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 세 개의 시선
이케가야 유우지 지음, 이규원 옮김, 은행나무, 2005
#1
특히 신체와 뇌의 관계는 아주 미묘한 부분이다. 원숭이한테는 손을 인지하는 신경이 있지만, 물건이 멀리 있어서 손이 닿지 않을 때는 도구를 사용한다. 원숭이가 막대기를 사용해서 물건을 당기면 손가락 끝 쪽에서 반응하던 신경이 이번에는 막대기 끝 쪽에서 반응하게 된다.
사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는데, 이를테면 <그림29>처럼 짐을 어깨에 메고 좁은 길을 지난다고 하자. 평소라면 쉽게 지나갈 길이라도 짐의 앞머리 부분에까지 온 신경이 미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아마 그럴 때 뇌는 커다란 짐까지 ‘하나의 몸’으로서 관리하고 있을 거야. 신체의 일부로 간주해서 그 순간만큼은 내 몸이 커져 있는 셈이다.(88쪽)
그림 29
과학 공부를 하다 보면, 저자가 일본인인 책들은 일단 사고 보는 경향이 생겼다. 과학책이 그다지 많이 번역되지 않는데다가, 그나마 번역된 책들 대부분의 관점이 비슷비슷하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인 과학자들의 책은 나름의 독특한 시각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이케가야 유지의 『교양으로 읽는 뇌과학』 역시 그런 책 중 하나다.
뇌과학에 대한 이야기들을 접하다보면 답답했다. 무엇보다 현대판 정신-신체의 이분법이 그대로 이어지는 게 불편했다. 신체를 조종하는 정신. 이런 구도에서 정신은 신체보다 우월하다. 현대 뇌과학에서는 그 정신의 자리를 뇌가 대신하곤 한다. 비록 뇌 역시 신체의 일부분이나, 다른 모든 신체의 지배자로서 뇌가 그려지는 것!
이렇게 되면 뇌는 일종의 컴퓨터 하드웨어다. 컴퓨터에서 그 몸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컴퓨터 살 때를 떠올려 보자. 관심있게 보게 되는 정보는 하드웨어에 관한 것이다. 컴퓨터의 몸체는 그냥 디자인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뇌는 그런 하드웨어와 다르다는 게, 이케가야 유지의 이야기다. 예를 들어, 포유류들의 뇌는 그 형태와 구조는 거의 비슷하다. 하지만 뇌의 발달된 부분이나 뇌지도에서는 차이가 난다. 반면 인간들 사이의 뇌지도는 거의 다 비슷하다. 이런 차이와 유사성이 생기는 이유는 몸 때문이다.
동물 뇌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하드웨어, 즉 몸이다. 몸과 그 실행계인 뇌가 밀접하게 관계한다는 것이지. 물론 컴퓨터에도 키보드나 마우스가 달려 있지만 키보드를 떼어 버려도 컴퓨터의 실체는 변하지 않아. 또 키보드를 다시 연결해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기능한다. 하지만 뇌는 다르다.
팔을 떼어 내면 뇌 자체가 변해 버린다. 즉 타고난 몸이나 환경에 따라 뇌는 ‘자기 조직적’으로 자기를 만들어 간다.(77쪽)
돌고래의 몸, 쥐의 몸, 인간의 몸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뇌의 구체적 생김새와 기능이 달라진다. 그리고 인간은 그 몸의 형태가 비슷하기에, 유사한 뇌지도가 형성된다. 뇌의 기능을 좌우하는 건은 몸의 형태와 사용이다. 몸이 바뀌면, 뇌도 바뀐다. 요컨대, 뇌의 용법은 몸의 디자인에서 비롯된다!
블라디미르 쿠쉬, <기억의 섬>
이케가야 유지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뇌와 몸의 관계를 이야기한다. 만약 내가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잡으면, 그에 따른 뇌의 반응을 읽어낼 수 있다. 내 뇌는 내 몸 안에 있다. 그래서 당연히 내 뇌는 내 몸과 관계되어 반응하는 법이다. 음…하지만 이게 당연할까?
