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끝나는 곳에서 새로운 길이 시작되고
64개의 괘 중 24번째 괘, 오늘의 주인공은 ‘지뢰복’(地雷復)이다. 위쪽의 괘는 땅(☷), 아래쪽의 괘는 우레(☳)의 형상이다. 가장 첫번째 효인 초구만 양(陽)이고, 나머지 다섯 효가 모두 음(陰)이다. 지뢰복의 바로 앞 괘인 ‘산지박’은 반대로 여섯번째 효인 상구가 양이고, 나머지 다섯효는 모두 음이다. 여성들에게 둘러싸인 청일점인 건 동일한데, 위치에 따라 괘의 이야기가 달라지는 것이 오늘의 포인트이다.
초목에 비유하면 ‘산지박’은 열매만 남기고 시든 가을 나무와 같고, 사람에 비유하자면 노인에 해당한다. ‘지뢰복’은 새싹이 움트기 전 땅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봄의 씨앗이며, 아이에 해당한다. 이것은 효의 자리를 시간의 흐름으로 보기 때문이다. (효를 해석하는 다양한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시간이다.) 가을에는 거두는 힘이 길러내는 힘보다 세지만, 동지를 기점으로 점차 양기가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이 꿈틀거리는 단 하나의 양기가 바로 ‘지뢰복 괘’이다. 계절이 순환하듯 다시 봄이 오기 때문에 ‘돌아올 복’(復)이라 한 것이다.
문득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가 떠올랐다. 나우시카가 살고 있는 환경은 그닥 좋지 않다. 문명이 고도로 발달했지만 전쟁으로 인구수가 많이 줄었고, 지형 또한 척박해졌다. 전쟁으로 인해 대부분의 지역은 엄청난 독기를 뿜어내는 부해(腐海)가 되었다. 산소로 호흡하는 생물이 이곳에 가면 몇 분 안에 죽게 될 정도인데, ‘오무’라는 괴물(!)이 이곳에 서식한다. ‘산지박’과 같은 다소 암울한 상황이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나우시카는 부해(정확히는 이곳에 사는 오무)가 독기를 정화시키는 기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겉으로는 음기가 세상을 지배해 곧 망할 것 같지만, 안에서는 양기가 조금씩 만들어지고 있었달까.
그런데 인간들은 오무가 두려워 죽이려 하고, 나우시카는 오무를 지키려 한다. 만약 나우시카가 없었더라면 인간과 오무의 관계는 여전히 적대적이었을 것이다. 바람 계곡 사람들이 나우시카를 아끼고 지키려 한 것처럼, 지뢰복도 초구를 아끼고 북돋아 주어야 한다. 이것이 지뢰복의 전체적인 분위기이다. 지뢰복의 미래는 초구의 어깨에 달려있는 셈이다. 그래서 ‘지뢰복’은 이제 막 기운을 모으기 시작하는 초구가 가장 중요하다.
자라는 양기(陽氣)를 지켜라!
復亨(복형) 복은 형통하다
出入无疾(출입무질) 나가고 들어와도 병이 없고
朋來无咎(붕래무구) 벗이 오면 허물이 없다.
反復其道(반복기도) 그 도를 반복하여
七日來復(칠일래복) 7일이 되어 돌아와 부활하니
利有攸往(이유유왕) 가는 바가 있으면 이롭다.
괘의 이름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 괘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좋다. “벗이 오면 허물이 없다”는 부분은 약한 초구를 다른 효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한다. 봄·여름·가을·겨울은 매번 다르지만 계절이 순환하는 법칙 자체는 변하지 않으므로 “그 도를 반복”한다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7일 만에 돌아오게 되는 것일까. 열 두달과 괘의 관계를 살펴보기로 하자.
11월이 지뢰복이다. 여기부터 7달을 지나면 5월인 천풍구에 이른다. 양의 기운이 한칸씩 차오르면서 중천건에서는 꽉 차고, 천풍구가 되면 음기의 역습이 시작된다. 1년 단위에서는 7달이 되고, 하루 단위에서는 7일이 되는데, 양기와 음기가 대전환을 겪게 되는 변화의 마디를 숫자 7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이치를 아는 왕은 동지에 관문을 닫아서 상인이나 여행객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때는 각 집마다 뚜껑이나 문의 관리를 철저하게 하는데, 그것은 싹트고 있는 양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사람의 활동과 천지의 기운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고 생각했기에 노력이 필요다고 보았다. “가는 바가 있으면 이롭다”고 한 것은 적극적으로 양기를 지키고 키우라는 말이다. 반대로 산지박은 양기가 퇴장하는 시점이므로 신중해야지, 나서면 안 된다.
