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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약선생의 도서관

[약선생의 도서관]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

by 북드라망 2016. 1. 26.


동물이 되는 순간

고쿠분 고이치로의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



은행에 갓 입행했을 때 내 나이는 스물다섯. 호기심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은 나이. 그러나 직장이라는 곳은 그런 일에는 도통 관심을 갖지 않는다. 하루 종일 창구에 붙잡아놓고 온통 일만 시켜댔다. 차츰 알게 되었지만, 노동자라면 항상 같은 처지에 빠져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 밑창 빠진 영혼에겐 토요일 오후가 정말이지 꿀 같은 시간이었다. 오전 근무를 끝낸 후, 은행 문을 박차고 나가면 서울의 황홀한 장면들이 온통 펼쳐졌다. 아마 단조롭고 힘겨운 일에 결박당한 평일을 토요일의 흥분으로 보상받으려 했으리라.


"야호, 이제 주말이다~!"



그러다 나는 평소 안 가던 장소를 가게 되었다. 90년대 초 대학로에 우리나라 최초의 예술영화관이 하나 생겼는데, 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그곳을 찾아가게 된 것이다. 당시로선 무척 의외의 장소인 셈인데, 아마 근처 술 약속을 기다리다가, 큰마음 먹고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아뿔사, 처음 본 영화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Andrei Tarkovsky)의 「희생(Offret;The Sacrifice, 1986)」이었다. 첫 장면부터 세 명의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에게 경배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과 바흐의 아리아가 나오는, 그만큼 무겁고 진지한 영화였던 것이다. 토요일의 흥분은커녕, 울분이 생길 지경인 영화.


아니나 다를까, 첫 장면부터 인내심을 갖고 아리아를 들었으나, 5분밖에 지나지 않아서 아주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주인공 알렉산더가 벙어리 아들 고센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겨우 듣고선 나는 이내 잠에 빠져 들고 말았다. 이후 억지로 깨어나 어떻게든 보려 했지만, -중간에 폭탄소리에 잠시 깼지만, 그 장면이 제3차 세계대전을 알리는 소리인 줄은 아주 오래 지나서야 알았다- 줄거리와 심지어 등장인물도 돌이켜 알기 힘들 정도였다. 아니, 이런 처참한 영화가 다 있단 말인가. 햇빛에 꽃몽우리 터트리기 좋은 하루를 이렇게 망치다니.


내가 그때의 지루함을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고쿠분 고이치로(國分功一郞)의 책을 읽으면서다. 고쿠분은 지루함을 좀 더 계보학적으로 고민한다. 인류는 오랫동안 유목생활을 해왔다. 그러나 기후가 크게 변하고, 함께하는 집단이 커지면서 유목생활을 포기하고 정착생활을 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고쿠분은 좀 다른 감각에서 그것을 혁명이라고 부르는데, 바로 쓰레기 문제와 관련해서다. 유목민들은 있던 자리를 떠나면서 쓰레기를 버리면 된다. 그러나 정착민은 새로운 습관을 강요받는다. 쓰레기는 쓰레기장에만 버리는 습관을 창조해야 했던 것이다. 모든 생활이 땅에 속박당한다.


이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정착생활은 ‘죽음’에 대한 생각도 바꾸어 버렸다. 누군가 죽으면 유목민은 묻고 떠난다. 그러나 정착민은 죽은 자를 묻고 떠날 수 없다. 살아 있는 자는 죽은 자와 함께 있게 된다. 죽은 자와 함께 살게 되자 묘하게도 영혼과 영계(저승)라는 관념이 만들어 진다. 죽은 자들이 함께 묻혀 있으니, 그들에게 다른 세계가 있을 것 같다는 관념이 구성된 것이다. 물리적 공간을 휘젓던 인류는 정착으로 말미암아 심리적 공간을 창조하게 되었다. 이제 인류는 광활한 물리 공간에서 발휘되던 능력이 불필요해진다. 좀 더 다양한 일을 할 수 있는데도 정착생활에서는 할 이유도, 할 방법도 없게 되었다. 지루함은 여기서 생겨난다.


