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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인문의역학! ▽/주역서당

지나친 것을 경계하라 - 택풍대과

by 북드라망 2014. 10. 23.


과유불급의 괘 : 택풍대과




지난 시간에 살펴본 산뢰이괘는 기르는 괘였다. 괘의 모양도 입의 모양을 본떠서, 음식으로 기르거나 교육으로 기르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이괘에서 너무 길러지다 보니 몸과 마음이 비대해지거나 지나쳐 바로 다음에 택풍대과괘가 나오게 되었다. 


지나침을 경계하는 택풍대과괘를 알아 봅시다.


산뢰이괘에서 계속 강조했듯이 요즘 맛집 탐방처럼 입을 즐겁게 해줄 강하고 자극적인 맛을 찾아다니는 것은 몸의 생명력을 기르는 방식이 아니다. 때에 맞게 담백한 음식을 먹어 버릇해야 한다.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는 것은 이미 맛의 쾌락에 중독된 것이다. 이처럼 뭐든지 너무 길러지면 지나치게(오버하게) 된다.


사실 알고 보면 이와 같은 감각 기관만 중독되기 쉬운 것은 아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인정이나 칭찬에도 쉽게 중독된다. 그래서 더 큰 인정, 칭찬을 갈구하다가 몸과 마음이 메말라간다. 그렇다면 대과괘에서는 이러한 지나침을 어떻게 경계하고 있을까?



택풍대과 괘사


大過 棟 橈 利有攸往 亨 (대과 동 요 이유유왕 형)
‘대과’는 기둥이 흔들리니, 갈 바를 둠이 이로워서 형통하니라.
彖曰 大過 大者 過也 棟橈 本末 弱也 (단왈 대과 대자 과야 동요 본말 약야)
단전에 이르길 ‘대과’는 큰 것이 지나감이요(지나침이요), ‘동요’는 본과 말이 약한 것이다.
剛過而中 巽而說行 (강과이중 손이열행)
강한 것이 지나치되 중을 하고, 겸손하고 기쁨으로 행함이라
利有攸往 乃亨 大過之時 大矣哉 (이유유왕 내형 대과지시 대의재)
가는 바를 둠이 이로워서 이에 형통하니, ‘대과’의 때가 크도다.
象曰 澤滅木 大過 君子 以 (상왈 택멸목 대과 군자 이)
상전에 이르길 못이 나무를 멸하는 것이 ‘대과’니, 군자가 이로써
獨立不懼 遯世無悶 (독립불구 돈세무민)
홀로 서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세상을 멀리해도 민망하게 여기지 않느니라.



대과는 위아래 음효가 있고, 가운데는 모두 양효가 모여 있다. 위아래는 음효라 약한데, 가운데 양효(구이, 구삼, 구사, 구오)는 모여 있는 탓에 그 강함이 지나쳐서 기둥이 흔들린다고 한 것이다. 단전에서는 대과괘가 비록 강한 것이 지나쳤으나 아래는 손하절 바람괘(☴)로 공손하다는 뜻이 있고, 밖으로는 태상절 못괘(☱)로 기쁘다는 뜻이 있다고 풀었다. 그래서 안으로 공손한 덕을 가지고 밖으로 모든 사람에게 기쁘게 대하기 때문에 그와 같이 가는 바를 둠이 이롭다고 한다. 그렇다면 만약 점을 쳐서 대과괘를 얻게 된다 해도 공손한 덕을 가지고 모든 사람을 기쁘게 대한다면 두려워할 것이 없다.



대상전에서는 물이 나무를 썩게 하는 ‘대과’의 시절에 군자는 도가 사라진 세상을 한탄하거나 고민할 필요 없이 자신의 신념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자기가 할 일을 하고 살면 된다고 말한다. 실제로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대과’와 같은 때에는 현실 정치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을 통해 스스로를 수양하거나 후학을 양성했다.



택풍대과 효사>


初六 藉用白茅 无咎 (초육 자용백모 무구)
초육은 자리를 까는 데 흰 띠를 쓰니 허물이 없느니라.
象曰 藉用白茅 柔在下也 (상왈 자용백모 유재하야)
상전에 이르길 ‘자용백모’는 부드러운 것이 아래에 있음이라.


초육은 ‘대과’괘의 맨 아래에 있고, 또 위로 여러 강(剛)을 보필하고 있으므로 스스로 두려워하고 있다. 손하절(☴)은 겸손함과 음목(陰木)을 나타내기 때문에 초육이 제일 아래에서 겸손히 삼가하여 흰 띠를 까는 것이다. 게다가 흰 띠 위에 제물을 놓고 정성을 드려 제사를 지내니, 지금 자신의 처지가 위태하더라도 허물이 없다. 험한 대과의 시대를 초육과 같이 약한 자가 살아갈 수 있는 지혜는 ‘자용백모’에 숨겨져 있다.   


九二 枯楊 生稊 老夫 得其女妻 无不利 (구이 고양 생제 노부 득기여처 무불리)
구이는 마른 버들이 싹이 나며 늙은 지아비가 그 아내를 얻으니, 이롭지 않음이 없느니라.
象曰 老夫女妻 過以相與也 (상왈 노부여처 과이상여야)
상전에 이르길 ‘노부여처’는 지나침으로써 서로 더불어 사는 것이다.


구이는 그의 짝인 구오와는 둘 다 양이기 때문에 상응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바로 가까이에 초육이 있어 음양이 서로 짝한다. 구이 양이 내괘의 중을 얻고 아래로 초육과 상비관계가 되니 늙은 지아비(구이)가 처자(초육)을 얻어 버들에 싹(자식)이 나는 것이다. 노부가 젊은 처자를 얻음은 통상적 관계에서는 좀 지나치지만, 대과의 때이므로 함께 더불어 살아도 이롭다.


