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절대언어와 역사화 사이(3)
- 공자의 언어감각
“나는 말 잘하는 사람을 미워한다”
공자가 말 잘하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학이’(學而) 편에 “교언영색 선의인”(巧言令色,鮮矣仁)이라 해서 인(仁)과 대척점에 있는 악덕으로 교묘한 말재주[巧言]를 앞세우고 있으니 두말할 게 없다. ‘교언’은 여러 가지로 변주된다. 구변(口辯)이라 하기도 하고 이구(利口)라고도 하며 구급(口給)이라고도 하는데 녕(佞)이라는 한 글자를 쓰기도 한다. 다양한 표현은 교묘한 말솜씨가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경멸감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영인(佞人)은 공자가 싫어하는 사람 가운데 하나다. 공자 같은 유덕자(有德者)도 사람을 미워하나? ‘양화’(陽貨) 편에, 자공이 “군자도 미워하는 게 있습니까?”라고 묻는 장면이 보인다. 스승님도 미워하실 수 있습니까, 라고 물은 거나 진배 없다. 공자는 네 가지 미워하는 사람을 드는데, 앞의 두 가지(남의 악행을 말하는 자를 미워하고 아랫자리에 있으면서 윗사람을 헐뜯는 인간을 미워한다)가 말하기와 관련된다. 공자가 이들을 미워한 것은 이들이 남의 악행을 말하거나 헐뜯을 때 교묘하게 말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꾸로 아부할 때도 상대방 심리에 부합하도록 말을 교묘하게 포장하고 우회한다는 점을 알기에 아부하는 인간도 공자는 멀리했다.
변(辯)이란 말에는 ‘말만 잘한다’는 부정적인 뜻만 있는 게 아니다. 전국시대 변사(辯士)들은 단순히 말만 잘하는 사람들을 가리키지 않는다. 공자를 최초의 변사라 한다면 나쁜 뜻으로 들을 수 있겠지만 그런 것만은 아니다. 소크라테스가 최고의 소피스트로 소피스트의 완결자이자 해체자였다는 사실은 소크라테스를 해치는 말이 아니다. 공자도 마찬가지다. 공자를 최초의 변사라고 해도 불명예를 씌우는 말이 아니다. 공자가 쉰 살이 넘은 늙은 나이에 14년 동안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벼슬을 구하려 했을 때 공자는 무엇보다 군주를 설득해야 했다. 설득은 변사들의 최고 능력이었다. 변(辯)은 녕(佞)과 구별해야 한다. 그게 쉽지가 않다. 공자가 변사임에는 틀림없으나 영인(佞人)이라 하면 누구도 찬성하지 않을 것이다. 헌데 공자가 ‘녕’이란 소리를 들었다면? ‘헌문’(憲問) 편에는 미생무(微生畝)가 공자를 평가하는 말이 보인다. “구(丘, 공자의 이름)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연연해 할까(여기저기 다니며 벼슬을 구할까[栖栖]). 말재주 부리는 게 아닌가.”[無乃爲佞乎] 공자는 대답한다. “감히 말재주 부리는 게 아니라 고(固)를 미워하는 것이다.”[疾固] 공자의 대답 “질고”(疾固)에 대해 주자는 고집불통을 미워한다는 의미로 풀어 녕(佞)이라고 말한 미생무에게, 당신처럼 고집스런 사람을 미워하기 때문이라고 맞받아치는 의미로 해석했다. 고주(古注)는 “세상이 고루한 것을 미워해서 그렇다”라고 풀어 다르게 보았다. 핵심은 녕(佞)에 걸려 있다. 무슨 말인가? 남이 보기에 공자는 말솜씨가 뛰어났다는 말이다. 미생무의 말에 공자는 자신을 변호해야 했다. “녕(佞)이 아니라 질고(疾固)입니다”라고. 공자를 이름으로 부르는 걸 보면 미생고는 공자보다 연장자일 가능성이 높고 공자는 진지하게 자신을 디펜스해야 하는 상황이다. 두 사람의 발설 사이에 시간 차이가 있다고 가정해서 논평과 그에 대한 공자의 대답으로 구성했지만 둘 사이에 주고 받는 대화로 봐도 무방하다. 두 말 사이에 긴장감이 어렴풋이 감지된다. 공자는 녕이란 말에 반응했던 것이다.