이제 인류는 광활한 물리 공간에서 발휘되던 능력이 불필요해진다. 지루함은 여기서 생겨난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이 지루함을 교묘하게 이용한다. 스마트폰만 해도 그렇다. 약정 기간이 지나면 온전히 내 것이 되는데도, 그때쯤이면 쓰던 기종이 지루해진다. 마음이 이미 다른 모델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스마트폰 산업은 사람들의 요구나 욕망에 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욕망 그 자체를 만들어낸다. 고쿠분은 이게 가능한 이유가 지루함 때문이라고 말한다. 소비자들은 ‘모델’ 그 자체를 원하는 게 아니라, ‘모델 교환’에 의해 지루함에서 벗어나 기분을 전환시키고 싶은 것뿐이다. 고쿠분의 말대로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교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교환했다’는 정보 자체를 소비한다.[각주:1] 지루함이 소비를 촉진하고(그래서 우리는 소비자가 된다!), 소비는 지루함을 낳는다(그래서 우리는 소비를 욕망하게 된다!).[각주:2] 그래, 빚으로 젖은 바짓가랑이는 그 놈의 지루함 때문이었어!


지루함을 하이데거처럼 좀 더 정교하게 구분해 볼 수도 있다. 여기는 기차역 대합실. 외진 시골에 있는 기차역에 기차는 네 시간 후에야 도착할 것이다. 이런 저런 곳을 두리번거리지만 시간은 고작 15분이 지났을 뿐이다. 마치 「희생」 앞머리에 아리아를 오래 들었다고 생각했지만, 오 분밖에 안 지났던 것처럼, 지루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기차역이 나를 지루하게 한 것은 아니다. 기차가 오지 않기 때문에 지루한 것이다. 무언가 때문에 지루함이 생긴다. 지루함의 제1형식이다. 이 형식은 대상(기차)과 주체(기차역에서 기다리는 나) 사이에 시간차가 존재하여 생기는 지루함이다.


그러나 꼭 무언가를 기다릴 때만 지루해지는 것은 아니다. 무언가에 처해서, 무언가를 하고는 있는데도 지루해지는 경우도 있다. 이제 나는 기분도 전환할 겸 파티에 갔다. 음식이며 친구들이 모두 괜찮았다. 겉보기엔 전혀 지루할 틈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 다른 일을 보는 중에 이런 기분이 든다. “오늘 밤 파티에서 나는 무척 지루했어.” 파티 속에서 느끼지 못했던 지루함이 파티에서 벗어나자 생겨났다. 외부세계가 공허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직접 공허해지는 것이다. 스스로 공허해짐. 지루함의 제2형식이다.


제3형식도 있다. “아무튼 그냥 지루해.” 그냥 아무 이유도 없이 공중에 덩그러니 매달린 듯한 지루함이다. 제1형식의 지루함은 외부에서 온다. 외부에 있는 기차가 오지 않기 때문에 지루해진 것이다. 반면 제2형식의 지루함은 우리 안에서 치고 올라온다. 외부에서 파티가 제공되었는데도 내 안에서 지루함이 생겨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제2형식이 제1형식보다 좀 더 깊은 지루함이다. 하지만 제2형식에서는 파티나 게임 같은 것을 선택하여 기분전환을 도모해볼 수 있다. 제1형식보다 능동적이다. 그러나 제3형식은 어떤 것이 제공되더라도 그냥 지루해하는 상태다. 지루함의 극한이다. 인간은 이 상황에서야 자신을 향해 눈을 돌린다. 궁지에 몰려서야 스스로의 가능성을 돌아본다는 말이다.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


이솝우화 중 한 이야기에서 어떤 사람이 자신이 로두스 섬에서 올림픽 선수보다 높이뛰기를 잘 했다며 허풍을 떨고 있었다. 그때 그 이야기를 듣던 사람이 말했다.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보아라"



