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질빈빈(文質彬彬)의 괘 : 산화분(山火賁)
오늘 살펴볼 산화분괘는 “꾸미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지난 시간의 화뢰서합괘는 씹어서 합하는 괘였다. 서괘전에 “서합은 합함이니, 물건은 구차히 합할 뿐이어서 안된다. 그러므로 분괘로 받았으니 분은 꾸밈이다” 라고 하였다. 물건이 합하여 바탕이 만들어졌으면 이제 꾸밈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드라마 <정도전>을 보면 정도전은 사병혁파를 추진하다 이방원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사병혁파는 결국 이방원에 의해 시행된다. 태종 이방원은 사병을 국가장치 안으로 포획하는 등 다양한 왕권강화 정책을 시행하여 조선 건국 초의 혼란을 마무리한다. 그렇게 나라의 기틀을 세운 후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된다. 태종이 혼란한 상황을 씹어서 조선이라는 나라의 실질을 만들었다면 세종은 이후 종묘제례악을 비롯해 문화를 만들었다. 이것은 화뢰서합에서 산화분으로 넘어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의 문질을 꾸미기 위해 다투었던 숙명의 라이벌
그런데 여기서 이 문화·문명의 文(무늬, 빛깔)이라는 것이 자칫 잘못하면 일의 실속은 없이 겉만 그럴듯하게 꾸미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기에 『주역』에서는 그 지점을 계속 경계하고 있다. 『논어』에서도 이와 통하는 내용이 있다. “질(質)이 문(文)을 이기면 야(野)가 되고 문이 질을 이기면 사(史)가 된다. 문과 질을 잘 조화시키면 군자가 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말 그대로 밖으로 드러나는 문식(文飾)이 본바탕을 제대로 나타내지 못하면 거칠고, 그와 반대의 경우에는 허식만 남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산화분괘에서는 꾸밈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알아보자.
괘사
賁, 亨, 小利有攸往(분 형 소리유유왕)
분은 형통하니 가는 바를 두는 것이 조금 이롭다.
彖曰 賁, 亨, 柔 來而文剛故 亨 分剛(단왈 분 형 유 래이문강고 형 분강)
단전에 이르길 분은 柔가 와서 剛을 무늬하는 까닭에 형통하고,
上而文柔, 故小利有攸往. 天文也(상이문유 고소리유유왕 천문야)
剛을 나누어 올라가서 柔를 무늬하는 까닭에 가는 바를 둠이 조금 이로우니 천문이다.
文明以止, 人文也. 觀乎天文, 以察時變(문명이지 인문야 관호천문 이찰시변)
문명해서 그치니 인문이니, 천문을 보아서 때의 변화를 살피며.
觀乎人文, 以化成天下(관호인문 이화성천하)
인문을 살펴서 천하를 화하여 이루느니라.
象曰 山下有火, 賁, 君子以明庶政, 无敢折獄(상왈 산하유화 분 군자이명서정 무감절옥)
상전에 이르길 산 아래 불이 있는 것이 분괘이니, 군자가 본받아서 여러 정사를 밝히되 옥사를 판결하는데 함부로 하지 않는다.
산 아래에 불이 있는 산화분
비는 꾸미니까 형통하다. 그러나 꾸미는 것이 크게 번잡하면 그 본바탕을 없어지게 하므로 나아가는 것이 조금 이롭지 크게 이롭지는 못하다고 한다. 단전의 내용을 보면 산화분은 ‘지천태괘’의 태평한 세상에서 나왔다. 본래 곤괘와 건괘로 이루어진 지천태괘의 구이와 상육이 서로 자리바꿈하여 산화분이 되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柔(곤괘)가 와서 剛(건괘)를 꾸며서 형통하고, 剛이 올라가서 柔를 꾸몄으므로 가는 것이 조금 이롭다고 한다. 이렇게 서로 강유가 뒤섞이고 교착하여 운행하니 이는 하늘의 문채(文彩)이다. 괘 전체를 보면 불(火)괘가 안에 있어 문명하고 산(山)괘가 밖에 있어 '그칠 지(止)'하여, 문명함으로써 그친다고 풀이한다. 여기에서 止는 최선의 자리에서 멈춰서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문명한 시대가 되어 그칠 때에 그치는 지어지선(止於至善)을 하는 것이 인문(人文)이다. 천문에 대한 관찰을 통해서 사계절의 변화 법칙을 알고 이에 따라 인문도 살핀다. 즉 자연의 원리에 따라 인간 삶의 질서를 관찰하여 예악(禮樂)과 같은 문화로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상전에서 괘의 모양으로 보면 산 아래 불이 있는 것이 산화분괘다. 때문에 하괘인 리괘의 밝은 뜻에 따라 군자가 문덕을 펴서 여러 정사를 밝힌다. 그런데 이때 옥사를 판결하는데 유의하라고 한다. 평화로운 문명의 정치에서는 형벌로 다스리려고 하면 안되기 때문이다.