언어표현에 뛰어났던 공자
공자는 말 잘하는 것을 늘 경계하고 군자됨의 자질로 목눌(木訥)을 꼽았다. 나무처럼 감정적 동요를 드러내지 않는 것과 과묵. 맥락은 다르지만 공자는 과묵에서 더 나아가 자공에게 “말이 없고자 한다”[予欲無言]고 했는데 제자들이 선생의 행동보다 말에 더 귀 기울이고 신뢰했음을 반증한다. 이 모든 발언과 일은 공자가 언어표현에 뛰어난 데서 비롯된다.
공자가 언어표현에 뛰어났다는 사실은 『논어』 전반에 걸쳐 있다. 『논어』란 공자의 어록이 아니던가. 『논어』 이외의 다른 책을 보면 스승들―맹자·노자·묵자·순자·한비자 등등 제자(諸子)들―은 예외 없이 언어표현에 출중했음을 알 수 있다. 공자는 어떤 면에서 이들과 구분되는가. 장자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노니는 존재이니 논외로 하자. 맹자가 논리구사에 뛰어나다면 공자는 이에 미치지 못한다. 노자처럼 철학적 깊이를 가졌는가 물으면 공자는 노자를 따라갈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묵자만큼 논리학 훈련에 능한 것도 아니다. 순자는 맹자보다 더 논리적이니 말할 것도 없다. 한비자의 예리한 분석과 치밀한 조직력을 갖지도 못했다. 후대에 공자의 영향 아래 언어를 수련한 사람들과 공자를 동렬에 놓아서는 아니 될 것이다. 선배의 자양분을 흡수해 자기만의 장점으로 멀리 뻗어나간 이들의 기준을 적용하면 부당한 비교이리라. 그렇다면 공자만의 뛰어난 면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언어감각’이리라. 공자는 언어 자체에 대한 감각이 예민해서 언어의 뉘앙스를 깊이 체득한 것처럼 보인다. 언어를 갈고 닦은 솜씨와는 다르다. 얼핏 보면 말장난으로 보일 수 있는 어휘구사와 언어 이용, 유머를 은근히 드러내는 말은 공자의 언어를 세심하게 음미해야 하는 게 아닌가 돌아보게 한다. 의미를 따져보고 지향점을 추론해 공자의 사상을 재구성하는 일이 『논어』를 읽는 보통의 방법 가운데 하나지만 공자의 언어감각을 등한시할 때 『논어』 읽는 재미는 뚝 떨어진다.
공자 언어의 특징 ― 언어유희, 시적 표현, 간결함, 첩어의 사용
첫번째로 언어유희. 예를 들어 보자. “‘어찌하지, 어찌하지’라고 하지 않는 사람은 나도 어찌할 수 없다”[子曰不曰如之何如之何者, 吾末如之何也已矣.(위령공)]. 공자는 “어찌할까”[如之何]라는 말로만 문장을 만들었 다. 일이 닥쳤을 때 아니면 평소에 어떻게 해야 할지[如之何]를 생각하지 않고 함부로 행동하는 사람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고 반어투로 말한 것이다. ‘如之何’를 반복하되 의미를 뒤집는 언어유희를 하면서 의미망을 구축했다.
공자의 빼어난 표현도 언급해야 한다. 이때 공자는 시인이다. 지금은 유명해져서 첫 발언의 신선도가 약해졌지만 미적인 측면에서 보더라도 시인으로서 공자는 발군이다. ‘안연’(顏淵) 편에서 계강자가 정치에 대해 묻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군자의 덕은 바람이오, 소인의 덕은 풀이니 풀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습니다”[君子之德, 風, 小人之德, 草, 草上之風, 必偃]. 바람과 풀의 비유는 탁월하다. 설명이 필요 없이 이미지가 떠오르면서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살아 있는 비유. 생생하다.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동떨어진 것을 기발하게 매치시키는 게 뛰어난 비유가 아니다. 비유가 성공하니 생략된 것조차 느끼지 못하고 단번에 받아들이게 된다. 더 이상의 덧붙이는 말은 군더더기다. 김수영의 시 「풀」에까지 뻗어 있는 긴 생명력을 대는 것으로 줄이도록 하겠다.
