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내가 점점 쓸모없어지는 것은 '상품' 때문이다(?)



이반 일리치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인간은 소비자로 태어나지 않았다



“개인의 재능과 공동체의 풍요, 그리고 환경 자원을 자율적으로 사용하지 못하는 현대의 특이한 무능이 우리 삶을 속속들이 감염시킨다. 그리하여 전문가가 고안한 상품들이 문화적으로 형성된 사용가치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시장 밖에서 만족을 얻을 기회는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 예를 들어, 지금 내가 가난한 것은 로스앤젤레스에 살면서 35층 고층건물에서 일하느라 두 발의 사용가치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첫번째 환상은 인간은 소비자로 태어났고, 어떤 목표를 세우든 상품과 재화를 구매해야 원하는 걸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환상은 한 나라의 경제에서 사용가치가 기여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를 보지 못하도록 교육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현재 전 세계의 국가 가운데 자연이 인류에게 지속해서 끼친 공헌과 개인이 시장 밖에서 만드는 사용가치를 변수로 측정하여 경제정책에 반영하는 나라는 한 군데도 없다. ……
경제에서 사용가치를 무시할 수 있다는 환상은 지금껏 자동사로 지칭되던 행위를 명사로 거론되는 상품으로 제도적으로 정의하여 무한정 대체할 수 있다는 가정에서 생겨난다. ‘배우다’가 ‘교육’으로, ‘낫는다’가 ‘건강관리’로, ‘움직이다’가 ‘교통’으로, ‘놀다’가 ‘텔레비전’ 등으로 끝없이 바뀌어 간다.“


- 이반 일리치,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허택 옮김, 느린걸음, 2014


"얼마면 돼?"



뭔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 떠올리는 건 전부 돈을 주고 구입하는 물건이거나 서비스가 되어 있다.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물론 점점 어떤 종류의 상품이었던 것을 특정 브랜드의 상품으로 떠올리게 되는 데 약간 불편한 마음이 들기도 했으나, 어쩐지 좀더 세련되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여 불편함을 이겨(?)냈다. 예컨대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자동적으로 스타벅스나 커피빈의 특정 메뉴가 떠오르고, 가방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특정 브랜드의 제품이 떠오르는 식이다(그런 커피나 브랜드가 있다는 걸 알기 전엔 그냥 일반명사 ‘커피’이고 ‘가방’이었다. 이젠 우유 종류와 커피나 얼음의 양 등등을 지정하는 복잡한 주문을 통해 받는 커피를 마시지 않거나 가방의 명품 브랜드를 제대로 모르면 촌스럽고 뒤떨어진 사람이 되고 만다). 그뿐 아니다. 예전엔 직접 했던 일들이 필요해지면 이제는 ‘서비스업체’가 먼저 떠오른다. 예컨대 ‘밥’은 해먹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사먹는 것인 경우가 훨씬 많다. 또 예전에는 피부가 거칠어지면 집에서 오이라도 썰거나 뭔가를 직접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면 지금은 ‘피부관리샵’부터 떠올린다. 


이전에는 스스로 만들거나 하던 행위가 모두 돈과 교환된다. 그래서 얼마짜리냐가 중요해지고, 소비자의 니즈에 맞춘다며 다양한 가격대의 상품이 생기고, 어떤 것을 소비하느냐에서 그 사람의 마음이 드러나고, 갑과 을이 구분되고, 스스로 뭔가를 하는 행위는 ‘한가한 짓’이거나 ‘없어 보이는’ 일이 된다. 태어날 소중한 아기를 위한 준비도 상품으로 채워지고, 나의 건강을 관리하거나 미래를 계획하는 일도 타인의 서비스(헬스클럽과 네일숍과 각종 학원 등)로 채워지는데, 그것들은 하루가 다르게 종류가 늘어난다. 예전에 유행했던 ‘이영애의 하루’(CF퀸으로 활약할 당시의 이영애가 출연한 광고들을 모아 구성한 우스개)에 뒤지지 않을 만큼 우리의 하루도 각종 상품으로 시작해서 상품으로 끝난다. 


쇼핑은 하나의 놀이처럼 여겨진다.




상품사회의 문제는 무엇보다 우리가 가진 능력을 무력화시키며 그것이 생존한다는 데 있다. 위의 책에는 그 한 예로 멕시코의 작은 마을 사례가 나온다. 마을 잔치가 열리면 인근에서 온 네 개의 악단이 연주를 하며 800여 명의 이웃을 즐겁게 할 정도였던 이곳은, 이른바 현대화를 거치면서 마을 잔치에 레코드와 라디오가 확성기로 울려 퍼졌고, 지역의 예인(藝人)들이 사라져 갔다고 한다(지금은 다 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일리치가 이 글을 쓴 건 1970년대니까). 일리치는 “인간이 스스로 속한 문화에서 얻을 수 있는 도구를 능숙하게 사용하여 자신의 필요를 만들지 못할 때 더 이상 인간으로서 인식될 수 없다”고 했다. 이것이 전근대 사회로 돌아가자는 말은 아닐 것이다. ‘삶의 활기’는 상품소비로 충족될 수 없다는 것이며, 필요를 상품으로 충족하는 삶에는 공허감과 우울함이 항상 배면에 있다는 뜻일 게다.


지금 나 자신을 쓸모없게 만들고 있는 것은, 우울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내가 오늘 산 그 상품이다!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금껏 자동사로 지칭되던 행위를 명사로 거론되는 상품으로 제도적으로 정의하여 무한정 대체할 수 있다는 가정”에서 조금씩이라도 벗어나 보는 것은 어떨까. ‘교육’은 ‘(직접 무엇을) 배우다’로, ‘교통’은 ‘(내 발로) 움직이다’로, ‘텔레비전’은 ‘(무엇을 하며) 놀다’로, ‘스마트폰’은 ‘(누구와 직접) 만나다’로 말이다.


'텔레비전' 말고 '놀다'로~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 10점
이반 일리치 지음, 허택 옮김/느린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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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조아하자 2015.01.16 21:12 신고 답글 | 수정/삭제 | ADDR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는 이상 어쩔 수 없는 것 같기는 해요. 그래도 노력은 해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