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약선생의 도서관] 『맹자』 - 우리 모두가 군자가 되고 있었다!


삶을 버리고 의를 택하다

『맹자』



공자나 맹자라는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돌리던 때가 있었다. 공자나 맹자는 효도나 충성만 생각하는 고리타분한 사람처럼 여겨졌다. 물론 동양학 붐으로 동양 철학에 대한 편견이 조금은 사라졌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스스로 찾아서 전통 유가 사상에 흥미를 느껴보진 않았다. 공맹(孔孟)은 여전히 고리타분하고, 보수적이며, 억압적이라는 게 당시 내가 가지고 있는 감각이었다.


그런 감각은 철학이라는 공부를 하게 되어도 여전해서, ‘사서’(四書)를 읽는 세미나나 강의에는 일절 기웃거리지 않았다. 심지어 연암 박지원의 「백이론」 수업을 듣고, 이게 무슨 보수 신문의 논조냐고 볼멘소리를 해대기도 했다. 어떤 정치적 입장이었든, 백이도 자기 길을 가고, 무왕과 태공도 자기 길을 간다고 한 것을 두고 도무지 이해하질 못했던 것이다. 그것은 입장을 애매하게 뭉뚱그리는 정치적 퇴행이며, 심하게 말하면 정신승리적인 횡설수설에 불과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연암을 넘어서, 연암 사유의 젖줄이랄 수 있는 유가 사상이 근본적으로 품고 있는 문제일 거라고 주제넘게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유가 사상은 내게서 그렇게 탄압 당했다.


그러니까 이런 느낌...


그러나 세월이 흘러 어떤 계기들로 나는 좀 다른 감각을 갖게 되었다. 고미숙 선생님의 『열하일기』 수업을 듣게 된 일, 『주자어류선집』과 『주역』을 친구들과 함께 읽은 일, 리링(李零)이라는 걸출한 학자가 쓴 독특한 『논어』 해석을 접한 일, 마르셀 그라네나 프랑스와 줄리앙 같은 비교철학자의 새로운 중국사유를 알게 된 일, 그리고 무엇보다 몇 년 동안 『동의보감』을 가지고 고군분투했던 일 등 계기는 여럿이다. 그런데 이런 정적인 일과는 전혀 다른 경험이 찾아왔다.


중년의 친구들과 함께 『맹자(孟子)』를 읽은 작년 초의 일이다. 그때 연구실에는 낭송 붐이 일었고, 중년 프로그램에도 어김없이 그 바람이 불었다. 하지만 중년들이 낭송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짧지 않은 문장들을 외우고, 연기까지 하는 것은 부담스럽기 그지없다. 더군다나 연습 시간마저 부족한 직장인들이 태반이니 오죽 했겠는가. 그래도 나는 어설픈 시나리오를 가지고 약간은 고집스럽게 일을 진행해 보았다. 마치 낭송을 위해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인 듯이.


그러나 고백컨대 『맹자』 낭송을 하면서 오히려 내가 다른 감각을 갖게 되었다. 낭송을 통해 다가간 맹자는 지금까지 가졌던 유가 사유를 완전히 다르게 만들어 주었다. 그동안 몇몇 동양 고전을 읽으면서도 느끼지 못했던 실로 새로운 감각인 것이다. 고전은 고전인 모양이다. 그 뒤로 나는 고전을 읽으려는 중년 친구들에게 『맹자』를 꼭 권하게 된다. 2,300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이유로 이 삼만 오천여자의 글을 읽어 왔겠지만, 중년들은 중년 나름의 이유로 이 책을 꼭 읽어 봤으면 한다.