싱싱한 비유와 결합한 메시지뿐만이 아니라 더 있다. 공자는 간결함에서 으뜸이고 메시지 전달에 빠진 게 없어 모범이 된다. 공자는 “말은 전달만 하면 된다”[辭達而已矣(위령공)]고 했다. 간결한 말이지만 실제로는 쉽지 않다. 공자 자신은 과연 이 말을 실현했을까? 예를 들어보자. “군자는 안정되지 교만하지 않으며 소인은 교만하지 안정되지 못하다”[君子 泰而不驕, 小人 驕而不泰(자로편)]. 문장 전체가 대조(contrast)다. 교(驕)와 태(泰)는 다른 범주로 보이지만 이웃한 개념이라 혼동하기 쉽다. 태(泰)한 자세로만 일관하면 접근하기 어려워 교(驕)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같이 썼다. 군자와 소인을 구분하기 어려운 까닭도 거기 있다. 공자가 빈번하게 군자와 소인을 대조한다. 그것은 군자를 강조하기 위한 단순한 수사전략이 아니라 군자와 소인이 등을 맞대고 있기에 구분이 어렵기 때문이다. 군자와 소인을 대비시키되 태(泰)와 교(驕)를 위치만 바꿔 미묘한 차이를 극명하게 대조되도록 했다. 군자와 소인이란 도덕적 주어와 결합한 비슷한 단어(교/태)는 판연히 다른 두 존재가 생각보다 먼 거리가 아님을 은연중 드러낸다. 군자는 수련을 계속하지 않으면 교(驕)로 넘어갈 수 있음을 깔고 있으니 이 말엔 경계의 뜻이 있다. 군자의 뜻을 잘 전달했다 하겠다.
마지막으로 간결이란 언어의 경제성에는 첩어의 활용을 빼놓을 수 없다. 공자는 사(士)에 대해 이렇게 정의한다. “절절시시(切切偲偲), 이이여야(怡怡如也)”. (친구 사이엔) 간절하게 권하고 (형제 사이엔) 화목해야 한다는 말이다. 의미를 해석해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만 의미 이전에 언어의 느낌이 먼저 들어온다. 이 말을 들은 용맹한 자로는 어떻게 느꼈을까. 의미가 전달되기도 전에 소리와 음성이, 호소하는 느낌과 편안한 감각이 먼저 스며들어 잊지 못할 말이 되지 않았을까.
언어에 집중해 읽어야 하는 책, 『논어』
공자의 언어능력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간단하게 네 가지 정도를 거론해 보았다. 같은 말을 대조시키거나 겹쳐 쓰면서, 유희를 하되 놀이에 멈추지 않고 의미를 만들며, 간결하게 핵심을 전달하는 복합적인 능력은 후천적인 습득일까, 선천적인 자질일까. 호학(好學)을 강조했으니 평생학습을 통해 얻은 것 같기도 한데 어느새 의미가 따라오도록 하는 미묘한 언어를 보면 언어의 음악성에 대한 직관이 작동하는 게 아닐까. 공자는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이라고 자신을 표현했다. 실질적인 지식이나 기본적인 공부[下學]만 배운 사람에게 수준 높은 경지에 도달[上達]했다는 게 어떤 것인지 상상만 할 뿐이나 상달에는 언어적 직관을 구체화하는 능력도 포함되는 것일까. 뻔한 말이지만 공자는 습득과 자질이 결합한 것일까.
