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글이 만든 삶, 삶을 불러온 운명

글이 만든 삶, 삶을 불러온 운명
-글쓰기와 사주, 그리고 운명-



책은 저자의 얼굴과 함께 읽는 것 같다. 글에 집중하려 해도 자꾸 문장 사이로 저자의 얼굴이 슬금슬금 기어 올라온다. 아마 대부분 책을 그렇게 읽었지 싶다. 책 내용에 동감하며 읽다가도 신문 어디선가 보게 된 저자의 삶에 뭔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으면 이내 글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된다. 아마도 우리가 이미 글은 저자의 삶을 표현한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글과 삶의 일치’는 그만큼 우리에게 아주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내가 사는 모양과 내가 쓴 글은 얼마나 가까이 있을까? 이런 질문은 글 쓰는 이들에게는 아주 흔한 질문이며 반드시 풀어야 할 문제로 인식된다. ‘글과 삶의 일치’라는 이 간명한 표어는 하나의 정언명령이 되었다. 그래서 모든 글은 이 명령을 따라야만 글이 될 수 있다. 만일 그런 글이 아니라면 위선이거나 기만이 된다. 설사 표면상 그런 위선의 글, 기만의 글이 가능하더라도, 그런 글은 글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정언명령에 의한다면 글은 삶과 일치할 때만 글일 수 있을 것이니까. 삶이 아닌 글은 ‘글이 아닌 글’, ‘비ㅡ문(非ㅡ文)’일 뿐인 거다.
 
그러나 여기에 약간 복잡한 고민이 발생한다. 내가 사는 모양과 내가 쓴 글이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과연 무엇으로 알 수 있을까? 당신은 진정 삶대로 글을 쓰고 있는가? 그것을 무엇으로 확신하고 있는가? 여기서 나는 이 문제를 타자에게 증명하기 위해서만 고민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나에게 나의 글과 나의 삶이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무엇으로 확신시킬 수 있는가? 


그러나 이 문제가 일치의 정도를 추적하는 문제일뿐이면 의외로 이야기는 쉬워진다. 일치성을 계산해내는 방법론만 있으면 될 것이니 말이다. 우선 글의 내용을 분석하고 분류한다. 그런 다음 그 결과를 마찬가지로 분석하고 분류한 글쓴이의 삶과 비교해보고, 일치·불일치를 명석판명하게 계산하면 될 것이다. 물론 기술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닐 듯하다. 요즘은 대용량 뉴스 데이터도 집합적으로 통계화하는 빅데이터 시대 아니던가. 그런 기능이 극대화된다면 내가 쓴 글에 표현된 삶의 방식과 의미가 통계화될 날도 멀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열심히 살다보면 50% 삶과 일치, 90% 삶과 일치 같은 표현을 볼 날도 멀지 않아 보인다. 글과 삶이 모두 글과 삶을 그만두고 수치로 뛰어드는 순간이다. 물론 방법론을 기술적으로만 상상할 필요는 없다. 제3자가 판결을 해주는 방법도 있을 수 있다. 내 글과 내 삶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권위있는 제3자나 다수가 일치와 불일치를 판결해 주는 것이다. 글을 읽는 독자는 그런 제3자의 판결을 보기만 하면 글의 진가를 판단할 수 있을게 아닌가.



글이 삶을 만든다


그러나 이상하다.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는 이면에는 글을 삶의 재현으로 보는 사고가 깔려 있는 것이다. 여기서 글이란 삶을 잘 서술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사는 모양을 잘 살펴서 그 모양대로 글을 써야만 기만이 되지 않는다. 결국 글과 삶의 일치는 삶의 모습에 맞게 글을 쓰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이렇게 되면 ‘일치성’은 글이 삶을 얼마나 잘 모방했느냐는 문제로 귀결될 뿐이다. 그야말로 실증적인 글, 경험적인 글만 좋은 글이 된다. 더 위험한 것은 기존의 삶을 잘 서술한다는 것이 부지불식간에 기존의 통념대로 쓴다는 의미를 내포한다는 점이다. 오로지 실증적인 태도로 기존 통념에 부합되게 사실들을 나열하는 것만 반복한다. 글과 삶의 일치는 자기도 모르게 통념과 통계의 문제로 둔갑하고 만다.
 