첫째, 우선 맹자는 읽는 사람의 마음을 당당하게 해준다. 그의 호탕한 언변과 당당한 모습에 한번 빠지면 중년의 마음에도 열정이 살아날 것이다. 한번은 제나라 대부인 경추씨가 맹자에게 왕(제나라 선왕)이 선생(맹자)을 공경하는 것은 봤어도 선생께서 왕을 공경하는 것은 보지 못했다고 투덜거렸다. 맹자더러 예의 없다고 공격한 것이다. 그러나 맹자의 대답이 걸작이다. 당신네 제나라 사람들은 왕과 함께 인의(仁義)를 논하지 않던데, 그것은 더불어 인의를 말할 가치가 없다고 왕을 무시하기 때문 아니냐. 이보다 더 불경한 게 어디 있다더냐. 그에 비하면 나, 맹자는 왕이 요순의 도(道)를 행할 사람이라고 생각되어, 요순의 도가 아니면 왕 앞에서 말해 본 적이 없다. 그러므로 나야말로 왕을 제대로 공경하는 것 아니겠느냐![각주:1]


맹자는 일개 빈사(賓師, 제후에게 빈객으로 대우받는 학자)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항상 상대에게 주눅 들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펼쳤다. 사실 경추씨 질문 앞에 앞서 조회에 참석하는 문제로 약간의 소란이 있었다. 왕이 다음날 아침 조회에 선생 만나기를 청했지만, 맹자는 단박에 병이 나서 참석 못한다고 답한다. 하지만 그 다음날, 그러니까 왕이 만나자고 청했던 그날 아침, 다른 사람의 문상에 가겠다고 길을 나서는 맹자. 제자인 공손추가 강하게 의문을 제기하자, 맹자는 담담하게 대답한다. “어제는 병이 났지만 오늘은 나았는데 어째서 문상을 못하겠느냐?”[각주:2] 이런 모습과 언변만 보아도 삶의 매순간 을(乙)로 살아가는 중년들에게 당당함을 돌려주고, 힘이 불끈 솟아나게 하는 것이다.


이런 당당함은 나름 이유도 있다. 이게 맹자를 읽어야할 두 번째 이유이기도 한데, 맹자는 나 밖에서 평안을 얻으려다 도리어 초조하기만 한 중년의 불안을 싹 다 지워버린다. 맹자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요순처럼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어떻게? 대답은 이렇다. “어찌 남들과 다르겠소? 요순과 같은 성인도 보통 사람과 같을 뿐인데요.”(何以異於人哉? 堯舜與人同耳.)[각주:3] 성인 또한 보통 사람이 자신을 일구어 된 존재다. 놀랍게도 맹자는 이 혁명적인 말을 보수적인 이미지로 가득한 안연(顔淵)의 말을 인용해 거듭 말해 준다. “순임금은 어떤 사람이고, 나는 어떤 사람인가? 순임금처럼 노력하면 역시 순임금과 같아질 것이다.”(舜何人也? 予何人也? 有爲者亦若是.)[각주:4] 누구나 마음에 동일하게 갖고 있는 바(心之同然)[각주:5]를 확충하기만 하면 모든 사람이 지선(至善)한 성인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나도!


물론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지, 모두가 무조건 성인이 된다는 말은 아니다. 오해하지는 말아야 한다. 나는 성인이 될 잠재력을 갖고 있지, 지금 당장은 성인이 아니다. 그러나 맹자가 말하는 인격의 완성 과정은 독특하기 그지없다.


“사람들이 하고자 하는 것[可慾]을 선[善]이라 하고, 선을 자기 몸에 갖추고 있는 것을 신[信]이라 하며, 충만하여 꽉 찬 것을 미[美]라고 한다. 충만하고 꽉 차서 광채가 나는 것을 대[大]라 하고, 크면서도 저절로 융화하는 것을 성[聖]이라 하며, 성스러우며 헤아릴 수 없는 것을 신[神]이라 한다.”

- 맹자, 『맹자』 「진심 下」 25장, 박경환 옮김, ㈜홍익출판사, 2005(개정판), 418쪽.