초육과 구이가 음양의 조화를 이룬다.


九三 棟 橈 凶 (구삼 동 요 흉)
구삼은 기둥이 흔들리니 흉하니라.
象曰 棟橈之凶 不可以有輔也 (상왈 동요지흉 불가이유보야)
상전에 이르길 ‘동요지흉’은 가히 도움이 있지 않기 때문이라.


구삼은 ‘대과’의 때에 양(陽)이 양자리에 있으니 그 강한 것이 너무 과하다. 그러므로 대과의 괘사에서 동요(棟橈)라고 한 것도 바로 구삼을 두고 한 말이다. 이렇게 기둥이 흔들려서 위태로운 상황인데 밑의 초육이 음으로 유약하고 허해 받쳐줄 수 없으니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흉하다.


九四 棟隆 吉 有它 吝 (구사 동륭 길 유타 인)
구사는 기둥이 높으니 길하거니와 다른 것을 두면 인색하리라.
象曰 棟隆之吉 不橈乎下也 (상왈 동륭지길 불요호하야)
상전에 이르길 ‘동륭지길’은 아래에서 흔들지 못하기 때문이라.


구사는 대신의 자리에 있고, 양이 음자리에 있으니 대과의 때에 있어서 강유를 겸비한 자이다. 따라서 구오 인군을 도와 대들보를 높이듯이 융성하게 하면 길하지만, 정응(正應)인 초육에게 마음을 주면 꼴이 우스워진다. 앞에서 보았듯이 초육은 이웃에 있는 구이의 아내가 되었기 때문이다. 초육에게만 정신 팔리지 않으면 아래에서 기둥을 흔드는 위험에 빠지지 않는다.


정신을 집중해야 기둥이 흔들리는 위험을 피할 수 있다!


 ‘대과’에서 구삼과 구사는 둘 다 괘의 가운데 있어 대들보의 이미지지만 한자를 비교해보면 그 차이는 명확하다. 구삼은 요(橈)로 기둥이 휘었다고 표현하고, 구사는 륭(隆)으로 대들보가 높이 솟아 있는 것이 유지된다고 표현하고 있다. 대과괘는 지나침의 뜻이 있기 때문에 양이 양자리에 있는 구삼보다 양이 음자리에 있는 구사가 과도하지 않아 좋다.


九五 枯楊 生華 老婦 得其士夫 无咎无譽 (구오 고양 생화 노부 득기사부 무구무예)
구오는 마른 버들이 꽃피며 늙은 지어미가 그 사부(젊은 남자)를 얻으니, 허물은 없으나 명예도 없으리라.
象曰 枯楊生華 何可久也 老婦士夫 亦可醜也 (상왈 고양생화 하가구야 노부사부 역가추야)
상전에 이르길 ‘고양생화’가 어찌 가히 오래갈 것이며, ‘노부사부’가 또한 추한 것이다.


구오 효사는 구이와 비교해서 보면 재미있다. 구오도 구이와 마찬가지로 마른 버드나무이다. 그런데 구이는 생제(生稊)이고 구오는 생화(生華)이다. 여기서 '稊'는 싹 또는 뿌리를 말하고, '華'는 꽃을 말한다. 즉, 구이는 아래로 음(초육)을 얻은 것이므로 뿌리가 나는 것이고, 구오는 위로 음(상육)을 얻은 것으로 꽃이 피는 것이다.



마른 버들에 싹이나 뿌리가 나는 것은 사람으로 말하면 자식을 낳는 것이기 때문에 늙은 지아비가 젊은 아내를 얻어도 이롭지 않음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꽃이 피는 것은 금방 시들어 버리기 때문에 늙은 지어미가 젊은 남자를 얻는 것은 자식을 낳고 기를 수 없으므로 허물도 없고 명예도 없다고 하여 오래가지 못한다는 뜻을 밝혔다.

上六 過涉滅頂 凶 无咎 (상육 과섭멸정 흉 무구)
상육은 지나치게 건너다 이마를 멸함이라 흉하니, 가히 허물할 데가 없느니라.
象曰 過涉之凶 不可久也 (상왈 과섭지흉 불가구야)
상전에 이르길 ‘과섭지흉’은 허물하지 못하느니라.


상육은 음으로써 대과의 극한데 처했다. 지나친 괘의 맨 위에 있으니 자기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험난함을 건너다 이마를 멸하는 화를 입었다. 자기가 너무 지나친 짓을 많이 하다 빠져서 다친 것이니 다른 사람을 탓할 수 없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대과괘는 지나침이 과해서 기둥이 흔들리는 지경이니 크게 위태롭다. 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초육과 같이 겸손하고 삼가는 자세를 유지하거나, 구사와 같이 좀 지나친다 하더라도 더 큰 욕심을 부리거나 딴생각을 하지 않으면 허물이 없다고 주역은 말한다. 사람을 기르는 이괘가 지나침을 의미하는 대과괘로 나아간 것처럼 어쩌면 우리가 삶에서 행하는 것들은 그것이 무엇이든 쉽게 과해지는 방향성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심장에 뜨거운 열정이 있어야 제대로 사는 것처럼 말하는 요즘 시대에는 정말 오버하기 쉽다. 그래서인지 일중독, 알콜중독, 쇼핑중독, 스마트폰 중독 등 우리는 너무나 쉽게 중독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간다. 사실 중독은 우리 존재 자체가 흔들리는 것으로 대들보가 휠 수 있다고 경고하는 구삼 효사에 딱 들어맞는다. 몸과 마음의 축을 무너뜨릴 정도로 열심히 살기를 강요하는 요즘 지나침을 경계하라는 대과괘의 메시지는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다가온다. 


글_임경아(감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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