그래서 좀 다르게 접근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런 생각에는 삶이 먼저 진행되고, 글은 후행적인 것으로 보는 시선이 숨겨져 있다. 전형적인 모방 프레임이다. 여기서 벗어나 다른 관점을 취해보자. 그러나 다른 관점을 취하자마자 봉착하는 난점이 있다. 그런 글은 혹시 삶이 슬그머니 빠져나간 글이 되고 마는 것은 아닌가? 기존 통념은커녕 삶의 생생함에서도 멀어지는 글이 되고 마는 것이 아닐까? 이런 난점을 돌파하고 ‘글과 삶의 일치’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다소 복잡한 전략을 필요로 한다. 다음은 들뢰즈가 살펴봤던 마조히스트의 이야기이다.


[마조히스트들에 의해서-인용자] 마조히즘에서 사용되고 있는 절차는 바로 계약이다. 계약은 주인공과 여성 사이에서 이루어지며, 이에 따라 정확한 시점과 한정된 기간 동안 여성에게 남성에 대한 모든 권리가 주어진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마조히스트는 아버지의 위험성을 몰아내며 현실과 경험의 일시적인 질서와 아버지가 영원히 추방된 상징적 질서의 일치를 꾀하는 것이다.....우리는 여기에서 매를 맞고 굴욕과 조롱을 당하는 것이 마조히스트의 내부에 숨어 있는 아버지의 이미지, 아버지와 닮은 어떤 것, 아버지의 공격적인 복귀 가능성이라는 것을 보았다. 맞고 있는 사람은 어린이가 아니라 바로 아버지인 것이다. 이와 같이 해서 마조히스트는 아버지의 역할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재생을 위한 준비로서 자신을 해방시킨다.


─질 들뢰즈, 『매저키즘』 79쪽, 강조는 저자 강조


마조히즘은 대체로 남성이 상대자 여성으로부터 폭행이나 학대를 받으면서 성적으로 만족하는 변태성욕으로 알려져 있다. 피해자 남성은 여성 박해자의 매질을 받으며 쾌감을 느낀다. 특이한 점은 이 행위 전에 피해자 남성이 계약서를 작성해서 여성 박해자가 서명하도록 설득하고 교육한다는 점이다. 자흐 마조흐의 『모피를 입은 비너스』에서는 세비린이 완다에게 교육한다. 그리고 그 계약서의 내용대로 똑같이 행동하기를 요구한다. 이 구도에서 계약이 차지하는 위치와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즉 그것은 행동의 판본이 행동에 앞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영화 '모피를 입은 비너스', 1994


이 마조히즘의 프로세스는 크게 네 가지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우선 주체가 현실을 부인(否認)하는 과정이다. 어떤 타당성이 자리 잡기 위해서는 그 타당성을 해치는 사실들이 발견되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런 사실들이 발견되더라도 타당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발견된 사실들을 사실로서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을 ‘부인’(否認)이라고 한다. 프로이트가 보여준 부인의 가장 훌륭한 예는 물신숭배다. 물신은 대개 여성 남근(fermale phalus)의 이미지 또는 그 대체물이다. 이를 통해서 여성에게 페니스가 없다는 사실이 부인된다(“아니야, 여자에게도 분명히 페니스가 있어!!!”). 여기서 물신의 이미지로 선택되는 대상은 여성의 신체에 페니스가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바로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대상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린아이는 커가면서 어머니는 페니스가 없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그러나 그 사실을 부인하고, 계속 어머니가 페니스가 있다는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어린아이)이 어머니에게 페니스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바로 직전에 마지막으로 보았던 대상을 물신으로 삼게 된다는 말이다. 누워 있는 아이가 밑에서 올려다 본 ‘신발’이 그런 이미지를 이룬다. 결국 물신이란 자신이 믿고 있던 어떤 타당성을 해치는, 그래서 해로운 발견으로부터 생긴 두려움을 줄이기 위하여 끊임없이 회귀하는, 정지되고 얼어붙은 이차원적인 이미지이다. ‘신발-물신’을 상상하며 현실에 없는 여성 페니스의 타당성을 믿고 강화하는 것이다.
 