효사
初九, 賁其趾, 舍車而徒(초구 분기지 사거이도)
초구는 그 발꿈치를 꾸미니, 수레를 버리고 걷는다.
象曰, 舍車而徒, 義弗乘也(상왈 사거이도 의불승야)
상전에 이르길 수레를 버리고 걸어감은 의리로 타지 않는 것이다.
초구는 맨 아래 발꿈치이다. 그 발꿈치를 꾸미는 것은 수레를 버리고 걷는 것이니 오히려 발꿈치를 수고롭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수레의 상(狀)은 이허중 불괘에서 나왔다. 그런데 초구는 왜 걸어가는가? 괘를 보면 초구와 상응하는 육사는 멀리 있고 육이는 바로 위에 있다. 초구가 쉽게 만날 수 있는 육이를 버리고 수고롭게 자신과 응하는 육사에게 가는 것을 수레를 버리고 걸어간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것은 꾸밈을 받지 않음으로 완성되는 초구의 꾸밈이다.
六二, 賁其須(육이 분기수)
六二는 그 수염을 꾸민다.
象曰, “賁其須”, 與上興也(상왈 분기수 여상흥야)
상전에 이르길 그 수염을 꾸밈은 위와 더불어 일어나는 것이다.
여기서 上은 구삼을 말한다. 구삼은 양이므로 딱딱한 턱이 되고 육이는 음이므로 부드러운 수염이 된다. 그 수염을 꾸민다는 것은 구삼이 일어나면 육이도 일어난다는 말이다. 음은 양을 따라서 동하고 문채는 본바탕에 의지하여 행해지니 마치 수염이 턱에 붙어서 움직이는 것과 같다.
문질은 턱과 턱수염의 관계!
九三, 賁如, 濡如, 永貞吉(구삼 분여 유여 영정길)
九三은 함께 꾸미고 젖음이니, 오래도록 바르게 하면 길하다.
象曰, “永貞之吉”, 終莫之陵也(상왈 영정지길 종막지능야)
상전에 이르길 永貞해서 길함은 마침내 능멸하지 못하는 것이다.
구삼은 육이와 육사 사이에서 그들로 인해 푹 젖어 있는 상태이다. 어디서 어떻게 꾸며야 할지를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구삼은 양이 양자리에 바르게 있어 육이나 육사에게 조금도 정신을 놓지 않는다. 결국 구삼은 오래도록 바르게 하므로 육이, 육사 음들은 감히 구삼을 능멸하지 못한다. 구삼은 자신을 영정(永貞)하게 지킴으로 완성되는 꾸밈이다.
六四, 賁如, 皤如, 白馬翰如, 匪寇, 婚媾(육사 분여 파여 백마 한여 비구 혼구)
육사는 꾸미되 희며 흰 말이 나는 듯하니, 도적질 하러 온 것이 아니라 혼인하려는 것이다.
象曰, 六四當位, 疑也, “匪寇婚媾”, 終无尤也(상왈 육사 당위의야 비구혼구 종무우야)
상전에 이르길 육사는 마땅히 의심하는 자리니 비구혼구하는 것은 마침내 허물함이 없음이라.
산화분괘에서 초구와 육사만이 응하고 있다. 육이는 육오와 응하지 못하므로 할 수 없이 구삼과 꾸며야 하고 육오도 이런 식으로 상구와 꾸미는 것이다. 유일하게 응하는 초구와 육사는 서로에게 가기 위해 가까이에 있는 효들을 의심하게 된다. 때문에 초구도 육이를 피하기 위해 수레를 타지 않았고 육사는 구삼을 의심한다. 그러나 구삼은 도적이 아니라 청혼을 하려는 것이기에 마침내 허물이 없다.
구삼이 도적이 아니라 청혼을 하는 것이다.
