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노래를 들어라(風の歌を聽け)』 | 무라카미 하루키 |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내가 세 번째로 잤던 여자는 내 페니스를 “당신의 레종 데트르(존재 이유)”라고 불렀다. …… 타인에게 전할 뭔가가 있는 한, 나는 확실히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연한 일이지만, 내가 피운 담배 개비의 수나 올라간 계단의 수나 내 페니스의 크기에 대해서 누구 한 사람 관심을 갖지 않았다. 나는 자신의 레종 데트르를 상실하고 외톨이가 되었다. (91쪽)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 계기는 실로 간단하다. 갑자기 무언가가 쓰고 싶어졌다. 그뿐이다. 정말 불현듯 쓰고 싶어졌다.....“완벽한 문장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완벽한 절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내가 대학생 때 우연히 알게 된 어떤 작가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 참뜻을 이해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뒤의 일이지만, 당시에도 최소한 그 말은 내게 일종의 위안이 되기는 했다. 완벽한 문장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그러나 그래도 역시 뭔가를 쓰려고 하면 언제나 절망적인 기분에 사로잡혔다. 내가 쓸 수 있는 영역은 너무나도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코끼리에 대해서는 뭔가를 쓸 수 있다해도, 코끼리 조련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그런 뜻이다. 8년 동안 나는 계속 그런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8년 동안. 긴 세월이다. (9쪽)
“어떤 소설?” “좋은 소설이지. 나 자신에게는 말이야. 난 내게 재능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러나 적어도 쓸 때마다 자기 자신이 계발되어 가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안 그래?” “그렇지.” “자신을 위해서 쓰느냐...아니면 매미를 위해서 쓰느냐지.” …… “글을 쓸 때마다 나는 그 여름날의 오후와 나무가 울창한 고분을 떠올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지. 매미나 개구리, 거미, 여름풀 그리고 바람을 위해서 뭔가를 쓸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하고 말이야.” (110~112쪽)
미하엘 소바, on the road
하루키의 동세대 젊은이들은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드러내는가? 역설적으로 “존재 이유를 알 수 없음”이 바로 그들의 스타일이고 세계이며, 자연이다. 굶주림은 그들의 세계 밖에 있는 것으로,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다. 연인 간의 만남과 섹스, 맥주를 마시며 멍한 상태로 있기와 같은 취향들은 존재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그들만의 감성적 결과다. 오히려 ‘쥐’의 학생운동 경력이나, ‘나’의 두 번째 연인을 신주쿠의 격렬한 데모 때문에 만났다는 정치적 현실도 하나의 배경으로만 작용한다.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것들은 그들 세계 뒤에 펼쳐진 병풍일 뿐, 존재이유일 수 없다.
따라서 “완전한 존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완전한 것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존재인 신은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증명과 같은 치밀한 존재 증명 따위는 적어도 하루키와 그의 젊은이들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감을 느끼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존재하는 세대인 듯이 산다. 완벽한 존재는 불가능하고, 그래서 완벽한 존재증명 자체도 불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을 느껴야만 한다. 바로 여기에 하루키의 글쓰기가 놓인다. 존재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느끼기 위해 쓴다.
오히려 “존재 이유를 알 수 없음”은 글을 쓰고 싶다는 하루키의 욕망을 생산한다. 글은 마치 자석과 같은 것이어서, 무의미하게 흩어져 있는 생활 속의 쇳가루들을 하나로 모아준다. 그렇지만 한 달 동안 한 줄도 쓰지 못할 때가 있는가 하면, 사흘 밤낮을 계속 썼는데 그것이 모두 엉뚱한 내용인 경우처럼, 쇳가루들을 거듭 밀어내기만 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이 정도 글이라도 쓰는 게 어디냐며 무조건 쓰고 본다는 것이 새내기 작가였던 하루키의 심정이었을 것 같다. 그래서 그것이 존재 이유를 설명하지는 못할지라도, 개미나, 매미나, 바람을 위해서, 아니면 자신을 위해서 조금이라도 전진시키는 실천이 되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가지는 것이다. 하루키의 소설은 바람을 위해 쓴다는 이 구절에서 어둠 속 야광처럼 빛난다.
