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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과학/과학 톡톡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했던 갈릴레오, 이 말의 의미는?

by 북드라망 2013. 11. 5.

운동을 넘어 운동의 변화로 ②편


  존재한다, 고로 운동한다




적도에서의 지구 자전 속도 시속 약 1700km. 공전 속도는 시속 약 10만km. 우리는 이런 지구에서 산다. 놀이동산 얘기를 다시 해보자면, 롤러코스터의 속도는 시속 100km를 넘는 정도다. 그 무섭다는 롤러코스터지만, 지구의 자전·공전 속도에 비하면 장난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구의 자전·공전 속도에서 가슴이 철컥 내려앉는 짜릿함을 느끼지 못한다. 문제의 출발은 이것이다. 우리는 지구를 타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속도로 운동하고 있지만 결코 그 속도를 감각할 수 없다는 것!


지구가 돈다구? 


"그래도 지구는 돈다!" 종교재판에서 지동설을 철회하고 나온 갈릴레오가 했다는 말이다. 사실 갈릴레오가 정말로 이런 말을 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럼에도 이 한 마디 말은 무척이나 갈릴레오스럽다. 


갈릴레오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문제는 ‘지동설’이다. 여기서 잠깐! 우리에게 ‘지동설=태양중심설’이란 공식이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둘은 다르다. 케플러의 경우에는 태양 중심의 우주상을 가졌었다. 그가 끊임없이 증명하고자 했던 점은 지구가 아닌 태양이 중심이라는 점이었다. 이에 비해 갈릴레오가 집중한 문제는 지구가 돈다는 사실이었다.


갈릴레오가 마주한 싸움은 천동설에 대한 것이었다. 움직이는 것은 하늘이고, 지구는 정지해 있다는 우주의 상. 지구는 하늘의 행성들과는 달리 특별했다. 그 특별함을 증거하는 것이 정지해 있는 지구다. 갈릴레오는 이런 특별히 선택받은 지구, 그래서 정지해 있는 지구라는 문제와 싸웠던 것이다.


갈릴레오에게 지구는 하늘의 다른 행성들과 다를 바 없었다. 지구는 하늘에서 벌어지는 그 운동들에서 예외적 존재가 아니라는 것! 하늘의 태양이, 달이, 목성, 금성이 운동하듯, 지구 역시 하늘을 운동하는 하나의 행성이었다. 지구는 이 우주 만물들의 하나로, 우주의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운동을 한다는 사실이 갈릴레오가 천착한 지동설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것을 증명하는 것은 엄청나게 어려운 문제였다. 천동설이 제기된 이후로, 수많은 사람들이 지동설을 들고나왔다. 하지만 번번이 천동설에 깨졌다. 천동설에는 아주 강력한 증거 하나가 있었다. 간단히 말해, 지구가 돈다면 왜 우리는 지구가 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느냐는 것! 이보다 강력한 증거가 어디있으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누구도 지구의 엄청난 운동 속도를 체감하지 못한다. 혹 느끼신다면 언능 병원에 가봐야 할 일이다.^^;; 


갈릴레오의 설명을 듣고 있는 주교의 표정을 보라, 아마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런 표정이지 않았을까?


이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면 이렇다. 탑 위에서 공을 떨어뜨려 보라. 만약 지구가 돈다면, 땅에 붙은 탑은 지구를 따라 돌 것이다. 그러면 떨어뜨린 공은 탑 뒤로 떨어지게 된다. 허나 그렇지 않다. 공은 떨어뜨린 그대로 탑 옆에 안착한다. 지구가 돈다면 이 현상을 어찌 설명할 것인가. 누구도 이 명확한 경험 앞에서 지동설을 밀고 나갈 수 없었다. 갈릴레오를 가로막은 거대한 벽은 이것이었다. 어찌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이 강력한 증거를 반박할 수 있을까. 여기서 갈릴레오가 들고 나온 것이 바로 ‘관성’이다.



운동은 계속된다, 쭈우욱~


한 가지 염두해 둘 점이 있다. 우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지구가 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 우리는 단지 지구가 돈다고 배웠을 뿐이다. 탑에 대한 이야기 마찬가지다. 우리는 결코 탑에서 떨어뜨린 공이 뒤로 떨어지는 것을 경험할 수 없다. 요컨대, 일명 탑의 논증이라 불리는 이 사실을 깨는 것은, 어려운 게 아니라 불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서 갈릴레오의 기발한 아이디어가 빛을 발한다. 갈릴레오는 탑의 논증에 대해 배의 논증을 가지고 온다. 움직이는 배 위에 높이 솟은 마스트. 그 위에서 공을 떨어뜨려보자. 그 공은 마스트 뒤로 떨어지지 않는다. 마스트 옆으로 그대로 떨어진다. 오호라, 이것이다. 탑에서 떨어지는 공, 움직이는 배의 마스트에서 떨어지는 공. 둘의 실험 결과가 같다.


움직이는 배에서 공을 떨어뜨려도 t1에서 t2로 떨어진다는 점~


그래서 어떤 거냐고? 바로 탑의 논증이 지구가 정지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지구가 설령 움직이지 않더라도, 움직이는 배에서 똑같은 결과가 나온다면, 더 이상 탑의 논증은 지구 정지를 지지하는 증거가 될 수 없게 된다.


