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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과학/과학 톡톡

롤러코스터보다 바이킹이 더 짜릿한 이유는 뭘까?

by 북드라망 2013. 10. 8.

운동을 넘어 운동의 변화로 ①편


존재는 슬프다, 고로 운동한다



어린 날의 놀이동산 


놀이동산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던 것은 바이킹. 가장 높은 곳에 올라 잠시 정지했을 때 느끼는 긴장감, 내려올 때면 심장보다 몸이 앞서 떨어지는 듯한 스릴감. 나는 바이킹의 맨 끝자리에 앉아 그 기분을 만끽했었다. 반면 롤러코스터는 별로였다. 롤러코스터를 타 본 건 딱 한 번. 사실 놀이동산을 들락날락 하면서도 롤러코스터를 타지 않았던 것은 너무 무서워 보여서였다. 그러나 막상 타 보니, 웬 걸. 무섭다기 보다는 정신이 없었다. 처음 맨 꼭대기로 올라가서 내려올 때를 빼놓고는 영 내 취향이 아니었다.


롤러코스터는 엄청난 속도로 다양한 코스들을 통과한다. 그러나 속도만 빠를 뿐이었다. 롤러소크터는 선로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빠른 속도를 유지해야 한다. 그래서 겉으로는 다양한 운동의 변화가 있는 것 같지만, 실제 운동의 변화폭은 그다지 크지 않다. 이에 비해 바이킹의 코스는 단순 반복이다. 그래도 더 짜릿한 이유는 바이킹이 오로지 큰 낙차에 집중한다는 점이다. 운동의 큰 변화폭, 이것이 바이킹의 매력이다.


그러고보니 바이킹을 타고 내려왔을 때 다리가 후들거리긴 했었다;;;


우리가 느끼는 스릴감의 정체는 운동의 변화다. 단지 빠르기만 한 운동은 짜릿함을 주지 못한다. 고속으로 달리는 KTX에서 무섭다고 벌벌 떠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편안히 잠을 자면 잤지 말이다. 요컨대, 우리를 들었다놨다, 들었다놨다 하는 요물은 운동의 ‘변화’다! 


왜 운동하지?


과학에서 운동의 변화가 중요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운동의 변화를 사유하기에 앞서, 넘어야할 커다란 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약 2,000년 동안 서구 과학계를 괴롭힌 문제. 그건 ‘왜 운동을 하지?’라는 것이다. 뭐 이런 쓸데없는 문제에 골머리를 썩었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 오랜 기간 많은 사람들이 ‘운동의 원인’과 씨름을 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좀 찬찬히 그들의 문제의식에 귀 기울여 보도록 하자.


문제의 시작은 ‘세상 만물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건 너무 당연한 소리 아닌가. 하지만 이 진리가 운동과 관련된 모든 문제의 출발이었다. 세상에는 여러 사물이 있다. 생명체들도 이런 사물 중 하나다. 이렇게 ‘있음’에 처한 것을 ‘존재’라고 부른다. 그런데 세상의 존재들은 움직인다.


씨앗은 변해서 나무가 된다. 인간도 어린 아이에서 어른이 된다. 뿐만 아니라, 감정변화에 따라 얼굴 상태도 변한다. 하늘은 아침저녁으로 색을 달리하고, 불은 하늘을 향해 활활 타오르며, 물은 아래로 흐른다. 왜 이 존재들은 이런 활동을 할까. 있으면 있는 것이지, 왜 가만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운동이라는 것을 할까. 대체 왜 이 ‘있음’에 처해있는 사물들이, 그 처해있는 상태를 떠나 다른 ‘있음’으로 향할까.


이에 대해 최초로 질문하고 대답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다. 지금 우리로서는 좀 이상하겠지만, 당시 세계에는 운동이 불가능하다는 게 주된 생각이었다. 이 대표 주자가 파르메니데스다. 오늘날 우리에게 궤변의 하나로 거론되는 제논의 역설이 이로부터 나왔다.


이런 복잡한 이야기는 뒤로 하고, 당시 분위기만 기억하자. 우주에는 그냥 ‘있음’만 있을 뿐이었고, 운동은 우리 시각에서 발생하는 하나의 환상이었다. 여기에 반기를 든 게 아리스토텔레스였다. 우리 눈에 보이는 그 수많은 운동들. 그 운동들은 환상이 아닌 실재다. 이게 아리스토텔레스가 본 우주였다. 그는 이 운동하는 우주를 실재하게 하기 위해, 과학적 설명을 시도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에 대한 설명에 들어가지 전, 상식적으로 ‘왜 운동을 하는지’를 생각해 보자. 아침에 일어나 욕실로 향한다. 왜? 씻으러. 씻고 나면 집을 나간다. 왜? 회사에 가려고. 그렇다. 우리가 이렇게 저렇게 움직이는 이유는, 어떤 목적이 있어서다. 씻기 위해 욕실을 가고, 일하기 위해 집을 떠난다.