『1973년의 핀볼』| 무라카미 하루키| 윤성원 옮김| 문학사상사
입구가 있으면 출구가 있다. 대부분은 그런 식으로 되어 있다. 우체통, 진공청소기, 동물원, 양념통, 물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예를 들면 쥐덫. (20쪽)
핀볼 기계는 당신을 아무 곳에도 데려가지 않는다. 재시합 볼을 켤 뿐이다. 재시합, 재시합, 재시합, …… 마치 핀볼 게임 그 자체가 어떤 영겁성을 지향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영겁성에 대해서 우리는 많을 걸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 그림자를 추측할 수는 있다. 핀볼의 목적은 자기표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변혁에 있다. 에고의 확대가 아니라 축소에 있다. 분석이 아니라 포괄에 있다. 만일 당신이 자기표현이나 에고의 확대, 분석을 지향한다면, 당신은 반칙 램프에 의해서 가차 없는 보복을 받게 될 것이다. (40쪽)
“철학의 의무는…” 나는 칸트의 말을 인용했다. “오해에 의해서 생긴 환상을 제거하는 데 있다…… 배전반이여, 저수지의 밑바닥에 편히 잠들라.” (125쪽)
"제이, 인간은 모두 썩어가는 거예요. 그렇죠?“ ”그렇겠지“ ……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어요. 어떤 진보도 또 어떤 변화도 결국은 붕괴하는 과정에 불과하다고 말이죠. 내 생각이 틀렸나요?” “아니, 맞는 말이겠지” “그래서 나는, 그런 식으로 신이 나서 무(無)를 향해 가려는 인간들에게 일말의 애정도 호의도 가질 수가 없어요……이 고장에도 말이죠.” (171~ 173쪽)
잘 가. 누군가가 말했지. 천천히 걸어라, 그리고 물을 충분히 마셔라, 라고. (174쪽)
플라넬스, La casa fantasmal, 1932
환상이 아니라 이성이다. 아련한 과거, 미래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생성하는 현재의 아름다움이다. ‘내’가 쌍둥이와 헤어지며 최후에 깨달은 것은 1973년 핀볼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11월의 조용한 일요일처럼 모든 것이 되풀이된다는 것에 대한 긍정이다. 이것은 슬픔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긍정의 아름다움이다. 그토록 사랑했던 나오코가 저 같은 암흑으로 떨어졌을까? 이런 사건이 내 몸 구석구석에서도 끝없이 펼쳐지고 있다는 것은 무섭고 슬픈 일이다. 귀지가 귓속 어딘가 굽은 곳으로 넘어가 버리면 누가 불러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니! ‘내’가 1973년 9월부터 11월까지 찾아 나선 그 핀볼, 스리 플리퍼 스페이스십(three flipper spaceship)은 슬픔이 주는 그런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그러나 그것은 한 마디로 슬픔이고 죽어버린 시간이다.
그러나 하루키가 그런 슬픔과 시간을 재구성하기 위해서만 이 글을 쓴 것은 아니다. 그런 슬픔만으로는 '지금'을 살아남을 수 없다. 이 깨달음은 45세의 중국인 주방장이 ‘쥐’에게 가르쳐 준 것과 정확히 같다. “아무리 흔하고 평범한 것에서도 인간은 노력만 하면 뭔가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도 살아남을 수가 없는 거지.” 배운다는 것이 뭔가? 그것은 되풀이한다는 것이다. 하루키는 슬픔 속에서 헤매는 길 말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재차 전진하는 길을 택한다. 사실 핀볼 자체가 주저 없이 볼을 다시 되돌리는 게임 아니던가. 이를테면 “어떤 진보도 또 어떤 변화도 결국은 붕괴하는 과정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예고된 붕괴를 불가피하게 품고 앞으로 다시 나아가는 것은 불가피하다. 차라리 붕괴가 불가피하다기보다, 앞으로 나아감이 불가피하다. 그래서 우물 파던 그 사람도, 나오코도, 스리 플리퍼 스페이스쉽도, 귀지도 그렇게 넘어갈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일에 입구가 있으면 출구가 있을 거라고 믿고 넘어가는 것이다. 아니다. 출구가 없더라도 앞으로 가야만 하는 것이다. 어느 문은 그런 구분 자체가 없을 수 있을 테니. 오늘도 친구들에게 일러주자. 천천히 걸어라, 그리고 물을 충분히 마셔라, 라고. 출구가 입구가 되고, 입구가 출구가 되는 끝없는 길을 걸어가야 할 터이니 말이다.
약선생(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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