체가 아닌 것이 된다. 여기서 나는 사르트르가 여전히 의식에 머무는 것을 참을 수 없지만, 이 의식을 딛고 고정된 주체를 돌파하려는 용기만큼은 구원해주고 싶다.
이 의미에서 ‘읽기’는 더더욱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행동이고, 나아가 세상을 변혁시키며 기존의 나를 바꾸는 창조행위이다. 어쩌면 그것은 작가와 독자가 함께 만드는 자유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 지점에서 푸코는 사르트르를 다시 만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말년의 푸코는 뜻밖에도 사르트르의 문제의식으로 되돌아가 다시 대면하고 있었다. 푸코는 어떻게 다르게 뚫고 있는 것일까? 이 지점에서조차 읽기는 창조가 되어야 할 것이다.
글_약선생(강민혁)
- 각주 1) 미셸 푸코, 『말과 사물』, 이규현 옮김, 민음사, 2012, 365쪽. ; Michel Foucault, 『Les Mots et Les Choses:Une Archéologie des Sciences Humanies』, Gallimard, 1966, p.134. [본문으로]
- 각주 2) 디디에 에리봉, 『미셸 푸코』(상), 박정자 옮김, 시각과 언어, 1995, 284쪽. [본문으로]
- 각주 2) 박홍규, 『사르트르-자유를 위해 반항하라』, 열린시선, 2008, 40쪽. 사르트르의 50대는 사르트르의 친구이자 정신분석가인 퐁탈리스(Jean-Bertrand Lefèvre-Pontalis, 1924~2013, 우리나라에도 번역된 <정신분석사전>(열린책들, 2005)의 공저자이다)가 ‘발견의 초창기’라고 이름을 붙였던 시기이다. 바로 그런 시기에 미국의 영화감독 존 휴스턴(John Huston, 1906~1987)이 청년 프로이트를 소재로 한 전기 영화의 시나리오 집필을 청탁해 온다. 시나리오 계약을 맺은 1958년은 사르트르에게 무척이나 힘든 해이다. 전 애인 미셸이 치사량의 약물 복용 소동 후에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또 26만 달러의 세금 사정(査定) 때문에 재정적으로 거의 파산에 가까운 상태가 되기도 했다. 거액의 인세와 영화 판권수입에도 불구하고 낭비와 경제개념이 없는 큰 씀씀이가 원인이었다. 어머니의 저축으로 겨우 수습하고 있던 때, 존 휴스턴과 프로이트 전기 영화 시나리오의 거액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사르트르가 완성된 시나리오로 영화를 만들면 상영 시간이 5시간이나 되었다. 사르트르는 존 휴스톤의 수정 요구를 거부하다가, 결국 자기 이름을 영화 자막에 빼라고 한다. 1962년 이 시나리오는 <프로이트, 은밀한 열정>이라는 이름으로 개봉된다.[마틸드 라마디에 글, 아나이스 드포미에 그림, 『장폴 사르트르-자유로운 실존과 글쓰기를 위해 살다』, 임미경 옮김, 박정태 해제, 작은길, 2016, 132~133쪽) [본문으로]
- 각주 4) 『문학이란 무엇인가』도 시몬 드 보부아르가 아니라 사르트르가 1945년 미국에 갔을 때 사귄 여성 돌로레스 바네티(Dolores Vanetti)에게 헌정한 책이다. [본문으로]
- 각주 5) 마틸드 라마디에 글, 아나이스 드포미에 그림, 『장폴 사르트르-자유로운 실존과 글쓰기를 위해 살다』, 임미경 옮김, 박정태 해제, 작은길, 2016, 157쪽. [본문으로]
- 각주 6) 사르트르는 작가가 어떤 정념에 쏠려서 글을 쓰면 자유가 소외된다고 지적한다. 그렇게 되면 책이 증오와 욕망을 품게 하는 수단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런 의미에서 극사실주의적으로 애환과 고달픔만을 묘사하여 독자에게 ‘충격을 주려는’는 짓은 자기 모순에 빠지고 만다. 오히려 작가는 어느정도의 심미적 거리를 확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장폴 사르트르, 『문학이란 무엇인가』, 정명환 옮김, 민음사, 1998, 72쪽] [본문으로]
- 각주 7) 장폴 사르트르, 『문학이란 무엇인가』, 정명환 옮김, 민음사, 1998, 18쪽 ; Jean-Paul Sartre, 『Qu’est que la littérature』, Gallimard, 1948, p. 19 [본문으로]
- 각주 8) 장폴 사르트르, 같은 책, 23쪽 ; Jean-Paul Sartre, ibid, p. 22 [본문으로]
- 각주 9) 장폴 사르트르, 같은 책, 27쪽 ; Jean-Paul Sartre, ibid, p. 25 [본문으로]
- 각주 10) 장폴 사르트르, 같은 책, 31쪽 ; Jean-Paul Sartre, ibid, p. 28. [본문으로]
- 각주 11) 피에르 테브나즈,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김동규 옮김, 그린비, 2011, 80쪽. [본문으로]
- 각주 12) Jean-Paul Sartre, ibid, p. 29 [본문으로]
- 각주 13) 장폴 사르트르, 같은 책, 61쪽 ; Jean-Paul Sartre, ibid, p. 48. [본문으로]
- 각주 14) 장폴 사르트르, 같은 책, 66쪽 ; Jean-Paul Sartre, ibid, p. 52 [본문으로]
- 각주 15) 장폴 사르트르, 같은 책, 74쪽 ; Jean-Paul Sartre, ibid, p. 56 [본문으로]
- 각주 16) 피에르 테브나즈,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김동규 옮김, 그린비, 2011, 80쪽. operari는 ‘행동’, esse는 ‘존재’를 뜻하는 라틴어 어휘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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