모든 생물은 단일한 세계에서 살지 않는다. 모든 생물은 각자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 속을 살아가고 있다. 윅스퀼(Jakob von Uexküll)이라는 생물학자는 진드기의 세계로 이를 잘 말해주었다. 진드기의 암컷은 수컷과 교미가 끝나면 여덟 개의 다리로 적당한 나뭇가지에 기어오른다. 이들은 무성한 나뭇가지에 매달려 먹잇감을 노리며 잠복해서 포유류를 기다린다. 적당한 먹잇감을 발견하면 순식간에 뛰어내려 양껏 피를 빨아 먹는다. 즉 포유류의 피부 위에 제대로 착지하면 흡혈이 시작되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 인상적인 동물의 세계를 “연합된 환경”이라는 개념으로 다시 포착해 냈다. 낙하 중력의 에너지, 포유류의 땀 냄새(뷰티르산)를 맡을 수 있는 지각 능력, 포유류의 피부 위에 작은 구멍을 팔 수 있는 행동력, 이렇게 세 개의 요소로 형성된 연합된 세계. 진드기는 이 세 가지로만 이루어진 세계에서 살아간다. [각주:3] 진드기에게 포유류는 없다. 오로지 뷰티르산 냄새로서 포유류를 지각할 뿐이다. 그들은 뷰티르산 냄새에 ‘압도된’(Hingenommenheit) 세계에 살고 있다. 그 외에는 알지도, 알 필요도 없다. 이처럼 진드기와 나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진드기는 우리가 포유류라고 인지하는 대상을 그저 뷰티르산 냄새를 풍기는 존재로만 감각하면서 산다.


고쿠분은 지루함을 벗어나는 방법으로 이 “연합된 환경”에서 아이디어를 얻는다. 만약 하나의 환경세계에 빠져있게 되면, 그 순간 극도로 지루해진다. 인간은 ‘환경세계 이동 능력(inter-umwelt mobility)’이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럴 가능성이 크다. 사실 이런 능력 때문에 ‘자유’라는 관념이 가능한지도 모른다. 자유롭기 때문에 지루한 것이다. 여기에 바로 역설이 있다. 거꾸로 말하면 무언가 특정한 대상에 동물처럼 ‘압도되어 있는 상태’를 계속할 수 있다면, 즉 압도되는 상태로 계속 돌입할 수 있다면 인간은 공손해질지언정 지루해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살아남고 성장해가는 것은 안정된 환경세계를 획득하는 과정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 과정을 돕는 것이 습관이다. 습관이란 안정된 환경세계를 획득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 생성되는 것이다. 습관이 완성되면 안정된 환경세계가 구축된다. 즉 인간은 습관을 통해 최소한의 에너지로 살 수 있는 환경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생각은 멈춘다. 왜냐하면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아도 습관에 의해 저절로 삶이 굴러가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제 다시 지루해진다. 참 묘한 일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습관을 만들지만, 또 그 습관 때문에 지루해져서 살 수 없게 되다니. 고쿠분은 이 지점에서 동물처럼 어떤 새로운 것에 압도되기를 권하고 있다.



“무언가의 충동에 의해 환경세계가 파괴되어버린 인간이 사고를 시작하는 때다. 세계를 뒤흔드는 뉴스여도 좋다. 주변의 일이어도 괜찮다. 예술 작품이라도 상관없다. 새로운 사고여도 좋다. 환경세계로 ‘불법침입’[각주:4] 한 어떤 대상이 그 인간을 사로잡고 놓아주질 않는 것이다. 그때 사람은 대상에 의해 ‘붙잡혀’ 그 대상에 대해 사고하는 일밖에는 할 수 없다. 생각한다는 것은 무언가에 의해 ‘붙잡힌’ 상태다. 그때 사람은 대상에 의해 일어난 새로운 환경세계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충동에 의해 ‘붙잡혀’ 하나의 환경세계에 빠져버리는 상황에 숙달된 존재를 동물이라고 한다면, 이 상태를 ‘동물 되기’로 칭할 수 있다. 인간이 ‘동물이 되는 것’이다.”

