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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약선생의 철학관

고함을 치는 당신, 두려움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by 북드라망 2013. 12. 11.

 #갑을관계-변증-슬라보에 지젝 



윽박지르는 당신이야말로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전화 한 통화를 받았다. 나에겐 이른바 ‘상급기관’이다. 다짜고짜 큰소리다. “당신 말이야, 일처리를 이따위로 하면 문제인물로 문제제기할 거야!” 그래서 대답한다. “아, 예, 이렇게 해서…저렇게 되어…” 아니나 다를까 말을 딱 끊고 자기 말만 한다. “아니, 무슨 소리야, 정말 이따위로 할거야? 당신 부장 이름 뭐야? 이름과 전화번호 대봐” 상급기관이 밑도 끝도 없는 것은 지금도 여전하다. 내가 설명할 틈이 없다. 매일 앵벌이처럼 일해서 돈 받아 처먹는 처지에 이런 고함을 듣노라면 잠깐 멍해진다. 더군다나 느닷없이 문제인물로 문제 제기될 문제투성이 ‘하급기관’ 직원이 되어 버렸다. 매번 치명적이다. 어쩌다 이리 어렵게 밥처묵을라고, 그토록 함부로 태어났던고. 눈물이 앞을 가린다. 이런 때면 평소에 별로 생각나지도 않는 옛 일조차 생각나 서러움에 복받쳐서, 에잇, 치받아부릴끼라고 씩씩대다가도……가까스로 꾹 참고 대답한다. “아, 팀장님, 고정하시고요…제가 이렇게 저렇게, 어쩌구 저쩌구, 미주알 고주알해서 팀장님 말씀하신대로, 바로 고거대로 처리해드릴께요. 네, 네, 죄송합니다. 죄송,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마치 병자호란 때 잡혀온 왜병이 갖은 아부를 다하듯이 대답했다. 그랬더니 조금 속이 풀렸는지, 하늘같으신 상급기관 어른이 “아무튼 당신 문제제기는 두고두고 생각할테니, 일처리 잘하도록 해”라고 하고서 전화를 끊는다.



세상 일이 다 그렇다. 남들 앞에선 ‘갑을’이 문제네 하지만, 현실에선 여전히 위계가 작동한다. 물론 나도 어쩔 수 없이 그 위계에 눈 감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나 높은 곳에 있을수록 더 그렇다. 상대적으로 높을수록 평소에 좀 더 큰소리를 쳐야한다고 훈련되는가 보다. 맨 처음 사회에 나왔을 때는 이런 것이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 일의 합리성이 모두 무너져버린 상황이나 주장을 만날 때마다 나에게 납득시키기란 정말 어려운 것이다.
 
분명 사회에는 온갖 생각과 주장들이 난무한다. 갖가지 것들이 서로 대립하기도 하고, 조응하기도 하면서 사회가 굴러간다. 그러나 모든 생각과 주장이 용인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생각이나 주장은 옹호되지만, 다른 어떤 생각이나 주장은 배척당한다. 주장 사이에, 생각 사이에, 생활 방식 사이에 위계가 생긴다. 왜일까? 마르크스주의는 이를 이데올로기때문으로 본다. 여기서 이데올로기는 사회에서 사상이나 행동을 제약하는 보이지 않는 관념이나 신념이다. 매년 할아버지 기일에 가족들이 어김없이 모여 제사를 하는 것은 유교라는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작동하기 때문이다. 선거에서 다수결로 이겨야 집권할 수 있다는 감각이 보편화된 것은 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광범위해졌기에 가능한 일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상급기관의 윽박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도 다 이런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기 때문일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 1949~ )