내 뇌가 내 몸에 있는 건 맞다. 하지만 내 뇌가 인식하는 신체의 경계는 유동적이다. 우리가 뭔가 ‘신경쓰인다’고 할 때가 바로 그런 순간이다. 우리가 이번에는 손이 아닌 긴 막대기를 이용해 멀리 있는 물건을 잡으려 한다고 해 보자. 그럴 때 뇌는 내 손에 따른 반응이 아닌, 긴 막대기 끝의 움직임에 대한 반응을 보여준다. 이케가와 유지의 말대로, 이럴 때 뇌는 긴 막대기 끝까지를 자신의 신체로 인식한다. 즉, 그 순간 내 신체는 막대기 끝으로 확장된다.
그러니 ‘신경쓰인다’는 말은 그냥 수사가 아니다. 내가 신경을 쓸 때, 그러니까 내 외부의 어떤 신체와 접속할 때, 내 뇌는 그 접속된 신체를 자신의 신체로 여긴다. 이런 경우, 접속된 신체까지가 ‘하나의 몸’이다. 내 안에 있는 뇌지만, 그 뇌는 나라는 한 개인의 신체에 국한되지 않는다. 신체는 접속을 통해 확장되고, 그렇게 새로운 하나의 신체가 형성된다. 자, 지금 어떤 일에 자꾸 신경이 가시는지? 그렇다면 신경이 쓰이는 그 부분까지가 바로 나의 신체다.
_신근영(남산강학원)
#2
‘상구’에서 보는 것은 의식상으로는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 상구의 기능은 글자를 읽을 수 있을 만큼 발달하지 않았다. 아마 대단히 원시적일 것이다. 어쩌면 포유류가 되기 전, 더 하등하고 대뇌피질이 거의 없던 시절에는 상구를 통해 사물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곳은 단순히 장애물을 피한다거나 어디서 빛이 반짝였는지 판단하는 정도의 (수준은 낮지만 중요한) 처리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 상구는 처리방식이 원시적이고 단순한 만큼 판단이 빠르고 정확하다.(129쪽)
얼마 전 투수가 던진 강속구를 찍은 동영상을 보았다. 시속 150km에 육박하는 엄청난 스피드였는데, 처음 봤을 때는 공이 지나갔는지도 몰랐다. 내가 타자였다면 정말 넋 놓고 삼진 아웃 당했을 것이다. 이렇게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도 신기했지만, 그런 공을 받아치는 타자들은 더 대단하게 여겨졌다. 야구 해설자들은 종종 저런 공은 눈으로 보고 절대 칠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대체 타자들은 어떻게 저런 공을 칠 수 있을까?
모두 잘 알다시피, 서로 다르게 보이는 이 두 선의 길이는 같다. 이젠 이건 그다지 놀랍지 않다. 착시현상이라고 워낙 많이 들어서, 이제는 오히려 두 막대의 길이가 정말 똑같이 보일 정도다. 착시현상은 2차원으로 들어온 시각정보를 뇌가 3차원으로 재구성하면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평면상의 그림인데도 우리 뇌는 거기에 깊이감과 원근감을 부여하고, 이 때문에 길이가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여기까진 뇌과학의 흔한 사례다.
그런데 이 착시현상에 새로운 이야기가 더 있다. 두 선의 길이를 가늠하려고 엄지와 검지를 벌려보자. 놀랍게도 우리는 이 두 선에 대해 똑같은 크기만큼 손을 벌린다. 눈으로는 길이가 다르게 보면서도, 손을 움직일 때는 동일한 길이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손에도 눈이 달려있는 것처럼 제 나름대로 판단하고 있는 것처럼.
상구를 찾아봅시다! +_+
정말 그렇다. 물론 손에 눈이 달려있지는 않지만(^^) 우리에겐 지금 우리가 보는 것 외에 다른 시각방식이 있다. 일상적으로 ‘본다’라고 말할 때, 여기엔 뇌에서 일어나는 몇 개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빛이 눈의 시신경으로 들어오면 이 신호가 시상을 거쳐 시각령으로 들어오게 되고, 그럴 때 우리는 ‘본다’라고 말한다. 시각정보가 시각령에 전달될 때, 의식에 어떤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래서 시각령이 손상된 사람들은 눈 자체에는 이상이 없지만 앞을 볼 수 없다. 시신경으로부터 정보가 들어오지만 의식에서 전혀 그것을 인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각령은 시각정보를 의식에 떠오르게 하는 곳이다.
