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3인 3색,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한 권의 책에 관한 세 개의 시선!

이번 주에는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를 읽은 세 명의 이야기를 만나보시죠!


#1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와 갈릴레오가 흔들리는 돌을 보았을 때, 거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속박 상태의 낙하 현상을 보았고 갈릴레오는 진자를 보았다라고 말함으로써 야기되는 곤란한 점들에 대해서 나는 잘 알고 있다. …… 세계가 패러다임의 변화와 더불어 변화하지는 않지만, 그 이후의 과학자들은 이전과는 다른 세계에서 연구 활동을 하게 된다. …… 과학혁명 동안에 일어나는 일은 개별적인 안정된 데이터의 재해석으로 완전히 환원되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우선 데이터들이 양론의 여지 없이 안정되지는 못한 상태이다. 진자는 떨어지는 돌이……아니다. 결과적으로, 이제 곧 보겠지만, 과학자들이 이들 다양한 대상으로부터 수집한 데이터는 그 자체가 서로 다른 것들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어느 과학자 개인 또는 과학자 사회가 속박된 낙하 운동으로부터 진자로……이행을 성취한 과정은 해석과 흡사한 과정이 아니다. 해석할 수 있는 고정된 데이터가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과학자가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새로운 패러다임을 채택한 과학자는 해석자이기보다는 차라리 거꾸로 보이는 렌즈를 낀 사람과 비슷하다. 이전과 똑같은 무수한 대상들을 마주 대하면서 그리고 그렇게 변함 없는 대상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과학자는 대상들의 세부적인 것의 여기저기에서 속속들이 그 대상들이 변형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토마스 쿤, <과학혁명의 구조>, 177쪽



나는 종종 하늘의 별을 보며 궁금해 하곤 했었다. ‘그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별 다른 도구 하나 없이, 어느 별이 움직이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구별할 수 있었을까, 만약 내가 1년 365일 밤하늘을 보며 누워있으면 그런 것들을 알 수 있을까’, 라고. 


토마스 쿤(Thomas Samuel Kuhn), 1922~1996

다시금 이 질문이 떠오른 이유는, 얼마 전 TV에서 본 다큐멘터리 때문이었다. 다큐 제작진들은 현대 문명과는 완전히 다른 삶의 양식을 가진, 태평양의 작은 섬 ‘아누타’를 찾아갔다. 그들은 엔진도 없는 카누 하나로 망망대해를 건너갔다. 놀라운 것은 13일 간의 그 항해를 이끌던 아누타인이었다. 그는 GPS에도 나오지 않는 자신의 섬을, 오로지 하늘의 별만을 보고 찾아갔다. 대체 그는 밤하늘에서 무엇을 보는걸까. 그 아누타인과 나는 같은 밤하늘을 보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토마스 쿤이라면 이 물음에 대해 ‘아니’라고 답할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와 갈릴레오의 차이에 대한 쿤의 이야기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하나의 사실에 여러 해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쿤은 해석 이전에, 우리가 가지는 데이터 자체가 다르다고 이야기한다. 흔들리는 돌을, 아리스토텔레스는 끈에 묶여 떨어지는 운동으로, 갈릴레오는 좌우로 왔다갔다하는 진자운동으로 보고 있었다. 그 둘이 과학적으로 서로 다른 결과에 이르게 된 것은, 그들이 운동 자체를 서로 다르게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석이 아닌, 관찰 그 자체의 차이. 요컨대, 아리스토텔레스와 갈릴레오는 서로 다른 지각방식을 가졌다.


인간이란 동일한 생물학적 지반을 가지고 있기에, 시대와 상관없이 동일한 지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쿤은, 지각이란 시대를 초월한 객관적인 무엇이 아니라고 말한다. 어떤 것을 본다는 것은 이미 무엇을 보아야 하고, 보지 말아야 하는지를 전제로 하는 활동이다. 쿤은 이 전제를 ‘패러다임’이라고 부른다.


패러다임은 하나의 렌즈다. 각각의 시대는 나름의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고, 그 패러다임은 불연속적이다. 그러니 우리는 같은 인간이지만, 시대마다 완전히 다른 렌즈를 끼고 세상을 본다고 말해야 한다. 그리고 그 렌즈로부터 사실이 따라 나온다.