(번역은 蔡仁厚, 『맹자의 철학』, 천병돈 옮김, 예문선원, 2000, 35쪽을 따름)


놀라운 것은 ‘선, 신, 미, 대, 성, 신’이라는 여섯 단계 모두가 내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최초의 단계인 선[善]은 인간 본성 중 하나다. 그 자체로 내 자신 안에 이미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후 신, 미, 대, 성의 단계를 거쳐 신[神]이라는 최고의 단계에 이르러도, 그것은 나라는 존재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신[神]은 그저 최초의 선[善], 원래부터 내 안에 지니고 있던 내재적 선이 여전히 내재적인 상태에서 최상에 도달한 것 일 뿐이다. 그것은 선이 몸에 꽉 차고 광채가 나서 헤아릴 수 없게 된 것일 뿐, 밖에서 끌어다 치장해 놓거나, 서양 신(God)처럼 밖으로 나아가 의탁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내 안에서 성숙하여 최고가 된다. 이런 사실을 알고 나면, 중년이 밖을 기웃거리며 얻지 못해 애달파 하고 초조해 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 두 번째 이유로부터 우리는 우리 안에 나를 바꾸는 힘을 갖고 있다는 세 번째 이유를 확고하게 알게 된다. 맹자는 이 힘을 묘하게도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惻隱之心)을 가지고 풀어나간다. 그 마음을 우리가 흔히 아는 ‘동정심’이라고 이해하면 오산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문득 한 어린아이가 우물 속으로 빠지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면, 누구나 깜짝 놀라며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각주:6]는 맹자의 유추는 동아시아 최고의 철학적 사고실험이다. 맹자는 이때의 마음을 ‘차마 남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는 마음’[不忍之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더 중요한 것은 이 마음이 어떻게 일어났을까라고 설명한 다음 장면이다.


이어진 바로 다음 문장에서 맹자는 이 마음이 어떤 주체가 어떤 상황을 계산하여 이익을 얻고자 생성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즉, 어린 아이의 부모와 교분을 쌓기 위함도 아니고, 마을 사람과 친구들에게 칭찬을 듣기 위해서도 아니고, 아이의 울음소리가 싫어서도 아니다. 그것은 어떠한 이해관계도 상정되지 않고 즉각적으로 발생한 마음이다. 이 마음은 갑자기 보았을 때[乍見], 어떤 주체적 구속도 없이 곧바로 드러났다. 맹자의 주장 속에는 어떤 이기적(利己的)인 주체도 전제되지 않는다. 그의 반응은 내가 판단하여 일어난 것이라기보다, 어떤 사태와 상호작용 속에서 즉각적이고 자연발생적으로 드러난 것일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사전에 상정된 어떤 주체가 상대가 불쌍하여 지니는 실체적 동정심과는 전혀 다르다. 사실 동정심은 아무리 정당화되더라도 주체가 상정된 감정인 이상, 논리적으로는 이기주의로 귀결되고 만다. 왜냐하면 동정심은 상대의 고통을 보고, 내가 그 고통 속에 있지 않다는 안도감에서라야 가능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내밀어진 손의 이해관계를 생각하지 않고 덥석 잡아버리는 그 마음은 동정심과는 분명히 다르다.


이런 의미에서 ‘불인지심(不忍之心)’은 내가 기존의 나를 떠나서 너가 되는 경험을 드라마틱하게 표현해준 말이다. 내가 너가 되지 않고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지경이 우리들 ‘사이’에 존재한다. 더군다나 그것은 딱딱한 주체인 나를 사전에 상정하지 않고서도 가능한 사고방식인 것이다. 비교철학자인 프랑스와 줄리앙(François Jullien)은 이것을 개인횡단성(transindividualité)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각주:7] 불인지심의 횡단성은 인간을 넘어 동물에까지 미친다. 양혜왕(梁惠王)이 제물(祭物)이 될 소가 끌려가는 것을 보고, “차마 볼 수 없구나(吾不忍其觳觫)”라며 소를 놓아주고 양으로 바꾸라고 명한 일화는 유명하다.[각주:8]  이른바 「곡속장」(觳觫章, ‘곡속’은 무서워서 벌벌 떠는 모습을 이른다)으로 알려진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양혜왕이 소와 양을 차별한다는 현대적 편견에 앞서, 양혜왕이 소와 감정적으로 횡단한다는 점을 우선 보아야 한다. 이 횡단성이야말로 우리 중년들이 반드시 다시 되살려야할 본성이 아닐까. 특히나 너무 굳어버려 더 이상 어떤 것에도 감동 받지 못하고, 자신을 바꿔 너가 되지 못하는 꼰대라면 무슨 말을 더 할까.


