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인-결과—데이비드 흄—풍(風)
천 개의 원인, 천 개의 치료
찬 곳에서 잔 후 입과 눈이 비뚤어졌다는 사람을 간혹 본다. 그 이름도 특이한 ‘구안와사(口眼喎斜)’다. 멀쩡하던 얼굴이 고약하게 일그러지는 병이다. 언뜻 보면 얼굴이 얼굴 밖으로 뛰쳐나간 느낌이다. 아니다, 뭔가가 얼굴을 얼굴 밖으로 밀어낸 것이다. 한의학은 그것을 풍사(風邪) 때문이라고 지목한다. 풍사가 들어와 원래 있는 얼굴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늘어져서 멀쩡하게 보이는 쪽이 풍사가 침범한 쪽이다. 풍사는 한쪽 몸을 쓰지 못하는 편고, 아프지는 않은데 사지를 못 쓰는 풍비, 쓰러진 사람이 혀도 뻣뻣해져 ‘억억’ 소리만 내는 풍의, 기타 마비 증세들을 지칭하는 풍비 등 형태도 갖가지다. 심지어 혈맥에 들어 왔느냐, 오장, 육부까지 들어왔느냐에 따라서 또 중혈맥, 중장, 중부로 구분하기도 한다. 이렇듯 몸 안으로 바람이 불면 몸이 갖가지로 뒤틀린다.
그런데 이상하다. 『동의보감』은 풍병인데도, 그 원인을 풍만으로 보지 않는다.
왕안도가 말하길, “중풍의 원인을 옛사람들은 풍이라고 주장하였는데, 하간은 화라고 하였고, 동원은 기라고 하였고, 단계는 습이라고 주장하여, 도리어 풍을 허상이라고 여기고 있으니, 옛사람들의 말과 크게 차이가 난다. 내가 보건대 옛사람들과 이 세 사람이 말한 것은 어느 것이나 버릴 수 없는 것이다. 다만 풍이 원인이 된 것은 진중풍이고, 화·기·습이 원인이 된 것은 유중풍이지 진중풍이 아니란 것을 몰랐던 것뿐이다.”
—동의보감, 잡병편, 권이 풍 1019쪽
물론 명나라의 우단은 증상과 원인을 오해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왕안도의 입장은 옛사람들의 의견 뿐 아니라 하간, 동원, 단계가 관찰한 원인들을 모두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동의보감』도 그렇게 설명한다. 한쪽에서는 습이 담을 생기게 하고, 담이 열을 생기게 하는데, 이 열이 풍을 생기게 한다고 설명한다. 다른쪽에서는 이와 다르게 설명한다. 폐는 기가 드나드는 곳이다. 그런데 살찐 사람은 숨을 가쁘게 쉬고 폐의 사기가 심해지는데, 그 순간 폐금이 간목을 치면서 풍에 걸린다. 또 옛 사람의 대표격인 『내경』에서는 비판자 우단과 비슷하다. 인체의 기혈이 지나치게 허하여 위기가 체표를 고밀하게 하지 못한다. 그래서 몸은 따뜻하지 못하며, 기육은 줄어들고, 피부는 이완되며, 주리는 열린다. 이때 허사적풍이 비바람이 몰아치듯 침투하여 풍에 걸린다. 『동의보감』은 양립불가능한 관찰결과들과 원인들을 모두 인정한다. 마치 『동의보감』은 하나의 원인-결과로 구성된 원리라곤 없는 듯이 행동하는 것이다.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1776)
원인-결과의 관계에 대해 깊이 관심을 보인 철학자는 데이비드 흄이다. 흄에게 정신은 지각 덩어리다. 지각은 두 가지로 나뉜다. 그 중 하나는 인상(Impressions)이다. 우리가 “듣고, 보고, 느끼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원하고, 의지할 때 갖는 보다 생생한 지각들”이다. 그것은 외부대상들과 직접 접촉하면서 느끼는 감각들을 말한다. 다른 하나는 사고들(Thoughts) 혹은 관념들(Ideas)이다. 이것은 이전의 인상들을 기억하거나, 그것들을 연결해 감정이 파생되는 것을 말한다. 인상보다 덜 힘이 있고, 덜 생생한 지각들이다. 그래서 일종의 복사물들(copies)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감각이나 경험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재료들을 합성하거나, 바꾸거나, 증대시키거나, 축소시켜서 만들어진다. 이를테면 황금 산은 황금이라는 관념과 산이라는 관념을 결합시킨 것이다. 결국 정신은 인상들과 관념들이 뭉쳐 있는 덩어리인 셈이다.
