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순하며 정도를 지키는 것에 의지하라
알다시피 주역은 64개의 괘로 구성되어 있다. 천지자연의 이치를 64개의 괘로 담아낸 것이다. 이 64괘만 있으면 우주에서 펼쳐지는 천변만화를 모두 설명할 수 있다. 옛 성현들이 주역을 ‘쉽고 간략’하다[簡易]고 한 것도 이런 이유였다. 하지만 이제 막 주역의 세계에 입문한 우리로서는 64괘도 벅차다. 마치 거대한 산을 마주한 기분이다. 주역이라는 산을 종주하는 것은 보고 배울 거리가 많은 모험이지만 정상이 너무나 멀고 아득해서 기가 팍 꺾인다. 아무리 걷고 걸어도 64괘의 마지막 화수미제까지는 멀어 보이기만 한다.
주역원정대! 이제 절반까지 왔다!
이때는 이정표를 확실히 체크해야 한다. 내가 어디까지 왔는지 앞으로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그래야지 체력을 안배하고 마음을 다잡을 수 있다. 지금 우리 주역 서당은 딱 절반까지 왔다. 64괘의 절반 30번째 중화리가 오늘 살펴볼 괘다. 누군가는 궁금하게 여길 것이다. 64괘라면 32번째 괘가 절반이 아니냐고. 이것은 주역의 구성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주역은 다른 말로 역경(易經)이라고 하는데 상경(上經)과 하경(下經)으로 나누어진다. 상경은 중천건을 시작으로 오늘 살펴볼 중화리까지 30개. 하경은 택산함에서 화수미제까지 34개다. 고로 우리 주역서당은 오늘부로 주역 상경을 마치는 셈이다. 자 그럼 우리의 좌표를 확인했으니 이제 호흡을 고르고 주역이라는 산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어 보자.
중화리 괘사
먼저 중화리의 이름부터 풀어보자. 중(重)자는 ‘똑같은 것이 아래위로 나란히 있다’라는 뜻이고 화(火)는 ‘불’이다. 그럼 리(離)는 무슨 뜻인가? 리는 ‘붙어 있다’, ‘결합하다’, ‘걸리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고로 이것을 다 합치면 밝고 찬란한 불이 연이어 붙어 있는 모습 즉 해가 하늘에 붙어 있는 형상이 바로 중화리다.
자 이번에는 중화리 앞에 나온 중수감과의 관계를 통해서 살펴보자. 중수감은 험난한 물속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것을 나타내는 괘다. 그래서 길(吉)한 괘로는 보지 않는다. 헌데 죽으란 법은 없다고 중화리로 넘어오면 생사의 기로에서 겨우 무언가를 붙잡아서(혹은 걸려서) 의지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주역에서는 길흉화복이 고정된 게 아니다. 중수감에서 힘들었다면 중화리에서 사정이 좀 나아진다.
그런데 꼭 중수감처럼 물구덩이에 빠지는 생지옥을 겪지 않더라도,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타자나 다른 사물에 의지하게 된다. 헌데 이때 아무렇게나 의지해서는 안 된다. 의지하는 대상을 세밀하게 따져보아야 한다. 중화리 괘사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離, 利貞, 亨, 畜牝牛, 吉.(리, 이정, 형, 휵빈우, 길)
리는 바르게 함이 이롭고 형통하니 암소를 기르면 길하리라.
뜬금없는 암소의 등장에 당황하지 마시라. 주역 서당의 독자라면 이제 이런 비유는 익숙할 것이다. 주역에는 암소, 누런 치마, 암말 같은 친숙하고 정겨운 비유들이 자주 등장하니까. 괘사에서 말하는 암소는 육이효를 의미한다. 주역에서 효사를 말할 때 음효는 육(六)이라고 하고, 양효는 구(九)라고 한다는 것을 앞서 배웠다. 그러므로 육이는 중화리괘에서 두 번째에 위치한 음효를 나타낸다.
주역에서는 음을 여섯 효 모두가 음으로 이루어진 중지곤(䷁)에서 나온다고 본다. 중지곤을 상징하는 물상은 땅이고 동물은 소다. 육이효에 등장한 암소도 바로 중지곤괘에서 나온 것이다. 육이는 자리로 볼 때 음이 음자리에 바르게 있고 내괘에서 중을 얻었다.(여섯 효 가운데 홀수는 양의 자리, 짝수는 음의 자리다. 육이는 음이 음자리에 위치했다. 이처럼 효와 자리의 음양이 부합할 때 正이라고 한다. 그리고 여섯 효 가운데 두 번째, 다섯 번째 효는 가운데 있으므로 中이라고 한다.) 이처럼 중정을 다 얻은 육이효는 바르게 ‘걸려’ 있어서 형통하다.
육이는 암소처럼 순한 마음을 기르면 길하다.
주역에서는 자리가 효의 성격을 결정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육이는 자리가 중정한 만큼 암소처럼 순한 마음을 기르면 길하다. 이 말은 우리가 타인이나 다른 대상에 의지할 때도 암소처럼 순하고 바른 마음을 기르는 사람을 찾으라는 의미이다.
중화리 효사
初九. 履錯然, 敬之, 无咎.(초구 이착연 경지 무구)
초구는 밟는 것이 섞이니 공경하면 허물이 없으리라.