공자의 언어감각은 예민하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위정자에게 하는 말이 달랐으니 지위를 고려해 쓰는 말을 골라야 했기 때문이다. 제자들에게 하는 말은 달랐으니 그들의 성격과 기질을 평소에 관찰해 알았기 때문이다. 언어의 효용이라는 측면에서 상대에 따라 쓰는 언어가 달랐다는 점은 누구나 지적할 수 있다. 그때 예민하다는 말은 두루뭉술하다는 단어와 별 차이가 없다. 의미 분석에서 벗어나 말을 음미하는 지점까지 가봐야 한다. 소리를 고려해야 한다는 말이다. 심미적 자질에 담겨 있는 게 공자의 언어다. 공자가 시인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정치가를 만나야 했기에 언어가 공식적이 되고, 교육자로서의 면모가 부각돼 교훈적인 선생으로 기억되는 건 피할 수 없다. 진지하고 사려 깊은 사람으로서. 그러나 공자의 호소력과 사람을 움직이는 힘은 언어 자체의 매력을 체득했기에 가능했다. 거기에 주목하지 않고 의미를 재구성하는 일(사상!)에 몰두하기에 『논어』 읽기는 건조하다. 알아가는 재미에 그칠 뿐 즐기는 기쁨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공자의 언어구사를 음미할 때 공자는 다른 사람이 된다. 사람들은 『논어』를 읽고 공자가 온화한 인간이라고 말한다. 공자의 직설적이지 않은 말투를 지적한 것이지만 언어감각을 인지했기에 가능한 진단이다.
공자의 언어감각에 대한 후대 사람들의 이해
후대 사람들은 공자의 언어감각을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논어』 안에서도 알아낼 수 있다. ‘자장’(子張) 편은 공자 제자들의 언행이 집중적으로 기록되었는데 공자의 재전(再傳) 제자들이 자신의 스승―공자에게 직접 배운 자신의 스승들―을 기록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논어』가 완성되는 데는 재전제자들의 손길과 영향이 적지 않았다. 이들은 공자의 직접 제자들이 공자를 “자왈”(子曰)이라고 표시한 것에 비해 “공자왈”(孔子曰)이라고 표현해서, 추론이지만, 어쩔 수 없는 거리감을 드러냈다.
‘계씨’(季氏) 편에는 “공자왈”(孔子曰)로 시작하는 일련의 기록이 모여 있다. ‘계씨’(季氏) 편에 대해 주자의 『논어집주』는 “제논어”(齊論語)라고 했다. 다른 편들과 구별되는 ‘계씨’ 편만의 특이한 점을 이렇게 표현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왜 근거 없이 “제논어”라고 했느냐 묻고 따지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이 편이 다른 편들과 이질적이라는 점을 인식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가 문체가 다르다는 점이다. 문체는 언어표현 양식이 다르다는 초보적인 사실에서 누구나 감지할 수 있다. 4장부터 10장까지 공자는 숫자를 동원해 말한다. “삼우”(三友)라든가, “삼요”(三樂)라든가, “삼건”(三愆, 세 가지 허물), “삼계”(三戒), “삼외”(三畏), “구사”(九思)라는 말을 꺼내 리스팅(listing)하는 방식으로 말을 전한다. 이 버릇은 ‘양화’(陽貨) 편에도 흔적을 남겨 “오자”(五者)라든가, “육언육폐”(六言六蔽)라고 하는 투가 보인다. 체계적이라는 인상을 줄지 모르나 공자의 말이 기계적으로 나열된다. 정돈된 느낌이라기보다 가공된 인위성이 도드라진다. 공자 언어의 활력이 증발돼 버렸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공자의 자유로운 리듬을 가진 언어가 잘못 이해되면서 외우기 편한 쪽으로 기울어진 것이 아닐까. 공자의 글이 조직화되면서 생동하는 호흡을 잃어버리는 전조가 『논어』 후반부에 이미 나타난다. 공자의 언어감각은 분명 감지할 수 있으나 카피하기가 쉽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었을까. 공자의 독창성은 변화가 다양한 언어의 여러 리듬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언어표현에서 온다. 누구나 느끼기는 하지만 모사할 수는 없다. 그 찌꺼기가 리스팅이란 양식으로 앙상하게 구현된 게 아닌가.
공자의 ‘불규칙한-자연스런 리듬’은 사마천의 사기에 일정 구현되었다고 생각한다. 『논어』에 보이는 여러 가능성이 후대에 끼친 영향은 생각보다 크지만 문장과 문체에서도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고 그 중심에 공자의 언어감각이 있다.
글_최경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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