인터넷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요일별 표정.jpg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도 딱 이렇다. 세상 만물이 왜 운동을 하는가? 어떤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목적이 있기에 여기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간다. 지금의 상태를 버리고 다른 상태로 향한다. 그러나 씨앗이 나무가 된다든지, 불이 하늘을 향하고, 물이 아래로 가는 것에는 목적이 없지 않은가.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렇지 않다, 목적이 있다’라고 답한다.


존재의 목적, 존재의 사명


엠페도클레스는 모든 물질이 불, 숨, 물, 흙이라는 4가지 본질적 원소들의 합성물이라고 하였으며, 아리스토텔레스도 이러한 분류를 따랐다.

지상의 사물들은 혼합체로 태어난다. 이 혼합물들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게, 그 사물의 본성이다.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혼합체를 ‘순정하지 못함’으로 해석한다. 불순한 존재. 어떤 느낌이 드시는지. 하나의 말은 그냥 말이 아니다. 모든 말은 이미 어떤 가치적 색채를 띠기 나름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혼합체로서 존재를 불순하다고 말할 때, 그건 존재가 가진 부정적 조건을 나타내게 된다. 뒤죽박죽된, 오염된 존재. 이게 존재가 지상에 태어나는 조건이다.


이로부터 존재는 숙명적인 숙제 한 가지를 가지고 태어나게 된다. 뒤죽박죽된 상태를 잘 정돈해서, 자기 본성에 맞는 상태를 찾아가기! 자기에게 적합한 장소를 찾아가기! 이 숙제가 사물에 내재한 목적이다. 그리고 이 목적에 의해 운동은 발생한다. 


예를 들어, 나무가 불에 탄다고 해 보자. 위를 향하는 불, 자욱하게 깔리는 연기, 그리고 밑에 남는 재. 이런 식의 운동이 나타나는 이유는 나무가 혼합체이기 때문이다. 불이 붙으면서 나무를 이루던 요소들은 각각 흩어져서 자기 자리를 찾아 간다. 맨 위는 불, 그 다음이 연기로 표현되는 공기, 그리고 재가 되는 흙의 요소. 여기에 공기와 흙 사이에 ‘물[水]’이라는 요소를 넣으면 지상의 사물을 이루는 4요소가 된다.


불은 나무라는 혼합체들을 해체시킨다. 그러면 뒤죽박죽되어 있던 요소들은 자기 본성에 맞는 자리를 찾아간다. 그렇다면 혼합체가 해체되지 않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운동은 어떻게 될까. 혼합물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요소가 운동을 결정한다. 나무가 아래로 떨어지는 건, 그 나무를 이루는 요소 중 흙적인 성분이 가장 많이 때문이다. 반면에 깃털은 상대적으로 공기적 요소가 많아 위로 뜰 수 있다. 


이런 장소적 이동만이 아닌 상태 변화 역시 운동이다. 이를테면 씨앗이 나무가 되는 것. 씨앗 상태는 혼합물들이 아직 뒤죽박죽된 상태다. 이것들이 내부적으로 서서히 정리되면서, 싹이 발아하고 결국 나무가 된다. 그리고 나무가 된 후, 죽게 되면 비로소 그것을 이루는 요소들은 완전히 자기 자리를 찾아가게 되는 것이다.


운동은 각각의 요소가 자신의 자리에 있지 못한 것으로 인해 발생한다. 요컨대, 운동이란 존재의 무질서, 균형파괴가 원인이다. 이 무질서를 회복해서 ‘코스모스’를 이루려 하는 것이 우주다. 우주의 자연스러움, 그건 운동의 종식으로서 ‘코스모스’다. 존재가 질서잡혀 있다면, 그 사물은 자신만의 장소에서 휴식하고, 머물며 떠나지 않을거다. 따라서 운동한다는 건, 이미 그 존재의 부족을 증명한다. 운동은 일시적인 현상이며, 끝내야할 작업이다. 이것이 존재의 사명이다.


고향찾아 삼만리


자기 본성에 따른 장소, 존재가 찾아가야할 상태. 존재에게 그건 일종의 고향이다. 그렇다면 존재란 이미 실향민인 채로 태어난다 할 수 있다. 실향민으로서 존재는 고향이 그립다. 타향살이는 괴롭고 힘들다. 고향찾아 삼만리! 이것이 존재의 운동이다. 그러니 이렇게 말하자. 존재는 슬프다. 고로 운동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여기에 자리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최고의 행복 상태를 ‘관조’라 부른다. 관조는 모든 운동에서 벗어난 상태다. 거친 풍파로 가득한 세상, 그곳의 운동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윤리적 이상 상태다.