첫번째 효가 ‘지뢰복’의 중심이다
初九 不遠復 无祗悔 元吉(초구 부원복 무지회 원길)
초구는 멀리가지 않고 돌아오면 후회에 이르지 않을 것이니 크게 길하다.
象曰 不遠之復 以脩身也(상왈 부원지복 이수신야)
상에서 말하길 멀리가지 않고 돌아올 수 있는 것은 수신을 했기 때문이다.
다른 괘에서는 첫번째 효를 미숙한 상태로 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지뢰복에서는 초구가 가장 중요하므로 초구가 크게 길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멀리가지 않고 금방 돌아와야 길하다고 한 것은 무슨 의미일까. <바람 계곡 나우시카>를 다시 떠올려 보자. 인류가 멸종할 위기에 처해도 전쟁은 사라지지 않는다. 누군가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방법을 택하기 때문이다. 만약 여기에서 대다수의 사람이 파괴에 몰두한다면, 인류는 사라지게 되었을 것이다. 나우시카는 전쟁을 멈추게 하려 했고 인류는 생존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금방 돌아오는 것’의 해석과 가깝지 않을까. 공자는 초구가 ‘이 길이 아닌가봐’라며 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를 개인의 덕(수신)으로 해석한 것이다.
六二 休復 吉(육이 휴복 길)
육이는 돌아옴을 아름답게 여기면 길하다.
象曰 休復之吉 以下仁也(상왈 휴복지길 이하인야)
상에서 말하길 돌아옴을 아름답게 여기는 것이 길한 것은 인자(仁者)에게 낮추기 때문이다.
효끼리도 각각의 짝이 있다. 그런데 모든 효가 초구에게만 관심을 보이므로, 육이는 그것이 좀 불편하다. 그러나 초구가 제대로 자라지 못하면 다 같이 죽자는 의미인지라 육이는 대의를 위해 ‘초구의 컴백’을 잘 받아들여야 한다. 인(仁)은 사람과 사람이 서로 기대고 있는 모습에서 왔다. 인간에게 내재한 마음의 본질로 볼 수 있는데, 오행에서는 목(木)에 인(仁)을 배속시켰다. 만물을 살리는 봄의 기운을 인(仁)으로 본 것이다. 지뢰복에서는 초구가 ‘인’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六三 頻復 厲无咎(육삼 빈복 여무구)
육삼은 돌아오는 것을 조급해하면 자기 살을 도려내는 아픔이 있지만 허물은 없을 것이다.
象曰 頻復之厲 義无咎也(상왈 빈부지려 의무구야)
상에서 말하길 돌아오는 것을 조급해하여 자기 살을 도려내는 아픔이 있지만 의당 허물이 없다.
육삼은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에 불만이 많다. 그래서 변화를 추구하고, 초구가 등장하면 몹시 반긴다. 그러다보니 초구에 무한애정을 쏟고,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자기 살을 도려내는 아픔’이다. 하지만 이것은 초구를 보호하기 위해서 나타나는 것이므로 크게 잘못될 일은 없다고 보았다.
六四 中行獨復(육사 중행독부)
육사는 시중을 행하여 돌아오는 것을 홀로 지킨다.
象曰 中行獨復 以從道也(상왈 중행독부 이종도야)
상에서 말하길 시중을 행하여 돌아오는 것을 홀로 지키는 것은 도를 따르는 것이다.
네번째 효는 첫번째 효와 서로 응하는 관계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모두 ‘No’라고 해도 육사만큼은 초구에게 ‘Yes’라고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새로운 변화를 반갑게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새로운 것은 기존의 틀을 깨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육사에게 중요한 미션이 두 가지가 있다. 첫번째는 때를 잘 파악하라는 의미인 시중(時中), 두번째는 초구를 지키라는 의미인 독행(獨復)이다. 이 미션의 수행이 순리를 따르는 도(道)가 된다.
六五 敦復无悔(육오 돈복무회)
육오는 돌아오는 것을 도탑게 여기면 후회함이 없을 것이다.