한편 시각령이 아니라 ‘상구’를 거치는 시각경로도 있다. 상구(上丘)는 진화적으로 시각령보다 오래된 과거의 ‘눈’이다. 원시적인 수준이지만 빛을 감지하기 때문에 ‘본다’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시각령이 손상된 사람들은 눈으로 들어오는 정보를 상구를 통해 해석할 수 있다. 상구를 통한 시각은 무의식적으로 작용하긴 하지만, 보는 것은 분명하다. 상구는 시각령과는 독립적으로 정보를 받아 들일 수 있으며, 우리에겐 무의식적인 ‘느낌’으로 드러난다. 상구가 어떤 대상을 보고 우리에게 느낌이나 감정의 형태로 표현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보고 “왠지 그럴듯한” 이상한 기분이 들면, 상구가 사인을 주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착시현상에서 손의 너비를 정하는 것은 상구에 의한 시각경로였다. 시각령 경로에서는 둘의 길이를 다르게 보지만, 손을 벌리는 행동을 취할 때는 상구를 통해 길이를 인식한다. 그 결과 손은 두 선을 같은 길이로 판단한 것이다. 그러니 우리에겐 서로 다른 것을 볼 수 있는 두 개의 상이한 경로가 있다. 우리 뇌 안에서 세계를 다르게 보는 두 개의 ‘눈’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지금껏 의식에 들어오거나 선명한 사물의 이미지가 떠오를 때 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구가 의미하는 것은 우리에게 인지되지 않는 시각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때는 시각적 이미지가 아니라 느낌이나 감정의 방식으로 사물을 보고 있다. 그래서 ‘본다’는 것은 무의식적 과정까지 포함되며, 우리 자신이 눈으로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들 또한 보고 있는 것이다.
타자들이 강속구를 치는 것도 상구를 통해서다. 즉 공을 의식 수준에서 ‘보고’ 치는 것이 아니라, 상구를 통해 공을 ‘느끼고’ 배트를 휘두른다. “지금이다!”라는 느낌. 상구의 시각경로는 시각령 만큼 정교하지는 못하지만, 대신 본능적이고 즉각적인 반응에 적합하다. 그러므로 상구를 거치는 무의식의 힘을 빌려야 공을 맞출 수 있다. 야구선수들은 훈련할 때, 상구를 개발하는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도 타석에 들어서서 강속구를 칠 수 있다. 상구로 야구한다는 느낌 아니까! 비록 현실은 500원짜리 야구연습장일지라도.
박영대(남산강학원)
야구연습장의 공도 누군가에게는 '마구'가 될 수 있다는 점~
#3
동물 실험을 해보면 알 수 있는데, 하등한 동물일수록 기억이 정확하다. 즉 융통성이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일단 기억한 내용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일본 속담에 ‘참새는 백 살이 되도록 춤추는 것을 잊지 않는다’.(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에 상당하는 속담)는 말이 있지. 와, 대단한 기억력이네, 하고 존경에 가까운 기분이 들지도 모르지만 그런 기억은 기본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해야할 거야. 응용을 할 수 없으니까. 기억이 애매하다는 것은 응용이라는 관점에서 중요하다. 사람의 뇌에서 이루어지는 기억은 다른 동물에서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애매하고 어중간한데, 바로 그 점이 사람의 임기응변적인 적응력의 원천이기도 하다. 그 애매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뇌가 사물을 천천히 학습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학습 속도가 느리다는 것이 중요하다. 특징을 추출해야하기 때문이지.(177쪽)
기억력이 좋지 못한 사람을 보고 장난스럽게 ‘닭대가리’라고 말한다. 닭이 얼마나 모이를 주는 자기 주인을 알아보지 못했으면 이런 말이 생겼을까? 하지만 닭이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닭이 멍청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닭의 기억능력이 너무 좋아서 그런 거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일까?^^;;
닭을 비롯한 조류는 사람에 비해 훨씬 높은 해상도의 시력을 가진다. 인간의 해상도가 100만 화소라면, 새의 해상도는 500~600만 화소 정도 된다. 이는 거의 사진과 같은 수준이다. 새는 우리보다 훨씬 더 정확하고 세밀하게 세상을 이미지화하고, 이를 기억한다. 해상도 높은 카메라로 찍은 사진이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듯이, 새의 기억이미지는 해상도가 높고, 많은 정보량을 포함한다. 그런 의미에서 새는 기억력이 좋다.