그렇다면 인상들로 나타나지 않은 것을 지식으로 가질 수는 없다. 관념들과 사고들도 궁극적으로는 인상들로부터 비롯된 복사물이기에 더욱 그렇다. 따라서 인과관계에 대한 지식도 선험적으로(a priori)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떤 특정 대상들이 서로 지속적으로 결합된다는 것을 경험 속에서 발견할 때 얻어진다. 당구장을 상상해보자. 내가 빨간 공을 향해 하얀 공을 쳤더니, 빨간 공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또 이런 현상(인상)이 그 이후에도 여러 번 반복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얀 공을 친다”는 사실 A와 “빨간 공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사실 B는 지속적으로 결합된다고 할 수 있다. 그때서야 비로소 지식이 생긴다. 이 경우 지식의 원천은 이성이 아니다. 경험의 반복이 지식을 생성한다. 결국 원인과 결과는 이성에 의해서는 발견될 수 없고 경험에 의해서만 발견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아무리 경험을 한다고 해도 감각과 기억을 넘어서 사건을 추리한다는 것은 정의상 불가능하다. 미래가 반드시 과거와 닮아야 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오늘까지 해가 떴다고 내일도 반드시 해가 뜬다는 완전한 보장은 없다. 한번 더 당구장으로 다시 가보자. 그러나 이번엔 우주 공간에 지어진 당구장이다. 하얀 공을 쳤더니, 하얀 공이 내 믿음을 배반하고 빨간 공을 맞추지 못한다. <그래비티>의 산드라 블록처럼 빙빙 돌더니 저 멀리 튕겨 나가버린 것이다. 당연히 빨간 공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대상들의 결합, 즉 원인과 결과의 기존 결합은 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그리 된다고 믿을까? 결국 우리는 지구라는 조건에서 형성된 습관과 관습에 의해 그렇게 추리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까지 그렇게 되어 왔으니,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이다! 이 지점에서 흄의 놀라운 말이 이어진다.
어떤 대상이 기억이나 감각에 주어질 때면 언제나 그 대상은 즉각적으로, 습관의 힘에 따라, 상상력을 움직여 늘 그것에 연접되곤 했던 대상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이 생각에는 어떤 느낌이나 정서가 수반되는데, 이것은 제멋대로 생각이 떠도는 허구와는 다른 것이다. 믿음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다.
—데이비드 흄, 『인간의 이해력에 관한 탐구』, 김혜숙 옮김,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2, 83쪽
기억이나 감각은 습관을 형성시키고, 그 습관은 상상력을 움직이게 한다. 바로 그 상상력 안에서라야 인과관계에 대한 지식이 구성된다. 결국 지식은 우리의 습관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것은 상상력의 힘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믿는다. 따라서 원인과 결과는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다. 흄은 이 지점에 이르러, 대상들의 필연적 연관성을 인상들에서 찾기를 멈춘다. 지식은 대상들이 연접될 때 차라리 정신 속에서 일어나는 이행과 결합의 결과다. 우리는 이렇게 상상력의 힘으로 경험을 넘어서 “과거를 미래로 전환”(들뢰즈, 『경험주의와 주체성』, 131쪽)시킨다. 과거에 불과한 경험이 미래의 지식이 되는 것이다. 또한 흄은 이 습관이 자연이라는 기원으로부터 유래한다고 보았다. 결국 흄은 자연에 의해서 구성된 다양한 인과관계를 그 자체로 긍정한 셈이다. 다만 습관에 의해 상상력의 허구가 끼어들 수 있다는 점을 놓치지는 않았다. 지식은 이 한계 안에서 구성되는 것이다.
"흄에게 인과관계는 습관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인상이나 관념을 결합시켜 어떤 지식을 형성합니다. 이 지식은 '법칙'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 주목해야 할 것은 믿음의 개념 그것이 갖는 영향력의 문제, 효과의 문제입니다." (철학과 굴뚝청소부, 129~130쪽)
풍병의 원인은 풍만이 아니다. 화일수도 있고, 습일 수도 있고, 기일 수도 있다. 동일한 사태에 대한 원인과 결과의 계열, 그리고 그에 따른 다양한 지식이 관찰자의 다른 습관, 다른 상상력에 의해 다르게 발견되고, 다르게 구성된다. 『동의보감』은 그 모두를 전부 인정한다. 이것들 사이의 모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동의보감』은 모든 병을 상상력이 넘치는 병으로 만든다. 따라서 치료도 아주 다이내믹해진다. 고집스러운 일반 법칙을 포기함으로써 생생한 실감을 얻은 것이다. 아마도 구안와사의 일그러진 얼굴은 그 밑에 잠복해 있는 수많은 원인과 결과의 중첩일 것이다. 따라서 치료도 치료하는 순간의 습관과 상상력에 의해서 매번 다른 치료가 되어야 할지 모른다. 따라서 『동의보감』은 저 보이지 않는 천 개의 치료까지 예감하고 쓴 텍스트이다.
_약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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