관조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관조는 테오리아theoria다. 오늘날 ‘이론’을 뜻하는 영어의 ‘theory’의 어원이 이로부터 왔다. 그러니까 하나의 학문을 한다는 건, 이런 관조의 상태에서 가능하다. 세상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운동으로부터 멀어진 상태. 모름지기 공부란, 세상이라는 잡다한 곳에서는 불가능하다는 소리다. 


슬픔으로서의 운동. 이런 식의 사유는 아주 오랫동안 서구 사유를 지배해 왔다. 이를테면 프로이트도 이런 맥락에 있다. 프로이트는 말년에 ‘죽음충동’이라는 것을 존재의 근원적 욕망이라고 봤다. 죽음충동이라고 해서 진짜 죽음을 말하는 건 아니다. 프로이트가 말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조에 가깝다. 존재는 될 수 있으면 운동 상태를 쫑내려 한다는 게 프로이트의 죽음충동이다.


이렇게 운동을 슬프게만 보는 사유를 접하면, 우리는 종종 이렇게 말하곤 한다. '음…서양 사유는 이상해. 동양은 ‘氣’의 운동이라든지, 운동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했는데'라고. 하지만 정말 우리는 운동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할까. 감정이 요동칠 때, 그걸 좋다고 느끼는 사람은 없다. 언제나 우리를 괴롭히는 건, 그놈의 감정이다. 몹쓸놈의 감정! 그럴 때마다 우리는 얼마나 감정으로부터의 해방을 꿈꿨던가. 그러나 그런 해방의 시도는 대부분은 실패로 끝난다. 그래서 우리는 또 슬프다. 슬프게 태어나서 슬프게 살다, 결국 죽어서야 편안해 질 수 있는 존재.


아리스토텔레스가 느꼈던 것도 바로 이것이었을 거다. 머나먼 고향을 찾아 삼만리를 떠도는 고단한 존재. 이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는 ‘관조’라는, 운동으로부터의 해방을 꿈꾸었을 거다. 그에게 운동은 존재의 숙명이었다. 그러나 그 운동의 사라짐이 존재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지점이었던 것이다.  


끊임없이 찾고자 했던 존재의 기원, 우리는 왜 그토록 그것을 찾고 싶어했을까?


가짜 답? 아니 가짜 질문!


존재라는 슬픈 숙명. 그것의 증명으로서 운동. 과연 존재는 이렇게 슬플 수밖에 없는 것일까. 우리는 ‘운동의 원인’에 대해서 어떻게 답해야 할까. 어떤 답을 마련해야 존재는 실향민의 숙명을 벗어날 수 있을까.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와 운동에 대한 이야기는 틀렸다. 현대 과학은 이런 식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고향찾기 따위야말로 미신적이다. 사물에 내재한 목적 따위는 없다. 현대 과학은 온갖 수식들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을 거부한다. 그러나 존재의 슬픈 숙명은 끝났다고 할 수 없다. 현대 과학 역시 운동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와 비슷한 정서를 공유한다. 현대 물리학에서 문제가 되는 것 중 하나가 ‘대칭성 깨짐’이다. 우주는 대칭성이 깨지면서 물질이 존재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현대 물리학은 질문한다. ‘왜 대칭성이 깨지지’, 라고.


이 질문이 가능한 이유는 대칭성이 깨지는 게 이상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 대칭성은 좋은 상태다. 그래서 그 좋은 상태가 깨지는 게 이상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본 세계이지 않은가. 그의 눈에 이상하게 보인 것은 ‘운동’이었다. 그렇기에 ‘왜 운동하지?’라는 질문이 가능했다. 만약 그의 눈에 희한하게 보인 게 사물의 ‘있음’이었다면, 그는 이렇게 질문했을 거다. ‘왜 사물은 운동하지 않고 가만히 있지?’라고.


자코모 발라, <끈에 묶인 개의 역동성>, 1912


아리스토텔레스의 가짜 답을 거부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눈을 가지고 있는 한, 즉 ‘왜 운동이 있지’에 답하려 하는 한, 운동은 언제나 기괴한 일이 되어 버린다. 요컨대, 운동은 언제나 슬플 수밖에 없는 거다.


그렇기에 존재와 운동의 숙명을 깨기 위해서는 질문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베르그송의 말대로, ‘가짜 답’이 있기 전에 ‘가짜 질문’들이 있다. 이 질문 자체가 가짜 인한, 어떤 답을 해도 그건 가짜가 될 수밖에 없다. 이를 알았던 사람이 ‘갈릴레이 갈릴레오’였다. 갈릴레오는 2000년 서구 사상계를 붙잡아 온 운동에 대한 질문을 바꿔 버렸다. 그의 새로운 질문이자 답, 그것은 ‘관성’이었다.



_신근영(남산강학원 연구원)



※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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