고쿠분 고이치로,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 304~305쪽.


지루함에서 벗어나는 것은 동물처럼 무언가에 압도되어 그 길 이외에는 다른 길을 생각할 수 없을 때 가능하다. 그 순간이 진정 생각이 시작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불법침입은 기존의 환경세계에 새롭고 이질적인 사건이 들어온 것을 말한다. 내가 더 이상 어쩌지 못하는 사건이 나를 사로잡아 버릴 때 나는 그 불법침입에 맞서 사고를 시작한다. 새로운 환경세계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지루함에서 벗어날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고쿠분의 관점에서는 영화 <희생>이 ‘알렉산더의 동물-되기’라고 할 수 있다. 제3차 세계대전이라는 불법침입에 맞서 알렉산더는 기존의 자신을 버리는 사유를 시작했다. 이 의미에서 내가 잠결에 들은 폭탄소리는 알렉산더에게는 미래를 흔드는 예포(禮砲) 소리였다. 내가 <희생>에서 유일하게 기억하는 장면은 알렉산더가 자신의 집을 불태우는 영화의 마지막 롱테이크 장면이다. 알렉산더는 제3차 세계대전을 멈추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린다. 가족과의 인연뿐만 아니라 자신의 집까지 불을 지른다. 가족들은 불타는 집을 보고 절규하고, 알렉산더는 앰뷸런스에 실려 간다.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희생한다는 의미일 것이다.[각주:5]


영화 <희생>에서 알렉산더가 자신의 집을 불태우는 장면.


이 희생의 의미는 이 장면에 앞서 마리아를 찾아가 했던 말, “내가 만든 정원은 폭력이 휩쓸고 간 현장이었지.” 를 통해 우회적으로 전달된다. 자신의 집을 비롯해 인류가 만들어놓은 모든 것은 폭력이 휩쓸고 간 현장에 불과하다. 그런 현장을 불태우고 모든 것을 무로 돌려 버리는 것, 그것이 알렉산더에게는 구원의 출발이다. 그런 의미에서 앰뷸런스는 의미가 크다. 이 세상의 상징체계와 완전히 결별한다는 의미니까. 더는 정상적인 일상을 유지할 수 없게 자신을 구속시키는 작업인 것이다. 알렉산더가 자기를 희생하고 동물 되기에 성공하는 순간이다. 그가 들어 간 샛길은 아무도 들어가보지 않은 청명하고 고요한 길일 것이다. 지루할 틈이 없는 길인 것이다.


글_약선생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 - 10점
고쿠분 고이치로 지음, 최재혁 옮김/한권의책


  1. 고쿠분 고이치로 지음,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 최재혁 옮김, 한권의 책, 2014, 126쪽. [본문으로]
  2. 고쿠분 고이치로, 같은 책, 148쪽. [본문으로]
  3.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지음, 『천 개의 고원』, 김재인 옮김, 새물결 출판사, 2003, 106쪽. [본문으로]
  4. “사유는 비자발적인 한에서만 사유일 수 있고, 사유 안에서 강제적으로 야기되는 한에서만 사유일 수 있다. 사유는 이 세계 속에서 불법침입에 의해 우연히 태어날수록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것이 된다. 사유 속에서 일차적인 것은 불법침입, 폭력, 적이다.” [질 들뢰즈 지음, 『차이와 반복』, 김상환 옮김, 민음사, 2004, 310~311쪽] [본문으로]
  5.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Andrei Tarkovsky)의 「희생(Offret;The Sacrifice, 1986)」 알렉산더의 대사 ; 네이버 캐스트, [영화 속의 클래식]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 희생」, 진회숙.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176&contents_id=5814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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