여기서 마조히즘의 두 번째 단계가 나온다. 앞서 말한 이미지(‘신발’)는 한 장의 정지된 사진처럼 다가온다. 이 지점에서 현실은 일시적으로 정지된다. 현실을 지배하던 상징적 질서가 멈추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물신이라는 부인은 역설적으로 저항이다. 왜냐하면 현실의 여성은 페니스가 없는데도, 주체는 자신의 환상을 강화하며 여전히 페니스가 있는 것으로 주장하는 것이니까. 이때 사진으로 돌아오는 정지화면(여기서는 ‘신발’)은 ‘페니스가 없다’는 현실의 괴로움을 중화시켜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지금까지 지배하던 상징 질서를 멈추면서 생기는 균열을 부드럽게 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저항하는 자들’은 세상을 정지시키는 자신들만의 환상을 공유한 자들인 셈이다. 기존 상징질서와 다른 상징을 꿈꾸는 자들이다. 자신들이 꿈꾸는 삶을 선택한 것이다.
 
다음 세 번째 단계가 진행된다. 환상에 의해서 현실의 사태(‘페니스가 없다’)를 포섭한다. 바로 환상역할을 하는 것이 여기서는 ‘계약’이다. 사전에 작성해둔 계약에 의해서 현실의 부인이 수행된다. 즉 계약서에 명시된 대로 행위를 중지시키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환상이 현실을 포섭한다. 현실의 행위는 계약에 의해 매번 지시된다.
 
이제 마지막 네 번째 단계이다. 드디어 계약에 의해 현실을 움직일 수 있게 된다. 즉 계약이 행위를 장악한다. 뒤집어 말하면 계약에 의해서 주체가 현실에 저항하는 것이 된다. 마치 페니스 없는 현실에게 페니스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이 순간 페니스 없는 현실이 계약에 의해 뒤집힌다. 따라서 이 단계에 이르러 계약은 현실을 움직이는 조건이 된다. 결국 마조히즘은 환상에 의해 현실을 뒤집고 저항하는 방법을 보여준다. 계약서는 그런 방법과 과정 안에 위치한다. 계약서에 쓴 대로 현실이 움직인다. 박해자 여성은 이 계약서에 따라, 다시 말하면 박해자 여성(현실)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피해자 남성(주체)의 환상에 따라 정지하거나 매질을 한다. 박해자는 자신의 의지를 빼앗기고 만다. 환상이 현실을 움직이는 것이다.
 
이 순간 아주 묘한 쾌감이 발생한다. 피해자 남성은 고통 속에서도 쾌락을 느낀다. 왜냐하면 박해자 여성이 계약에 따라서만 움직이고 정지하는 반복이 우스꽝스럽기 때문이다. 여기서 마조히스트는 연극을 상연하는 연출자의 태도와 같다. 계약서는 연기의 대본이다. 그런데 여기서 연기자는 둘이다. 박해자 여성이 때리고 있는 ‘나’는 통상적인 ‘나’가 아니다. 그것은 자아 속에 숨겨진 ‘아버지’로서의 ‘나’이다. 또한 그 반대편에 서 있는 박해자 여성은 ‘초자아’라고 할 수 있다. 내 안의 자아와 초자아가 밖으로 나와 피해자 남성과 박해자 여성이라는 연기자로 분리된다. 여기서 초자아란 양심, 법 같이 나(자아)를 규제하고 통제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법이 나의 계약에 의해 조종당하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발생한다. 법은 원래부터 만들어지고 조정 당한다는 것이 밝혀진다. 법은 원래 연극적인 상황에서 하나의 요소로서만 존재했던 것임을 알게 해준다.


그래서 우스꽝스럽다. 이런 허약한 법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다니. 세상의 통념과 법칙들이란 그런 것이다. 그저 상징적인 질서일 뿐인 거다. 박해자 여성(초자아, 법)은 피해자 남성(자아)에 의해 조롱당한다. 초자아를 끄집어내서 웃음거리로 만들어 태워버리는 방식이다. 마조히스트는 이 연극의 상연을 통해서 내 속에 있는 초자아를 만천하에 웃음거리로 만들어 없애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서 내 속에 숨겨져 있던 초월적 법 혹은 통념들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무너지는 경험을 한다. 이게 극한에 가면 그런 쾌감조차 없어지는 극적인 ‘정지 상태’가 된다. 들뢰즈는 이것을 ‘새로운 무성(無性)의 인간’이라고 명명했다. 쾌락조차 부인하는 것이다. 니체라면 완전한 사이클 끝에 돌아간 영원회귀라고 불렀을 그것이다. 또한 프로이트라면 죽음충동이라고 지칭했을 그것이다. 결국 들뢰즈의 마조히즘은 내 자신의 통념, 기존의 나를 무너뜨리는 전투적 전략이다. 이것은 계약에 의해서 근본적으로 무너지는 전략이자, 새로운 인간을 성립시키는 전략인 셈이다.