쿤은 모든 시대를 관통하는 하나의 사실이 있다는 우리의 믿음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렇다고 사실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사실은 많다. 시대마다 다른 패러다임이 있고, 그 만큼의 사실‘들’이 있다. 그리고 그 사실들의 차이란, 주관적인 관점 이전에 지각 방식 그 자체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패러다임에 따른 이 지각의 차이는 아마도 인간과 벌만큼 멀지 않을까 싶다. 인간이라면 그저 노랗게만 보이는 꽃. 그러나 그 꽃에서 벌은 노란 색 대신, 아로새겨져 있는 무늬를 본다. 서로 다른 패러다임을 가진 사람들은, 벌과 인간처럼 서로 다른 세상의 결을 본다. 그래서 하나의 패러다임에서 보이는 어떤 결이 다른 패러다임에서 전혀 보이지 않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아누타인에게 보이는 밤하늘의 결이 내게는 전혀 드러나지 않듯이 말이다.


-신근영




#2


“새로운 과학적 진리는 그 반대자들을 납득시키고 그들을 이해시킴으로써 승리를 거두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자들이 결국에 가서 죽고 그것에 익숙한 새로운 세대가 성장하기 때문에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 그러나 그것들은 재평가를 필요로 한다. 과거에는 그런 사실들이 과학자들은 단지 인간에 불과할 따름인지라 엄정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흔히 간주되었다. 나는 이 문제들에서는 증명 또는 착오의 어느 것도 논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 패러다임으로부터 패러다임으로의 이행은 강제될 수 없는 개종 경험이다. 특히 정상과학의 옛 전통을 신봉하는 이들이 일생에 걸쳐서 벌이는 저항은 과학적 기준의 위반이 아니라 과학적 연구의 성격 자체에 대한 지표가 된다. 저항의 근원은 결국 옛 패러다임이 모든 문제를 풀어주리라는 확신, 즉 자연이 패러다임에 의해서 제공되는 틀 속으로 맞춰진다는 확신에 있다. 사실상 때때로 그렇게 되듯이, 혁명기에는 그런 확신은 고집스럽고 완고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확신은 또한 무엇인가 그 이상의 것이다. 바로 그 확신은 정상과학 또는 퍼즐 풀이의 과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같은 책, 216쪽)  



수많은 고수들이 치열하게 무공을 연마하고 겨루는 무림의 세계를 아시는지? 자신만의 권법을 갈고 닦으며, 천하를 평정할 그 날을 꿈꾸는 무림고수들. 음산한 산길에 바람에 휘날리는 나무들 사이로 두 사내가 서있다. 두둥. 무협영화에 많이 나오는 장면이다.^^ 이윽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나무들 사이를 달리며 서로의 기운을 느끼는 두 사내. 결투는 시작된다. 짧은 순간, 그들이 연마한 다양한 권법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하지만 몇 합 주고 받지도 않고, 승부는 끝이 난다. 상대방의 내공을 확인했으니 더 이상 싸울 필요는 없다.
 

자신의 무공 부족을 절감한 패자. 그는 쓸쓸히 고향으로 떠나간다. 그러나 그는 패배했다고 자신의 권법을 포기하지 않는다. 절치부심하고, 자신의 권법을 완성시키면 되는 것. 승자 역시 패자에게 자신의 권법을 강요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 절대강자의 권법은 없다는 것을, 그리고 승부는 얼마만큼 자신의 권법에 확신을 갖고 치열하게 수련하느냐에 달렸다는 것을 고수들은 다 안다. 이 얼마나 낭만적인 고수들의 세계인가^^
 

무협영화에서나 보는 무림계, 너무나 공상적이고 상상적인 것 같아 이런 세계가 실제로 존재할까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세계가 실제로 있다. 바로 과학계다!! 어처구니 없지만 과학철학자 토마스 쿤이 그리는 과학계를 보고 있노라면, 이곳이야말로 과학고수들의 무림세계, 이론들의 각축장이다.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