따라서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구성되느냐에 따라 사회 모습은 매우 다양하게 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데올로기는 어떻게 결정될까? 그런데 사실 이데올로기적인 요소들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다. 이를테면 ‘생태주의’라는 주장을 살펴보자. 생태주의는 강력한 국가 개입이 필요하다는 입장에서 ‘국가 지향적인 생태주의자’가 가능하며, 자연을 착취하는 것이 자본주의 체제 때문이라는 입장에서 ‘사회주의적인 생태주의자’도 가능하며, 자신이 태어난 토양의 뿌리를 다시 회복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보수적인 생태주의자’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를 두고 이데올로기적 요소(=기표)는 자유롭게 부유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슬라보에 지젝(Slavoj Zizek, 1949~ )은 라깡의 이론을 이용해서 이데올로기 장에도 누빔점 역할을 하는 것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불이나 소파에서 여러 겹의 천과 솜들을 흐트러지지 않게 집어주는 것이 ‘누빔점’이다. 이데올로기적인 요소들도 이런 ‘누빔’을 통해서 고정된다. 다시 말해 누빔점은 요소들을 의미의 네트워크 속으로 들어가게 하여 고정시킨다. 이것을 ‘고정적 지시자’라고 부른다. 물론 환유적 누빔점에서는 항상 고정이 좌절된다. 이것은 은유적 누빔점에 의해서만 고정될 것이다.
 
이를 가지고 개인이 주체로 호명되는 과정이 설명된다. 길을 가는데 뒤에서 경찰이 “어이~ 학생!”하고 부를 때, ‘학생’이라고 부르는 것을 호명이라고 한다. 이 경우 뒤로 돌아 본다면 호명이 성공한 것이다. 그 순간이 바로 주체가 기표에 ‘꿰매어지는’ 지점이다. 지젝은 바로 그 지점이 누빔점이라고 말한다. 또 동시에 어떤 주인 기표(‘미국’, ‘자유’, ‘공산주의’ 등)의 부름과 함께 개인에게 말을 걸면서 개인을 주체로 호명하는 지점이다. 주체는 이 순간에 탄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문제가 하나 있다. ‘학생’이 뒤를 돌아본다면 그는 호명되기 전부터 이미 ‘주체’였던 것이 아닌가? 자기가 학생이라는 것을 이미 인정하고 있을 때라야 호명에 응답하면서 대답할 수 있는게 아닌가? 지젝은 바로 이 지점이야말로 전복적인 가능성이 발생한다고 보고 있다.


궁극적으로 히스테리란 실패한 호명의 효과와 증언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상징적 동일시를 완수할 수 없는 주체의 무능력, 상징적 위임을 완전하고 거리낌 없이 수행할 수 없는 무능력의 표현이 아니라면 히스테리적 질문이란 무엇이겠는가? … “나는 왜 당신이 나라고 말하는 바가 되는 것일까?” 다시 말해 타자로 하여금 나를 호명하고, 나를 [왕, 주인, 부인 등으로] 부르게 만드는 내 안의 잉여대상은 무엇인가? 히스테리의 질문은 ‘주체 안에 있는 주체 이상의 것’이라 할 수 있는 무엇의 간극을, 다시 말해 주체를 상징적 네트워크에 종속시키고 포함하는 호명 과정에 저항하는 주체 속의 대상의 간극을 열어놓는다.


─슬라보에 지젝,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189쪽


나라는 개인은 누군가가 원하는 대상이 되려고 한다. 엄마 마음에 들려고 하는 아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엄마가 뭘 원하는지 아는 것은 매번 실패한다. 아버지가 개입하게 되면 비로소 의미들이 고정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마리아가 자신이 왜 예수의 어머니여야 했는지에 대해 당혹스러워하는 것처럼, 우리도 동일하게 내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그 경우에 주체와 타자 사이에 간극이 커진다. 이것은 ‘케 보아(Che vuoi)’ 즉 ‘타자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없을 때 생긴다. 다시 말하면 국가 등이 구성해 놓은 상징들에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 불가능할 때 생기는 간극이다. 이때 바로 환상($◇a)이 만들어진다.


욕망(d)이라는 것은 이 환상에 의해 생성되고 지탱되는 것이다. 또한 이 환상에 의해서 향유는 길들여지고 온순한 것이 된다. 그러나 이 환상은 어떤 대상에 의해서도 결코 전부 충족되지 않는다. 그래서 주체는 계속 요구하게 된다. 케 보아?, 케 보아? 다시 케 보아?.... 이런 주체의 끊임없는 요구가 역설적으로 타자의 공백을 드러나게 한다. 즉 ‘호명 너머의 부분’이다. 이제 쾌락은 멈추지만, 쾌락을 넘어선 쾌락, 즉 주이상스(향유)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그것은 바로 충동(drive), 궁극적으로는 죽음충동이다.
 