닭 역시도 주인을 정확하고 세밀하게 관찰하고 그 모습을 기억한다. 그래서 차이에 민감하다. 주인은 매번 똑같은 모습으로 닭장에 간다고 생각하지만 닭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얼굴에 여드름이 났거나 머리 모양이 다르거나 다른 옷을 입었거나 하는 무시할 만한 변화가 닭에게는 무척이나 크게 느껴진다. 주인의 모습에 매우 큰 불연속성이 있기에, 닭은 주인을 매번 다른 사람으로 본다. 그러니 주인을 알아보지 못할 수밖에.^^;; 하지만 닭을 탓할 수는 없다. 우리 눈에는 정확한 기억을 가진 새가 융통성 없이 보일지는 몰라도, 하늘 위에서 저 멀리~ 지상의 먹이를 발견하려면 정말 높은 해상도의 시각이미지가 필요하다.
새가 부러우신가? 너무 부러워하지 마시라. 새와 달리 우리는 낮은 해상도의 시각과 애매한 기억을 가지고 잘 적응해서 살아간다. 애매함이 얼마나 중요한데! 집으로 돌아갈 때를 생각해보자. 집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던 건, 바로 집 가는 길을 애매하게 기억하고 있어서다. 아침, 낮, 밤의 길 풍경이 모두 달라지더라도, 어떤 길목에 새로운 건물이 들어섰더라도 별로 개의치 않는다. 우리는 ‘오른쪽으로 쭉~가면 슈퍼마켓이 나오고 거기서 왼쪽으로 돌면 우리 집이 나온다’와 같이, 집 가는 길의 주요한 특징들만을 기억한다.
이처럼 우리는 애매한 기억을 통해 낯설고 시시각각 변하는 환경 속에서 살아간다. 그렇지만 커다란 불연속성과 낯섦을 느끼지는 않는다. 어찌보면 애매한 기억은 세세한 차이를 보지 못하는 둔감함을 의미할 수 있지만, 반대로 큰 적응력과 생존력을 준다. 일례로, 둔감한 사람은 예민한 사람과는 달리 낯선 환경 속에서도 잘 먹고, 잘 자지 않던가.
어디서나 잘 먹고 잘 자는 것도 능력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바로 애매함으로부터 나오는 융통성은 우리의 기억을 활용하고 응용할 수 있게 한다. 예를 들어 못을 박을 때 망치가 없다면, 우리는 다른 것을 이용해 못을 박을 거다. 우리가 못을 박는 행위에 대해 '무겁고 단단한 어떠한 물체로 못을 내리치는 행위'라고 애매하게 머리 속에서 이미지화하기 때문이다. 못 박는 행위와 연장들의 주요한 특징만을 추출해 대략적으로 기억하는 것이다. 기억 속에서 ‘무겁고 단단한 것- 못’이라는 애매한 계열의 이미지는 망치 대신에 그와 비슷한 다른 많은 연장들, 펜치나 돌 같은 것을 가져다 쓸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애매한 기억 덕택에 우리는 응용과 활용의 달인이 될 수 있다.
이케야 유지는 애매한 기억을 이렇게 강조한다. “바로 뇌는 대상에서 발견되는 어떤 특징이나 규칙, 시야에 순간적으로 들어오는 모습들 속에 숨어 있는 기초적인 공통항 같은 것들을 자동적으로 뽑아낸다.……결코 사진과 같은 방식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기억은 정확하면 안 되고, 절대적으로 애매해야만 한다.……기본적으로 완벽한 기억이라는 것은 도움이 안 된다.(174쪽)
그의 말처럼 우리에게 완벽한 기억은 도움이 되지 못한다. 반대로 우리는 완벽하지 않는 기억을 가짐으로써만 살아갈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세계를 불확실하고 대충 파악하기 때문에 세세한 차이를 간과하고, 많은 착각과 실수를 한다. 하지만 애매함을 부정적으로만 받아들일 수 없다. 바로 이것 덕택에 우리의 생존력과 적응력이 높아지니까. 우리는 애매한 기억을 갖기 때문에 부족하고 무능한 존재가 아니라, 바로 그것 덕택에 잘 살아가는 존재이다.
_정철현(남산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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