구스타프 클림트, Minerva or Pallas Athena, 1898



이 마조히즘에 비추어 글은 완전히 새롭게 이해된다. 글은 삶에 앞선다. 마조히즘에서 마치 행위에 앞서 계약이라는 판본이 있듯이 말이다. 따라서 거꾸로 삶은 글에 의해 만들어진다. 글은 삶을 모방하여 서술한 것이 아니다. 거꾸로 글이 삶을 만든다. 계약에 의해 행위가 만들어지듯이 글이 삶을 구성한다. 글은 삶에 앞서 이루어진 계약이다. 그래서 그 글이 삶으로 상연된다. 그 상연 속에서 나는 삶의 매질을 당한다. 매질은 삶의 수많은 사건들이다. 그러나 그것은 앞서 이루어진 계약에 의해 해석되어지고, 구성된다. 다시 말하면 글에 의해서 현실을 포섭하고, 삶을 만들어 나간다. 그것이 글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글이라는 계약을 통해 삶이 연극적인 상황으로 전환된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삶의 모든 것들이 상징질서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이제 모든 기존 가치들이 무너질 수도 있는 것으로 바뀐다. 매번 글을 통해 삶을 재상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삶은 연극이다. 그것도 내가 연출할 수 있는 그런 연극이다. 그래서 매번 바꾸어 상연할 수 있는 연극이다. 글은 그것을 명백히 체험하게 하는 기계인 것이다. 글을 쓰는 것은 삶을 앞서서 뜯어보는 것이다.



운명, 일어나는 대로 일어나기를


이런 차원에서 ‘사주명리학’이야말로 마조히스트적인 전략의 극치를 보여준다. 우리는 사주에 의해서 운명과 계약을 한다. 그것은 어쩌면 내 삶의 커다란 대본일 것이다. 그 대본에 의해서 현실을 포섭할 수 있게 된다. 완전히 자신만의 연출이다. 매순간 이 연출에 의해서 현실은 해석되고 움직이고 정지한다. 즉 삶이 상연된다. 이를 통해 주체는 현실을 조롱하기도 하고, 현실에 저항하기도 한다. 그는 삶을 움직이는 자가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주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나’는 매번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점이다. 사주는 그렇게 매번 새로운 인간을 탄생시키는 아주 간결한 전략이다. 따라서 사주는 매순간 새로운 주체를 생성시키는 기계이기도 하다. 매번 새로운 연극을 펼칠 주체들을 구성하는 연출-기계이다.
 
결국 운명은 사주라는 계약에 의해서 구축된 환상이며 삶의 대본이다. 그런데 그것은 현실을 움직이는 환상이며, 동시에 현실에 저항하는 환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기존의 ‘나’를 계속적으로 무너뜨리는 환상이다. ‘나’는 그것을 통해 매번 다른 주체로 태어난다. 결국 어떤 현실이 펼쳐지더라도 사주에 맞게 되는 그런 환상이다. 매번 새로운 주체로 구성되면서 사주와 삶이 만나니까. 다시 말하면 사주는 삶과 무조건 일치하게 된다. 그것은 삶이라는 연극이 사주라는 대본에 의해 내가 연출하는 것이니까 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삶과 다른 사주는 애초에 탄생 불가능하다. 삶은 무조건 사주라는 대본대로 되는 것이다. 오로지 나의 연출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사주는 삶을 만든다. 운명은 삶을 불러온다.
 

헬라인들이 피해갈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운명! 그들은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을 짜는 세 여신을 모이라(moira)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런 태도는 그리스의 노예 철학자 에픽테토스에게서 극적인 모습으로 드러난다.


