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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이야기] 뎅기열을 공부하다 뎅기열을 공부하다 9월의 뻬스끼싸 9월 하순, 동맥 해부학을 막 끝내고 우리 모두 죽어가는 얼굴로 정맥 해부학에 돌입하던 무렵이었다. 갑자기 희소식이 들렸다. 수업을 잠시 멈추고 뻬스끼싸(Pesquisa)에 돌입하겠다고 학교가 공표했던 것이다. 뻬스끼싸라는 단어는 직역하면 문의, 탐구, 조사를 뜻한다. 그러나 쿠바의 의대에서 ‘뻬스끼싸’를 한다는 것은 연구실에 앉아서 신체에 대해 탐구하겠다는 게 아니다. 할당된 지역에 가서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각 가정의 건강에 대해 문의하고 보고하겠다는 것이다. 왜? 그 지역에 전염병이 돌고 있기 때문이다. 즉, 뻬스끼싸란 당국의 입장에서는 학사일정을 멈추고 학생들을 동원할 만큼 전염병 사태가 심각하다는 소리다. 1학년 때도 뻬스끼싸를 몇 번 했었다. 뻬스끼싸 때문에 일.. 2020. 10. 27.
그림 형제, 메르헨을 발견하다 그림 형제, 메르헨을 발견하다 동화를 읽어 뭐하나 어떤 경험이 꼭 우리를 성숙시켜주는 것은 아니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매순간이 다 드라마틱했지만 육아를 통해 내가 무엇을 얻고 있는지 어떤 사람이 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엄마된 지 십 년인데 도무지 내가 훌륭해졌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경력이 단절되는 것이 두렵고, 아이에게 도대체 뭘 해주고 있는지 정신도 없다. 애들도 잘 커야겠지만 나도 잘 자라야 하는데 매일 아침마다 어리둥절하다. 도대체 엄마란 어떤 존재일까?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있는 것일까? 어느새 저녁 8시다. 어디선가 풀썩 풀썩 둥둥 집이 울린다. 여기는 바닷속. 두 마리 해파리는 바다생물답게 이불 위에서 헤엄을 치는 중이다. 하지만 물고기도 밤에는 자야 하지. 자, 책을 읽고 잠을 .. 2020. 10. 26.
『논어』, 절대언어와 역사화 사이(3) - 공자의 언어감각 『논어』, 절대언어와 역사화 사이(3)- 공자의 언어감각 “나는 말 잘하는 사람을 미워한다” 공자가 말 잘하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학이’(學而) 편에 “교언영색 선의인”(巧言令色,鮮矣仁)이라 해서 인(仁)과 대척점에 있는 악덕으로 교묘한 말재주[巧言]를 앞세우고 있으니 두말할 게 없다. ‘교언’은 여러 가지로 변주된다. 구변(口辯)이라 하기도 하고 이구(利口)라고도 하며 구급(口給)이라고도 하는데 녕(佞)이라는 한 글자를 쓰기도 한다. 다양한 표현은 교묘한 말솜씨가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경멸감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영인(佞人)은 공자가 싫어하는 사람 가운데 하나다. 공자 같은 유덕자(有德者)도 사람을 미워하나? ‘양화’(陽貨) 편에, 자공이 “군자도 미워하는 게 있습니까?”.. 2020. 10. 23.
[연암을만나다] 출세하지 않아도 출세하지 않아도 ‘연암’하면 우정, 그중에서도 많이 이야기되는 것이 ‘백탑청연’이다. ‘백탑청연’이라 불리는 연암을 비롯한 이덕무, 이서구, 서상수, 유금, 유득공은 모두 백탑 근처(지금의 서울 종로)에 살면서 매일같이 글 짓고, 읽고, 술 마시고, 풍류를 나눴다. 여기에 박제가, 홍대용, 백동수까지 늘 왕래했으니 상당 규모의 우정 네트워크다. 거문고를 뜯다가도 시를 짓고, 갓 하나를 놓고서도 줄줄이 문장을 짓는 이 문인들 사이에 무사가 하나 있었으니, 백동수(이하 영숙)다. 영숙은 ‘조선 최고 무사’라는 수식어가 붙을 만큼 재능과 실력이 뛰어났음에도 서얼이라는 신분 때문에(당시 급제자는 많고 벼슬자리는 적었다. 서자 출신은 등용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적절한 자리를 얻지 못했다. 서른하나의 창창한 청년.. 2020. 10.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