이제 마지막 네 번째. 맹자를 읽으면 자신의 내적인 힘으로 주변을 변화시킨다는 테제를 쉽게 받아들이게 된다. 사실 유가의 심학(心學)이 개인의 퇴행적인 수양론을 뒷받침하기도 한다. 현대 중국철학자 리쩌허우(李澤厚)도 공자가 심(心)과 성(性)을 거의 언급하지 않았고, 맹자도 사회·정치적 문제보다 심성을 더 중시하지 않았는데 송명리학(宋明理學)이 심성론을 강조하면서 지나치게 추상이론으로 흘렀다고 비판하였다.[각주:9] 더군다나 맹자사상은 귀족이나 대토지 소유 지주에게 접착되면서 인민을 이중 삼중으로 착취하는데 활용되기도 했다.[각주:10] 아마도 내가 공맹에 대한 오해가 생긴 것도 이를 지나치게 정형화시킨 텍스트나 규범들을 보았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맹자는 나의 변화를 통해 타자를 변화시키고자 한 철학자라고 볼 수도 있다. 다시 ‘불인지심’으로 돌아가 본다. 불인지심은 타자가 위험에 빠질 때 무조건적으로 솟아난다. 그것은 어떤 관계가 구성되면 함께 자연발생적으로 구성되는 감정이다. 우리가 인간인 이유는 이런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불인지심을 느낄 줄 알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인(仁)도 두 사람의 관계 속에서라야 가능한 상태다. 그렇다면 불인(不仁)은 타자와의 관계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몸의 상태인 것이다. 군자(君子)란 어떤 관계에 처하더라도 이런 자연발생적인 마음을 보존하느냐 아니냐에 있다[以其存心].[각주:11] 다시 말하면 군자란 항상 새로운 관계에도 불구하고 선한 마음을 항상 되찾을 줄 아는 자인 것이다.


여기서 맹자는 좀 더 앞으로 나아간다. 군자는 내재적으로 성장한 이 힘을 이용하여 타자들을 변화시킨다. 그는 “지극히 진실하다면, 남을 움직이지 못하는 경우가 없다(至誠而不動者 未之有也.).”[각주:12]고 단언한다. 이 경우 어떤 물리적인 힘보다도, 군자의 인격적 성숙이 앞선다. 그가 힘의 관계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군자의 인(仁)이 모든 힘의 관계에 앞서서 존재하면서 힘의 관계를 움직인다. 맹자의 말을 바꾸어 말한다면 진실이 힘을 움직이지 못하는 경우가 없다. 어쩌면 인(仁)이란 힘을 움직이는 힘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게 힘의 관계에 의해 은폐되어 있을 뿐인 것이다. 아마도 군자란 니체의 초인처럼 걸어 다니기만 해도, 그의 덕이 흘러 넘쳐 자신뿐 아니라 타인도 군자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사람일 것이다.