과학철학자인 파이어아벤트(Paul Feyerabend)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는 디퓨즈(defuse)의 방법이다. 디퓨즈란 폭탄 같은 데서 퓨즈를 제거함으로써 더 이상 폭탄이 터지지 못하는 상태가 되도록 하는 걸 뜻한다. 요컨대, 무장해제라 할 수 있다. 갈릴레오는 지구의 운동을 직접적으로 감각하는 게 불가능한 상황에서, 지구의 정지를 지지하던 가장 강력한 증거를 제거해 버린 것이다. 갈릴레오는 이런 무장해제를 통해, 자신의 지동설에 사람들이 좀 더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그리고 이와 함께 온갖 것들을 동원해 지동설을 증명하는 일에 매달린다.


다시 탑의 논증과 배의 논증 얘기로 돌아와 생각해 보자. 왜 그런 동일한 결과가 나오는 것일까. 여기서 갈릴레오는 다시 한 번 기발한 생각을 하게 된다. 이를 좀 더 현대적인 실험으로 살펴보자. 정지해 있는 장난감 자동차 하나가 있다. 자동차 천장에는 구멍이 하나 나 있다. 이 구멍을 통해 위로 구슬을 쏘아 올린다. 공기저항은 없다고 하자. 그럼 그 구슬을 어떻게 될까. 딩동~. 쏘았던 차 안으로 그대로 다시 떨어질 것이다.


그럼 이제 일정한 속도로 자동차를 달리게 해보자. 그리고 다시 하늘(수직방향)로 구슬을 쏘아보자. 자동차는 계속 같은 속도로 달리고 있다. 그럼 어떻게 될까? 자동차 뒤로 구슬이 떨어질까? 아니다. 구슬은, 앞으로 달려나간 자동차로 다시 떨어진다. 그림으로 보자면 이렇다.


왼쪽이 정지해있는 차, 오른쪽이 움직이는 차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쏘기 전의 구슬은 달리는 자동차에 실려 있다. 요컨대, 구슬은 자동차와 함께 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구슬은 자동차를 떠나도 하고 있던 운동을 계속하려 한다. 하고 있던 그 운동을 계속하려는 경향성 때문에 구슬은 앞으로 계속 나아가게 된다. 이것이 위로 쏘아올린 힘과 합쳐져 포물선 운동으로 나타난다. 그 결과 구슬은 다시 자동차를 따라 잡아, 자동차에 떨어지게 된다.


‘하고 있던 운동을 계속하려는 경향성’. 여기에 갈릴레오가 말한 관성의 포인트가 있다. 어떤 운동을 하고 있던 것은 그 운동을 계속하려 한다. 바꿔 말해, 운동은 어딘가에 가기 위해 일어나지 않는다. 도착할 고향이 있기에 운동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단지 하던 운동이 있고, 그 운동을 계속 이어나갈 뿐이다. 운동은 계속된다. 쭈우욱~.



목적 없는 운동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존재(있음)가 가만히 있지 못하고 운동하는 것이 신기한 일이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물었다. “왜 운동하지?” 그는 이에 대해 답한다. 어떤 목적이 있어서라고. 존재는 실향민으로 태어나고, 자기에게 적합한 상태나 장소를 찾기 위해, 요컨대 고향에 도달하기 위해 운동한다고. 운동은 그 고향에서 끝날 일이었다. 그리고 그 운동의 종식이야말로 존재가 도달해야할 최상의 상태였다.


허나 갈릴레오에게 운동은 그런 정지를 향한 움직임이 아니었다. 한 번 일어난 운동은 계속된다. 존재는 정지를 바라며 움직이는 게 아니다. 오히려 존재는 그 운동 속에 계속해서 머무르려 한다. 존재가 운동을 멈추게 된다면, 그건 외부의 어떤 방해 때문이다. 도달해야 할 목적지는 없다. 그래도 굳이 목적을 찾자면, 자신의 운동을 지속하려는 ‘관성’이다.


나는 모든 물체들이 무거운 물체가 아래쪽으로 움직이려고 하듯이 그들 나름대로 특정한 운동을 하려는 경향이 있음을 관찰하였다. 이러한 운동은 그 물체의 내부에 존재하는 물체의 고유한 속성으로 이 물체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저항이 없는 한 외력이 가해지지 않더라도 일어나는 것이다.


─갈릴레오, 「태양의 흑점현상의 증거와 역사」, 버나드 코헨, 『새물리학의 태동』에서 재인용, 137쪽


오늘날 우리에게 관성은 좀 나쁜 의미로 쓰인다. 자기 고집만 부리고, 나쁜 습관을 버리지 못할 때, 우리는 관성적이라는 말을 쓴다. 이 의미가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갈릴레오가 관성이란 개념을 발명했을 때, 그가 가진 문제의식을 되짚어 봐야만 한다. 


칸딘스키, 「movement 1」, 1935


갈릴레오의 눈에 보인 세계에서 만물은 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에게 ‘왜 운동하지’는 질문 자체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그에게 기괴한 것은 지구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다는 이야기였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운동한다는 게 설명해야 할 현상이었다면, 갈릴레오에게는 운동하지 않는 것이 설명이 대상이 된 것이다. 이로 인해 그는 지구 또한 하늘의 행성들처럼 운동한다는 점을 보여주려 했다. ‘그래도 지구가 돈다’는 말이 갈릴레오의 상징이 되는 것도 이 지점이다.


갈릴레오가 관성을 통해 성취한 일은 만물의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로 운동을 만들어 놓았다는 점이다. 운동을 잃어버린 상태는 존재에게 부자연스러움이다. 이런 맥락에서 운동이 종식된,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조는 죽음의 상태라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도착지 없는 운동, 목적 없는 운동! 갈릴레오를 통과한 운동은 슬픔의 색조를 잃어버리고, 존재의 자연스러움이 된다. 그러니 이제는 이렇게 말해야 할 듯하다. 존재한다. 고로 운동한다! 



_신근영(남산강학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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