난 예전에 ‘무림 과학계’와는 아주 다른 과학계에 대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과학이란 절대적 진리에 비추어 참-거짓을 가려내는 객관적 학문이라 믿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아인슈타인이란 과학자는 꽤 실망스러웠다. 그가 죽는 그날까지도 현대과학에서 핵심이 되는 양자역학을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에 대한 자신의 결정적 반론이 틀렸다는 것이 밝혀졌음에도, 그는 자신의 반론이 부족했고 더 적절한 반론을 제시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양자역학을 겸허하게 수용하기는커녕, 끝까지 자신의 입장을 고수했다. 헝클어진 머리에, 혀를 내밀고 있는 사진 속 아인슈타인의 자유분방한 모습과는 달리, 그는 완고한 고집쟁이였다.
 

하지만 쿤에 의하면 아인슈타인은 재평가되어야 한다. 그가 보기에 과학계엔 어떤 이론이 옳은지 그른지를 가려줄 ‘진리의 심판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론들을 평가할 객관적이고 정확한 척도는 어디에도 없는 것. 그러기에 누구의 이론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말할 수도 증명될 수도 없다. 양자역학과 아인슈타인 역시 그렇다. 단지 그들은 서로 많이 다를 뿐이었다. 세계를 불확정적인 확률로 설명하려는 양자역학, 반면 세계를 인과적이고 결정적으로 설명하고자 한 아인슈타인, 이들이 서로를 수용한다는 일은 개종과도 같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맞붙었고, 필사적으로 경합하고 논쟁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상대방에 대한 반론과 사고실험을 생각해냈고, 끊임없이 상대방을 설득했다. 그들 모두 그저 자기 신념을 끝까지 꿋꿋이 실현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승리자는 양자역학이지만, 이 과학이라는 무림계에서, 아인슈타인은 결코 패배자로 남지 않는다.
 

오히려 뜻을 굽히지 않았던 아인슈타인의 확고한 태도는 과학적 기준의 위반이 아니라, 칭송받아 마땅한 것이다. 그의 태도는 과학연구의 성격을 대변한다. 위대한 과학연구는 확신과 신념에 가득 찬 자들이 자신의 연구를 끝까지 밀고 나갔던 ‘뚝심’, 그리고 그들이 만드는 역동적인 이론들의 각축장 속에서 창조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과학연구의 독특한 특성이며, 이를 토대로 과학은 발전해갔던 것이다.
 

쿤이 바라보는 ‘무림 과학'. 이것은 참-거짓의 진리게임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절차탁마하고, 경쟁자들과 치열하게 경합하면서 자신만의 창조물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마치 무림고수들이 무공을 갈고닦으며, 자신만의 필사권법을 창조해내듯. 이 속에서 과학자들은 자신의 이론이 옳은지 그른지를 평가받기보단, 어둠이 가득 찬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고 개척해나갔다. 오늘날 우리가 진리라고 여기는 것들은 바로 그 개척과 탐험의 결과물이다.



-정철현




#3


[과학의 효율성과 같은] 이 성격들 중 일부는 성숙한 과학자 사회가 일반인과 일상생활의 요구로부터 유례 없이 고립된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 일반 사회로부터의 과학자 사회의 유리(遊離)는 과학자 개인에 의해서 풀릴 수 있다고 믿을 만한 근거가 충분한 문제들에 [과학자] 그의 주의를 집중하도록 허용한다는 것이다. 공학자와 다수의 의사들과 대부분의 신학자들과는 달리, 과학자는 그 해결이 시급히 요청되고 그것들을 푸는 데에 소용되는 수단들을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유로 해서 문제들을 선택할 필요는 없다. …… 자연과학자들이 거의 그렇지 않은 데에 비해서, 흔히 사회과학자들은 주로 해결책의 강구가 사회적으로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견지에서 연구 문제의 선택을 옹호하는 경향이 있다. - 예컨대 인종 차별의 결과라든가 경기 순환의 원인 등의 문제에서 그러하다. 그러면 어느 쪽 그룹이 더 빠른 속도로 문제들을 해결하리라고 예상 할 수 있을까? (232쪽)