양이 맨 처음에 있어서 초구다. 초구에서는 ‘밟을 리(履)’ 자가 나온다. 착연은 갈까 말까 망설이는 것을 뜻한다. 무슨 말이냐면 초구는 중화리괘의 맨 처음에 위치해서 활활 타오르고 있다. 여차하면 앞으로 튀어 나갈 기세다. 하지만 이제 시작 단계이므로 함부로 나섰다간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때는 겸손하고 신중하게 행동해야 허물이 없다.
六二. 黃離, 元吉.(육이 황리 원길)
육이는 누런 리니 크게 길하니라.
이번에는 누런 리가 크게 길하다고 한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하고 스트레스 받을 것 없다. 주역은 괘사와 효사, 여섯 효사들 간에도 일정한 서사를 구성하기가 어렵다. 제각각 딴말을 하고 뜻은 그때그때 다르다. 이것이 주역의 특징이라는 것을 알고 주역을 읽어야 한다. 음이 두 번째에 있어서 육이다. 앞서 살펴보았듯 육이는 중정한 자리다. 동양에서는 중앙에 배속된 색을 황색이라고 본다. 중앙은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중정한 자리다. 그리하여 황리, 누런 리가 나온 것이다.
九三. 日昃之離, 不鼓缶而歌, 則大耋之嗟, 凶.(구삼 일측지리 불고부이가 즉대질지차)
구삼은 해가 기울어져 걸림이니, 장구를 두드리고 노래하지 아니하면 즉 큰 늙은이가 슬퍼함이라 흉하리라.
양이 세 번째에 있어서 구삼이다. 아 이번에도 난해한 말이 나온다. 하나씩 풀어보자. 먼저 해가 기울어져 걸린다는 말은 구삼의 위치를 설명하는 말이다. 구삼은 내괘가 끝나는 자리에 위치한다. 중화리괘 육효를 하루로 본다면 내괘는 오전이고, 외괘는 오후다. 해가 기울어져 걸린다는 말은 해가 오전을 지나 오후에 걸린다는 말이다. 사람으로 치면 황혼에 접어들었다. 그러므로 황혼을 보내는 노인이 슬퍼하지 않도록 장구를 치고 노래를 불러야 한다.
九四. 突如其來如, 焚如, 死如, 棄如.(구사 돌여기래여 분여 사여 기여)
구사는 돌연히 그 오는 것이라. 불사르니 죽이며 버리니라.
양이 네 번째에 있어서 구사다. 구사는 외괘의 시작이자 육오 인군 바로 아래에 있는 강한 신하다. 임금이 유약할 때 바르지 못한 신하는 못된 마음을 품는다. 그리하여 구사도 자신이 강한 것만 믿고 육오 인군을 치고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돌연히 난을 일으킨다. 하지만 난은 실패하고 구사는 죽고 불에 타고 버려지는 징벌을 당한다.
자신의 힘만 믿고 과욕을 부리다간 큰 화를 당한다.
六五. 出涕沱若, 戚嗟若, 吉.(육오 출체타약 척차약 길)
육오는 눈물 나옴이 물 흐르는 듯하며 슬퍼서 슬퍼하니 길하리라.
음이 다섯 번째에 있어서 육오다. 육오는 인군의 자리인데 보다시피 유약한 음이다. 구사 역적의 난을 겪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 탓에 육오는 더욱더 정치에 매진한다. 국가와 백성을 위한 선정을 베푸느라 자나 깨나 눈물을 물 흐르듯이 흘린다. 왕이 이렇게 성심성의를 다 바치니 민심을 화평하고 나라가 편안하여 길하다.
上九. 王用出征, 有嘉, 折首 獲匪其醜, 无咎.(상구 왕용출정 유가 절수 획비기추 무구)
상구는 왕이 써 나가서 치면 아름다움이 있으리니, 머리를 끊고 얻는 것이 그 동무(무리)가 아니면 허물이 없으리라.
양이 맨 위에 있어 상구다. 상구는 양의 정점에 위치해 있다. 그러므로 출정해서 악인을 처단해도 허물이 없다. 헌데 이때 악인의 우두머리만 벌해야지 나머지 무리까지 죽이지는 말아야 한다. 그것은 이 출정의 목표가 악인을 처단해서 나라를 바르게 하는 데 있는 것이지 사람을 죽이는 데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자 이렇게 태양이 세상을 밝히듯 군주가 나라를 환히 비추면서 바르고 평화롭게 하면 허물이 없다.
다시 한 번 정리해보면, 초효는 타오르는 혈기에 방황해도 조급하게 굴지 말고 신중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효는 황리로써 어디로든 치우치지 말고 중도를 지켜야 한다. 삼효는 황혼에 접어들어서도 즐거운 마음을 가지며 자식은 그런 부모님을 위해 노래와 장고로 기쁘게 해드려야 한다. 사효는 강한 것만 믿고 주제를 벗어나는 일을 저질렀다가 목숨을 잃게 되니 조심해야 한다. 오효는 임금으로써 성심성의껏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 상효는 때로는 과감하게 행동해서 끝마무리를 잘해야 한다.
중화리는 타인이나 다른 사물에 의지하거나, 붙어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대상을 선택할 때 잘 살펴보아야 한다. 과연 자신의 위치에 합당하게 처신하는 자인지 아닌지를. 붙잡고 올라갈 대상을 신중하게 선택해야 화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과연 당신은 몇 번째 효를 붙잡으려고 하는가? 유순하며 정도를 지키는 것에 의지하라. 그것이 당신을 살리는 길이다.
글_곰진(감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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