象曰 敦復无悔 中以自考也(상왈 돈복무회 중이자고야)
상에서 말하길 돌아오는 것을 도탑게 여기면 후회함이 없는 것은 중심의 입장에서 스스로 살폈기 때문이다.
육오는 이 괘의 전체를 이끌어가는 위치이다. 집에서는 부모, 나라에서는 왕이 된다. ‘敦’은 관계가 돈독하다고 할때의 의미이며, 육오가 초구를 도탑게 여겨야 좋다고 보는 것이다. 예를 들면 보수세력이 너무 부패했고 왕이 이것을 이미 알고 있는 상황이라 치자. 여기서 왕은 초구인 신흥세력과 손을 잡아 이쪽을 키우고, 보수세력을 과감하게 정리해야 한다. (물론 현실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여하튼 육오는 ‘중심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초구를 보호하고 키우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을 알게 되며, 초구를 주도적으로 도와야 한다.
上六 迷復 凶(상육 미복 흉)
상육은 돌아오는 것에 대해 미혹되면 흉하다.
有災眚 用行師 終有大敗(유재생 용행사)
재앙이 생겨 군대를 사용하면 결국 크게 패할 것이다.
以其國 君凶 至于十年 不克征(이기국 군흉 지우십년 불국정)
나라의 경우라면 임금이 흉할 것이니 십년에 이르러도 진압할 수 없을 것이다.
象曰 迷復之凶 反君道也(상왈 미복지흉 반군도야)
상에서 말하길 돌아오는 것에 대해 혼미하면 흉한 것은 군도(君道)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상육은 가정에서는 할머니, 나라에서는 원로이다. 보수파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데, 상육은 초구와 대립하게 된다. 군도(君道)는 임금의 자리에서 하늘을 대신해 백성의 뜻을 대행하는 존재이다. 군도를 행하지 못하는 임금은 물러나야 하는데, 스스로 물러나지 않는다면 혁명에 의해 물러나게 된다. 그래서 상육은 자신이 미혹된 길에 빠진다면 흉하다고 한 것이다.
<베르사이유의 장미>라는 만화책에는 루이 16세와 앙투아네트 왕비가 등장한다. 루이 16세는 자물쇠 만드는 것을 좋아해 그쪽에 몰두하였는데, 국정에 소흘한 틈(!)에 왕비와 관련된 여러 가지 사건들이 터진다. 결국 혁명이 일어나고, 루이 16세는 단두대에서 죽음을 맞이한 유일한 왕으로 기록된다. 만약 루이 16세가 취미가 없었더라면 세계의 역사는 또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를 일이다.
지금까지 ‘지뢰복’의 괘와 각 효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위에서 설명했던 <바람 계곡 나우시카>는 만화책과 영화가 있는데, 초반은 비슷하지만 후반부가 많이 다르다. 개인적으로는 만화책의 내용을 더 좋아한다. 짧게 소개를 하자면 만화책에는 ‘신’이 세계를 멸망시키려는 주동자로 등장한다. 그가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이유는 더럽혀진 것들을 정화하기 위해서이다. 그 신과 만난 나우시카는 이런 이야기를 한다.
“절망의 시대에 이상과 사명감에서 네가 만들어졌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겠어. 그 사람들은 왜 몰랐을까? 청정과 오염이야말로 생명이라는 것을. 고통이나 비극이나 어리석음은 청정한 세계에서도 없어지지 않아. 그것은 인간의 일부니까….”
─ 미야자키 하야오, 『바람 계곡 나우시카 7』, 학산문화사
그리고 인간들은 위험한 어둠이고, 생명은 빛이라는 신의 말에 나우시카는 “생명은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빛”이라고 대답한다. 우리에게는 명석판명한 것, 질서정연한 것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극에 달하면 ‘파괴적인 정화’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라 생각한다.
나우시카의 대답은 『주역』과 통한다. 어떤 순수한 끝, 완전무결한 것은 없다. 양이 극에 달하면 음이 시작되고, 음이 극에 달하면 다시 양이 시작되는 법칙만이 계속 돌아올 뿐이다. 이 법칙이 사계절의 순환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역사로 드러나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뢰복은 이러한 ‘법칙의 시작’을 보여주는 괘라 할 수 있겠다.
이민정(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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