‘과학은 어떻게 이토록 빠른 발전을 할 수 있었을까?’ 과학사를 공부하는 내내 쿤이 가졌던 의문이다. 마침내 쿤은 과학이 사회적 이슈에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라 결론내린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과학 자체의 문제에 집중할 수 있었고, 과학은 효율적이고 빠른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다시 말해 과학이 앞으로도 빠르게 발전하려면 계속해서 사회로부터 ‘고립’되어야 한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사회의 영향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줄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그 보호자가 바로 국가와 자본이다. 과학자들은 정부와 기업에게 연구지원이나 투자를 요청한다. 과학 내부에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문제들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과학자들이 국가와 자본의 보호를 요구한다고 해서, 그들을 위해서 연구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과학자들은 사회정치적 문제와 마찬가지로 국가와 자본의 간섭은 과학자체의 발전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과학자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들을 사회로부터 지켜주되, 간섭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이런 방식이면 과학에만 집중할 수 있을까. 국가와 자본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과학자들은 과학만을 위한 연구를 할 수 있을까. 아니다. 국가와 자본이 과학을 간섭하지 않는다고 해서, 과학이 순수한 것은 아니다. 간섭만 없으면 된다는 건 너무 순진한 생각이다.


각각의 장은 그 장을 작동시키는 나름의 사유 방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그 장의 사유들을 익히게 된다. 과학자들이 과학의 보호를 위해 국가와 자본의 장 안에서 연구를 할 때, 빠지게 되는 함정이 여기에 있다.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의도적으로 국가나 자본을 위해 연구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와 자본의 장 위에 서게 되는 이상, 그 장의 사유를 자연스레 흡수하게 된다. 국가가 가진 위계적 명령체계나 자본이 작동하는 ‘이익과 경쟁’의 논리, 이런 사유들이 과학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과학은 순수한데 과학을 응용하는 기술만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과학 자체 수준에서 이미 국가적·자본적 틀이 끼어드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과학이론들이 국가와 자본의 사유를 재현하고 있다. 대부분의 생물학자들은 자연현상을 ‘이익과 경쟁’의 구도로 설명하는데, 이는 완벽히 자본의 논리다. 자본주의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과학자들도 별다른 의심 없이 이런 설명에 수긍한다. 또한 유전자를 이해하는 방식은 국가의 위계적 구조를 떠올리게 한다. 유전자는 모든 정보를 소유하고 있고 그로부터 모든 지시가 내려진다. 그리고 미천한 물질을 이루게 되는 단백질이 명령에 따른다. 이 상명하복의 틀은 국가가 작동하는 방식과 너무나 닮아있다. 이런 과학책을 보고 있으면 마치 자연이 원래 위계적이고 이익을 쫓는 경쟁적 세계라는 생각이 든다. 과학자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국가와 자본에게 과학적·물질적 정당성을 주고 있는 것이다. “경쟁과 지배는 ‘자연’스러운 것이야!”


처음 과학자들의 목표는 사회적 문제에 흔들리지 않는 과학이었다. 하지만 이를 위해 과학자들이 국가와 자본의 울타리 속으로 들어가게 되자, 과학은 국가나 자본에 크게 휘둘리게 되었다. 과학이론 속에서 이들의 논리를 재생산하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런 과학의 발전이란 지금 국가와 자본의 발전을 가속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 고립된 과학을 꿈꾸었던 쿤과 과학자들의 생각이 모순에 이르게 된 것이다. 과학연구에만 매진한 결과가 가장 정치적인 과학이라니.


‘국가-자본’에 의해 보호받는 과학, 그리고 그 보호가 만들어내는 정치성. 그렇기에 과학이 진정 자유로운 사유를 하고자한다면, 순수한 과학이라는 대전제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알 것이다. 물론 고립되지 않은 과학은 ‘빠른’ 발전을 이룰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학의 힘은 그 속도가 아닌, 자연에 대한 풍부한 앎과 새로운 사유양식을 던져주는 데 있다. 그렇기에 과학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보호가 아닌 야생성이어야 하지 않을까. 



-박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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