우리는 결국 낭송대회 본선까지 진출했다. 낭송은 『낭송 논어/맹자』의 『맹자』 부분인 「사생취의-삶보다 간절한 것」과 「호연지기, 의로움으로 천지를 채우다」였다. 생선을 버리고 곰 발바닥을 택하는 지문에서는 진짜 생선을 휙 버리며 큰 소리로 낭송을 하였다. “생선도 내가 원하는 것이고, 곰발바닥도 내가 원하는 것이지만 둘 모두를 얻을 수 없다면, 생선을 버리고 곰발바닥을 택할 것이다.” 이어서 삶을 버리고, 의를 택한다는 문구가 이어진다. “삶도 내가 원하는 것이고, 의도 내가 원하는 것이지만 둘 모두를 얻을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를 택할 것이다.” 내 입에서, 그리고 모두의 입에서 낭송이 반복되자, 삶을 버리고 의를 택한다는 이 의심스러운 문구가 불현듯 이해되기 시작했다. 내 마음은 여기서 말하는 삶은 “기존의 삶”이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맹자는 새로운 삶으로 난 길[義]을 가려면 기존의 삶[生]을 버리라고 외치는 것이었다. 신기한 일이다. 우리가 함께 군자가 되고 있었다.


글_약선생


맹자 - 10점
맹자 지음, 박경환 옮김/홍익출판사


  1. 맹자, 『맹자』 「공손추 下」 2장 , 박경환 옮김, ㈜홍익출판사, 2005(개정판), 116쪽. [본문으로]
  2. 맹자, 『맹자』 「공손추 下」 2장 , 박경환 옮김, ㈜홍익출판사, 2005(개정판), 115쪽. [본문으로]
  3. 맹자, 『맹자』 「이루 下」 32장, 박경환 옮김, ㈜홍익출판사, 2005(개정판), 247쪽. [본문으로]
  4. 맹자, 『맹자』 「등문공 上」 1장, 박경환 옮김, ㈜홍익출판사, 2005(개정판), 139쪽. [본문으로]
  5. 맹자, 『맹자』 「고자 上」 7장, 박경환 옮김, ㈜홍익출판사, 2005(개정판), 311쪽. [본문으로]
  6. 맹자, 『맹자』 「공손추 上」 6장 , 박경환 옮김, ㈜홍익출판사, 2005(개정판), 106쪽. [본문으로]
  7. 프랑수아 쥴리앙 지음, 『맹자와 계몽철학자와의 대화』, 허경 옮김, 한울아카데미, 2004, 53~54쪽. [본문으로]
  8. 맹자, 『맹자』 「양혜왕 上」 7장 , 박경환 옮김, ㈜홍익출판사, 2005(개정판), 45쪽. [본문으로]
  9. 리쩌허우 지음, 『학설』, 노승현 옮김, 도서출판 들녘, 2005, 10쪽. [본문으로]
  10. 임건순 지음, 『제자백가 공동체를 말하다』, 서해문집, 2014, 288쪽. [본문으로]
  11. 맹자, 『맹자』 「이루 下」 29장 , 박경환 옮김, ㈜홍익출판사, 2005(개정판), 106쪽. [본문으로]
  12. 맹자, 『맹자』 「이루 上」 12장 , 박경환 옮김, ㈜홍익출판사, 2005(개정판), 202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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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호연지기 2016.02.17 09:17 답글 | 수정/삭제 | ADDR

    우리는 모두 성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을 들어도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싫어서 온갖 핑계를 만들어내곤 하죠^^;; 주자께서도 "타고난 자질이 좋지 않은 것은 배움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바가 아니다"고 변명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은 하는 것은 자기를 포기하는 데 과감한 것이니 인(仁)하지 않음이 심한 것이다" 고 하셨더라고요. 이 말을 듣고 다른 모든 일에 소심하면서 유독 자기를 포기하는 것에만 과감했던 제 모습이 떠올랐답니다..;;;; 더 이상 과감해지지 않아야겠다 싶었지요.

    • 북드라망 2016.02.17 09:25 신고 수정/삭제

      네, 그런 것에 과감해지지 마세요.
      스스로를 바꾸는 일이 쉽지 않은 것 뿐이지, 충분히 바뀔 수 있습니다. 글을 쓰신 약선생님께서 그 증인이신걸요!

    • 약선생 2016.02.17 14:34 수정/삭제

      ㅎㅎㅎ 자기 포기에 과감한 사람이라...말씀 들어보니 우리가 보통 그렇게 살았는가 봅니다. 이제는 그러지 말아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