이것은 사회적 차원에서 ‘사회적 증상’으로 나타난다. 사회에 내재되어 있는 적대 관계가 어떤 구체적인 형태를 띠고 사회의 표면 위로 돌출하는 지점인 것이다. 나치에 의해 반유대주의가 발생한다거나, 50년대 미국에 밀어닥친 매카시즘 광풍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그것이다. 그것은 사회가 ‘고장 났다는’ 사실이 분명해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왜? ‘케 보아?’에 대한 대답에 한계를 드러내는 지점이니까. 그것은 흔히 오해하듯이 지배자로서 타자의 강한 모습을 드러내 준다기보다, 타자의 결여를 드러내는 지점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체적으로 결함을 품고 있는 셈이다. 사회의 어떤 결함이 반유대주의나 매카시즘으로 뒤집혀 나타난 것이다.
 
사람의 병증도 마찬가지다. 황제(黃帝)가 이렇게 물었다. 어떤 병은 열이 나서 한약(寒藥, 차가운 약)을 복용하였더니 더욱 열이 나고, 어떤 병은 추워서 열약(熱藥, 뜨거운 약)을 복용하였더니 더욱 차가워졌는데, 어찌 된 일인가. 기백이 대답했다. 한약을 쓴 경우는 음을 자양해줘야 하는 경우고, 열약을 쓴 경우는 양을 보해 주어야 한다. 이것이 이른바 근본을 찾아 치료한다는 것[求期屬]이다(『동의보감』 雜病篇 券一 辨證, 961쪽). 그런데 여기 아주 재미있는 게 있다. 그것은 ‘표본상반’(標本相反)이라는 것이다. 말뜻 그대로 육기(六氣)에 의한 병 증상이 표와 본이 상반되게 나타난다는 말이다. 서로 뒤집혀서 증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를테면 태양한수의 경우 표는 양으로 나타나지만 본은 한이다. 소음군화는 표는 음으로 나타나지만 본은 열이다. 만일 이를 오해해서 정치법(正治法)으로 치료하면 병은 더 가중된다. 정치법이란 질병의 성질에 따라 정면으로 치료하는 것을 말하는데, 한증에는 열약을, 열증에는 한약을 쓰며, 실증에는 공법(攻法)을, 허증에는 보법(補法)을 쓴다. 원래 표기와 본기가 서로 다른데, 본기의 한열만을 따라 치료한 꼴인 것이다. 이런 경우는 반치법(反治法)으로 치료하여야 한다. 그것은 질병의 가상에 따라 치료하는 것이다. 열이 원인이면 열을 이용한다(熱因熱用). 그러니까 열나면 열약을 더 쓴다. 한이 원인이면 한을 이용한다(寒因寒用). 즉 차가우면 더 차갑게 한다. 얼핏 보기에 거꾸로 치료하는 것이다. 그러나 의역학은 표본반상의 정신으로 사태의 전도를 너무나 뼈저리게 느낀다. 몸은 근본적으로 뒤집혀서 보이는 사물이다.



이데올로기 속에서 타자의 결여는 사회적 증상으로 드러났다. 즉 병증으로 나타난다는 말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나치의 반유대주의나, 미국의 매카시즘와 같이 자기 처지도 모르고 윽박지른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엔 그것이 대단히 힘이 세 보인다. 세상을 집어삼킬 것만 같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가 품고 있는 결여다. 사회가 삐거덕거린다는 것의 증상이다. 고쳐야 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전화를 걸어 내게 윽박질렀던 상급기관의 그 사람도 아마 어떤 결여를 보여주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자신이 아주 치명적인 처지에 있어서 곧 어찌 될지 모르는 공포스런 상황이거나, 아니면 이제 곧 몰락할 처지에 있어서 아주 두려운 상황이었을지도. 그래서 나에게 윽박질러 그 공포를 은폐하려고 했을지도. 어쩌면 상급기관이라는 곳이 다 그런지도 모른다. 그들의 숨통은 드라마틱하게도 표본상반일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럼 이제부터 고함은 고함으로 다뤄볼까? 나는 당신이 두려워한다는 것을 안다.



약선생(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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