그러니 사소한 일부터 시작하자. 올리브 기름이 엎질러지고, 포도주를 도둑맞았다. 다음과 같이 말하라. “이것은 무감동을 사기 위해서 치러야 할 그만한 값이고, 이것은 마음의 평정을 사기 위해서 치러야 할 그만한 값이다. 값을 치르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에픽테토스, 『엥케이리디온:도덕에 관한 작은 책』, 27쪽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네가 바라는 대로 일어나기를 추구하지[요구하지] 말고, 오히려 일어나는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는 대로 일어나기를 바라라. 그러면 모든 것이 잘되어 갈 것이다.(같은 책, 23쪽)


에픽테토스에 따르면, 마음의 평정조차 어떤 값을 치르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다. 올리브 기름이 엎질러지고, 포도주를 도둑맞는 따위의 사건들을 겪지 않고서는 마음의 평정을 얻기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하면 아무런 사건도 발생하지 않는 한적한 곳에서는, 이를테면 깊은 산 속과 같은 곳에서는, 아무리 마음의 평정을 얻으려 해도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곳은 마음의 평정을 얻으려면 반드시 지불해야 할 ‘사건’이라는 화폐를 도무지 쓸 수 없고, 따라서 마음의 평정을 살래야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곳은 마음의 평정이라는 시장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건이 있는 곳에만 마음의 평정이 있다. 마음의 평정을 얻으려면, 도래하는 사건들을 나의 힘으로 감내해야만 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기묘하지만 내가 바라지 않는 일들을 회피하려고 하지 말고, 오히려 ‘일어나는 대로 일어나기’를 원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일들이 일어나야만, 그래서 그 일을 내가 감내해야만 비로소 제 값에 합당한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 오면, 내가 바라는 대로 일이 일어나는 걸 원하지 말아야 하고, 내가 바라지 않는 대로 일이 일어나기를 원해야 한다는 기묘한 전회가 발생한다.
 
결국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일어나는 대로 일어나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에픽테토스는 만일 그것들을 회피하면 불행해질 거라고 단언한다. 그렇다면 일어나는 것은 일어나는 것이고, 중요한 것은 일어난 후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자신의 표상들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힘을 갖는 것이다. 결국 사건이 일어나지 않기를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불가피하게 일어난 사건의 표상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욕망하는 것이다. 바로 마조히스트의 전략이 필요한 것이다. 삶의 모든 사건들을 하나의 연극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나에게 수없이 덮치는 사건들, 그 사건들로부터 홀연히 뒤돌아서서, 그 사건들로부터 떠오르는 고통, 상심, 기쁨 등등의 표상들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도록 나에게로 향하는 힘, 즉 나에 대한 욕망, 끊임없이 자신을 단련(일종의 ‘전투’)시켜 나가려는 욕망이야말로 무한대로 가져야 할 욕망인 것이다. 이를 위해 욕망의 발판인 매순간 나만의 환상(계약)을 구축하고 싸워야 한다. 여기서 글쓰기는 마음으로 나타난다. 즉 매순간 내 마음에 글을 쓰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글쓰기는 아마도 죽음이라는 사태 이후, 다른 물질로 전화된 이후에도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다. 에픽테투스는 글과 삶의 극한의 형태를 마음과 사건으로 치환해서 설명한 셈이 된다. 즉 글쓰기의 극한은 매순간의 마음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마음은 매순간의 글쓰기이다. 그리고 사건은 펼쳐진 삶의 연극적 순간이다.
 
결국 모든 사건이 운명이 된다. 매순간 쓴 글, 마음에 의해 구성된 삶의 연극이니까 그렇다. 따라서 마조히즘에서 계약-매질, 사주명리학에서 사주-삶, 에픽테토스에서 마음-사건은 모두 같은 구도이다. 모두 글과 삶의 구도인 것이다. 글은 매번 삶에 앞선다. 또 동시에 삶을 구성하고 이끄는 계약이자 대본으로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결국 ‘글과 삶의 일치’는 우리들의 연출에 따라 삶이라는 밭 위에 자라난 것이다. 그것은 만들어지는 것이지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매순간의 글이 끝내 우리들 생의 모습을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글이 현실을 정지시키고, 기존 삶을 무너뜨리는 때에 일어나는 것이지, 삶을 모방하여 후행적으로 기술하여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운명을 향유할 줄 아는 자가 될 때에만 가능한 것이지, 어떤 실체론적 숙명에 따를 때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글쓰기의 순간은 마조히스트의 순간이다. 글쓰는 자는 그 순간을 위해 항상 끈질기게 어려운 길을 가는 자이다. 그런 의미에서 글쓰는 자는 부서지기로 마음먹은 자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부서지지 않고서는 모든 사건을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니까.


_약선생(감이당)




※이 글은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일어나기를”편을 글쓰기와 연결한 글입니다.



매저키즘 - 10점
질 들뢰즈 지음, 이강훈 옮김/인간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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