초구와 육사는 유일하게 정응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운명적으로 서로를 꾸미는 관계를 타고났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이웃 효들의 무늬가 더 화려하고 뛰어난 것처럼 보이고, 위치상 가까이 있어 더 유혹적이다. 게다가 육이는 이웃 구삼과 육오는 이웃 상구와 서로 꾸민다. 그러니 초구와 육사 입장에서는 '왜 우리만 가까운 이웃을 두고 멀리가야 한단 말인가'라는 불평이 나올 수 있다.
이 모든 불편함을 감수하고 본질이 응하는 초구와 만나기 위해 육사는 이웃과 손쉽게 꾸미지 말고 마땅히 의심해야 한다. 그렇게 어려운 길을 기꺼이 가는 마음이 육사의 꾸밈이다.
六五, 賁于丘園, 束帛戔戔, 吝, 終吉(육오 분우구원 속백 잔잔 인 종길)
육오는 동산에 빛남이니, 묶은 비단이 자잘하면 인색하나 마침내 길하리라.
象曰, 六五之吉, 有喜也(상왈 육오지길 유희야)
상전에 이르길 육오의 길함은 기쁨이 있으리라.
육오는 유깅와 음양음이 되지 않으니 이웃의 상구와 꾸며야 한다. 상구와 꾸며지면 간상련 산괘가 되기 때문에 언덕이 나오는 것이다. 육오는 인군의 자리에 있기에 그 꾸미는 것이 인색하게 보일지라도 잔잔하고 검소하게 해야 한다. 공원을 꾸미더라도 자그마한 동산(丘園)정도로 해야 한다. 또한 육오가 여자로서 상구에게 시집을 간다고 할 때도 동산을 꾸미듯이 검소하게 해야 한다. 효사에서는 작은 비단 묶음을 가지고 시집간다고 표현한다. 그렇게 인색하나 길하다는 것은 인군이 나라살림을 알뜰살뜰하게 해야 함을 말한다. 육오는 능력은 충분히 있지만 인색할 정도로 소박하게 드러내야 길하다. 꾸미지 않아야 빛나는 질박함. 그것이 육오의 꾸밈이다.
上九, 白賁, 无咎(상구 백분 무구)
상구는 희게 빛나면 허물이 없으리라.
象曰, “白賁无咎”, 上得志也(상왈 백분무구 상득지야)
상전에 이르길 희게 빛나면 허물이 없음은 위에 있으면서 뜻을 얻음이라.
상구는 지천태괘의 두 번째 양이 위로 올라가 천문(天文)을 이룬 자리다. 양이 올라가 柔를 꾸미니 꾸밈의 공덕을 이루었다. 또한 ‘꾸미다’라는 뜻을 가진 산화분괘의 마지막에서 영화로움이 다해서 희게 빛나는 것이다. 꾸밈의 공덕을 이룸으로써 문채가 본바탕으로 되돌아가 간괘의 상효에서 멈춘다. 꾸밈이 지극해져 오히려 본바탕으로 돌아간 모습. 그것이 상구의 꾸밈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산화분괘는 음양의 꾸밈이 그 내용이다. 산화분괘 전체를 보면 초구는 상응 관계에 있는 육사, 육이는 이웃의 구삼, 육사는 이웃의 상구와 서로 잘 꾸며지고 있다. 그런데 이 꾸밈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문채와 본바탕이 서로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동의보감』에도 “형(形)과 기(氣)가 서로 맞으면 장수하고 서로 맞지 않으면 요절한다”고 나와 있다. 몸에서도 형체와 기운이 서로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기가 실하면 형도 실하고, 기가 허하면 형도 허한 것이 정상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문과 질은 항상 서로 부합해야 한다. 그렇다면 앞에서 산화분괘의 시대를 살았던 것으로 언급했던 세종은 새로운 문치의 시대를 열면서 문질빈빈(文質彬彬)을 어떻게 구현하고자 했을까? 세종은 종묘제례악을 직접 만드는 등 문화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예악(禮樂)을 통해 조선을 유교적 이상국가로 만들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결국 세종이 바라본 문화란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것이지만, 최선의 상태에서 그칠 수 있어야 하는 것. 즉 지어지선(止於至善)의 긴장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럴 수 있을 때 문질빈빈이 가능하니 말이다.
비단 통치에서만이 아니라 우리 삶에서도 본바탕과 꾸밈간의 호응과 긴장은 중요하면서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나 질(質)보다 문(文,紋)쪽으로 무게중심이 크게 기울어진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산화분괘가 알려주는 꾸밈의 지혜는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다가온다.
임경아(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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